소설리스트

528화 (527/535)

김진철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곤 다시 말했다.

“하루 사이에 잃었던 마력을 거의 회복했더군. 괴물 같은 회복력에 깜 짝 놀랐지.”

이서준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 다.

확실히 김선우의 회복력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긴 했다.

“그래서, 선우랑 만나서 무슨 얘기 를 나눴어요?”

“별 얘기는 없었다. 진천우가 남겼 던 돌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묻고 싶었거든. 근데 놈도 모르는 눈치더 구나. 딱히 거짓말하는 거로 보이지 도 않고.”

“흐음. 선우도 모르는 건가……

이서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어쨌든 건강해 보여서 보기는 좋았다. 다만……

김진철이 말끝을 흐렸다.

이서준이 의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김진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뭔데요? 왜 말을 하다가 마요.”

“왠지 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뭐,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 신경 쓰지 않 아도 된다.”

이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 시간 김진철과 함께 해왔기에 이서준은 알고 있었다.

그의 ‘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는 것을.

그때 이서준의 스마트 폰에서 메시

지 알람이 울렸다.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이었다.

[최서윤 : 맞다. 저희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 같아요.]

[신영준 : ??? 무슨 차질?]

[최서윤 : 선우 선배님이 선약 때 문에 다음 달에 바쁠 수도 있다고 해서..]

[윤하영 : ?? 무슨 선약?]

[윤하영 : 선우야.]

[윤하영 : ©김선우]

“무슨 일이라도 있냐?”

김진철의 말에 이서준이 고개를 저 었다.

“아뇨. 다음 달 휴가 때 친구들이 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안 맞나봐요.”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메시지로 시 선을 돌렸다.

[윤하영 : 무슨 선약인지 말 안 해 줬어?]

[최서윤 : 선배님 말로는 회장님과

의 선약이래요]

[유아라 : 김진철 회장님?]

[최서윤 : 넵.]

«..2”

이서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 혹시 선우랑 무슨 약속 잡았어요?”

“아니? 그런 적 없는데?”

김진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시초 문이라는 표정이다.

이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스마트

폰을 다시 내려보았다.

“……뭐지? 김선우가 거짓말을 한 건가?”

* * *

[‘진천우’의 모든 기억을 흡수했습니다.]

“읏……

진천우의 모든 기억을 읽은 나는 깊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진천우의 일생. 그의 신념, 생각, 지식.

……그리고 그가 본 세계의 미래까 지.

순간 진천우와 동화된 기분을 느끼 며 혼란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천우는 이런 삶을 살아왔던 건가?”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왔었다.

신비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세계의 불합리한 법칙.

그는 그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모험을 해왔다. 내가 알고 있던 진천우의 과거 행방은 극히 일 부에 불과할 만큼.

고작 인간으로 태어난 그가, 자연 에게. 세계에게. 신에게 도전한 것이 었다.

“ 후우......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두통을 참 아냈다.

서서히 두통이 잦아들고 머리가 맑 아졌다.

진천우가 본 미래.

그의 말대로 이 세계는 빠르게 파 멸하게 될 것이었다.

무너지는 법칙을 지키기 위해 세계 는 스스로를 리셋하려 하기 때문이 다.

그렇게 되면 세계엔 수많은 재난과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먼 훗 날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길어봤자 30년이려나.

물론 파멸을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나 자신이 ‘신’이 되어 세계가 파 멸하지 않도록 세계를 구성하는 술 식을 수정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 니다.

나에게는 권능, [데우스 엑스 마키 나]가 있으니까.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세계를 수정하기 위한 골든타임이 있다는 것.

진천우의 죽음 이후 1년이나 잠들 어버렸기에 이제 그 시간이 얼마 남 지 않았다.

아마 길어야 한 달 정도려나?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

“결국 돌아가야 하네.”

세계를 안전하고 올바르게 수정하 기 위해서는 세계에 ‘외부자’가 존

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파멸을 막기 위해 ‘나’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아......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세계에 정착할 마음이 생 겼는데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고?

“……진짜 장난해?”

애초에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나의 노력으로 세계의 운명을 바꾸 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나의 운명 은 정해져 있던 것이다.

불합리함과 억울함에 그 어떤 생각 도 들지 않았다.

“이걸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런 준비도 안 됐는데…… 이걸어떻게 설명해야…….

괴로움에 한숨을 내쉬자 내 발밑에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응애?”

유대의 효과로 내 감정의 변화를 느낀 그레텔이 다가온 것이다.

그레텔도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 꼈는지 눈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레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레텔 을 들어 안았다.

* ♦ ♦

“김선우? 아까부터 혼자 말이 없 냐?”

진천우의 기억을 읽고 혼자만의 시 간을 가진지 3일.

마음의 정리를 마친 나는 오랜만에 이서준 일행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곳은 협회 근처의 작은 술집.

취기로 얼굴이 붉어진 신영준의 말

에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내 말에 신영준이 안주를 입에 물 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하네…… 김선우. 저거 저럴 때마다 꼭 무슨 일이 터지던데.”

“흔한 패턴이긴 하지.”

유아라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 다. 다른 이들도 그 말에 공감한 듯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아라는 나를 빤히 바라보곤 걱정 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슬슬 ‘진천우의 기억’에 대한 이야 기를 해줘야 하는데, 차마 입 밖으 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상한데.”

“아무 일 없다니까 그러네.”

나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 다.

언제나 달달하게 느껴졌던 술맛이

오늘은 조금 쓰게 느껴진다.

“……뭐. 알았어.”

내 반응을 살핀 이들은 의심을 거 두고는 나를 따라 술을 마셨다.

이후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최근 협회 임무 중 있었던 이야기.

다음 달에 있을 휴가에 대한 이야 기…….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하영이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선우야. 다음 달 아예 시 간이 안 나는 거야?”

“다음 달?”

“응. 회장님이랑 선약이 있어서 한 달 내내 시간이 안 날 수도 있다 며‘?”

“아.”

그제서야 3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한세연과의 약속 때문에 못 갈 거 같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다 른 이유로 못 가게 되었다.

“응. 그렇게 됐네. 미안.”

그러자 이서준이 끼어들었다.

“근데 할아버지 말로는 너랑 따로 선약 잡은 게 없다던데.”

“..2”

이서준의 말에 모두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회장님이랑 약 속 있는 거 아니었어?”

유아라가 묻자 이서준이 고개를 저 었다.

“할아버지 말론 따로 약속 잡은 게 없다는 데?”

“......뭐야?”

“선배님?”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거짓 말을 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 그게. 김진철 회장님이 아니라 다른 회장님을 말한 거였어.”

“다른 회장님?”

잠시 생각에 잠기던 최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른 회장님이라면…… 설마 한세 연 님이에요?”

“……어, 맞아.”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딱히 해명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왠지 큰 죄를 지은 기분이다.

그때 윤하영은 분위기를 다시 살리 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얘들아 왜 그래. 약속이 있을 순 있지. 근데 한 달 내내 약속을 잡은 건 아닐 거 아니야. 그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세계 일주를 하기로 했 었어서.”

뭐, 그것도 결국 가지 못하게 됐지 만.

그 순간, 웃고 있던 윤하영의 얼굴 이 굳었다.

“단둘이?”

늦은 새벽.

간신히 오해를 푼 나는 술자리를 마치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옆에는 집 방향이 같은 최서윤 이 함께 있었는데 술기운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말없이 길을 걷던 그녀가 내게 힐 끔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선배님. 저 오늘은 멀쩡하죠?”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전에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을 땐 몇 잔 마시고 취했었는데 오늘은 상 태가 좋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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