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용기 보다는 두려움의 감정이 더 컸다.
“어쩔 수 없죠. 여기서 물러나면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여기서 물러 나면 앞으로 이런 기회조차 생기지
않겠지.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해. 다음 세대의 평화를 위해서.”
염제와 그런 대화를 나누던 그때, 익숙한 기운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김선우!”
