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득, 머릿속에 어떤 가설이 떠올 랐기 때문이었다.
진은 내 생각에 화답하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분이라면 네 고향과 이 세계를 연결하는 것도 가능해. 이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최서윤 역시 깊은 당혹감을 느낀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계를 연결할 수 있다고?”
실제로 내가 머뭇거리자 진이 억지 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분이라면 가능해. 고향도 이곳도,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 는 거지?”
그 말이 맞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고민했던 것 이었고.
“이서준만 우리에게 넘겨. 그렇다 면 네 바람을 이루어줄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진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래, 우리의 손을 잡아라. 그분이 라면 네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다.”
“서, 선배님……!”
뒤늦은 최서윤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덧 거리가 가까워지고 진이 내 게 손올 뻗었다.
그리고.
파아아앙!
“끄아악!”
내 손에서 방출된 마법이 진의 육 신과 충돌해 폭발을 일으켰다.
바닥을 한차례 구른 진이 당혹감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크으윽! 어, 어째서?”
나는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세계를 연결하는 게 불 가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지난번 잠든 신비 깨워 알게 된 사실이다.
큰 차원을 연결하는 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조금 좌절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였 지만, 신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이건 진천우가 나를 흔들 기 위해 지어낸 거짓이라는 소리다.
만약 신비를 통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놈의 제안에 흔들릴 수밖 에 없었겠지.
진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 다.
“……신이 위험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놈은 진 천우를 걱정했다.
내 손바닥 위로 다시 마법 구체가 구현되었다. 금빛의 구체. 나는 곧 놈을 향해 방출했다.
콰아아아앙!
[S급 빌런, ‘진’을 처치했습니다.]
[인과율이 1.5 상승합니다.]
“아, 안돼! 진!”
백은성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내 놈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내
게 창을 휘둘렀다.
“야이, 개새끼야!”
그러나 놈.의 육신은 몇 번의 공격 을 허용하며 망가진 상태.
나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는 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찍어 눌렀다.
이후 발로 놈의 가슴을 누르곤 마 법 구체를 구현했다.
“진천우는 어디에 있지?”
“크으으윽!”
백은성의 얼굴엔 굴욕으로 가득했다.
나는 상체를 숙여 마법 구체를 놈
의 이마에 가져댔다.
“너, 진을 감히……!”
백은성이 눈물을 홀렸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해온 악마가, 자신의 동료가 죽었다고 저런 반웅 을 보인 것이다.
역겨움이 밀려 올라왔다.
“그냥 죽여. 이 새끼야. 귀신이 되 어서도 저주해줄게.”
“그러시던가.”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 왔다.
짙은 고요가 피어오르고, 나는 짧 게 심호흡했다.
[S급 빌런, ‘백은성’을 처치했습니다.]
[인과율이 1.5 상승합니다.]
거대한 연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백은성의 몸은 그대로 힘을 잃으며 쓰러졌다.
한순간에 두 명의 사람을 죽였지만 무덤덤했다.
씁쓸하지만 나도 이런 일에 익숙해 져 버린 거겠지.
“......후.”
이것으로 자운의 중요 멤버인 진과 백은성을 처치했다.
초창기부터 이어진 악연을 생각하 면, 생각보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나는 신체의 마나를 확인했다.
몇 번의 큰 전투와 폭주화를 사용 해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 다.
겨우 회복했던 마나가 다시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할 때 내 손에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최서윤이 손을 잡은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서 서준 선배님을 찾으러 가 요.”
♦ ♦ ♦
깊은 어둠에 그리운 공간.
짙게 퍼지는 마기와 함께 바닥의
마법진이 강한 빛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상의를 탈의한 한 남 성이 식은땀을 흘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진천우.
자운의 유일한 신이자, 세계를 공 포에 몰아넣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군.”
진천우는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충신이 목숨을 잃었다.
백은성과 진.
비록 자신의 계획을 위한 도구였다 고는 하나, 자운을 설립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자들이었다.
진천우는 씁쓸함을 느꼈다.
“제안에 실패한 건가.”
분명 먹혀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 패로 돌아갔다.
좋지 않았다.
놈의 몸에 흐르는 혼돈.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넘어오며 얻 은 특별한 혜택.
놈 덕에 세계를 바꿀 발판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증오로
최악의 숙적이 되었다.
“마인.”
“......네?”
진천우의 부름에 마인 주술사가 화 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완전 회복까지 얼마나 걸리지?”
“모, 못해도 5일의 시간은……
“너무 길다.”
순간 마인 주술사의 얼굴에 깊은 공포가 드리웠다.
마음 같아서는 주술을 빠르게 풀고 싶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회복된 거지?”
“75% 정도 회복하셨습니다……
“75%라. 애매하면서도 충분하군.”
만약 스승이자 세계 최강이라 불리 는 김진철이 합류하게 된다면 모르 겠지만, 이 정도면 다른 이들과의 전투는 충분하다.
지난 시간 피에 흐르는 신비의 힘 과 소수 일족의 능력을 단련하며 더 강한 힘을 얻었으니까.
부족한 힘은 그것으로 상쇄가 될 것이다.
“해주술을 중단해라.”
“네?”
오히려 당황한 건 마인이었다.
한시도 부족한 상황에 해주술을 중 단하라고?
진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 다.
“손님을 맞이할 때가 왔거든.”
콰아아앙!
그때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오더니 진천우의 앞으로 두 명이 바닥을 굴렀다.
자운의 애런과 이청이었다.
“……크으윽, 人L 신이시여.”
피를 뒤집어쓴 이청이 떨리는 눈으 로 진천우에게 말했다.
잠시 뒤 그녀는 정신을 잃으며 눈 을 감았다.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진천우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보곤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시 선을 돌렸다.
“……혼자서 온 건가?”
탁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이 피어올랐 다.
그리고 지저분한 수염의 남성이 담 배를 태우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 다.
그 모습을 보며 진천우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최일현.”
“안개가 다시 불안정해지는 거 같 지 않아요?”
최서윤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 렸다.
그녀의 말대로 주변의 시야를 흐릿 하게 하던 뿌연 안개가 점점 짙어지 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 아니 겠죠?”
“그건 아닐 거야. 날이 어두워지면
서 자연의 마력이 높아져 그런 거겠 지.”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거 같기도 하고…… 지금이 몇 시지.”
밤하늘이 보이지 않지만 저녁 7시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마나를 품은 달이 떠오르는 건 자 연의 마나가 짙어질 시간이라는 것이다.
“아마 7시쯤 될 거야. 시간이 늦었 으니 빠르게 움직이자.”
“넵.”
최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휙 나 를 돌아봤다.
“그런데 선배님.”
« O ”
흐.
최서윤이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선배님 은 한 번 회귀를 경험해봤잖아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내 입으로 회귀자라고 밝힌 적은 없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 기정사실 이 되어 있었다.
“혹시 회귀 전에 저희랑 있었던 특 별한 에피소드 같은 거 없어요?”
“……특별한 에피소드?”
예상치 못한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 여기서 겪어 보지 못한 추억 이라던가.”
“……없는데.”
내 말에 최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소소한 사 건 같은 건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없어.”
단호한 대답에 최서윤의 표정이 잠 시 멍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느끼고 있던 의문 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회귀 전에도 나와 자신의 관계가 비슷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곤 말했다.
“너와 대화를 나눠본 건 이번 생이 처음이야. 인사 한번 나눠본 적 없 었으니까.”
“저, 정말요?”
그녀의 두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 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혹시 마법사관학교 자퇴했었어
요?”
“아니, 정상적으로 졸업까지 했는 데.”
“그런데 어떻게 졸업까지 저랑 인 사 한 번 안 나눠볼 수 있어요?”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면 마법사관학교 시절 최 서윤은 특유의 관종력(?). 좋게 말 하면 높은 사교성을 지니고 있어 그 녀와 인사를 안 나눠본 사람이 없기 는 했다.
“그야 일부러 널 피했으니까.”
최서윤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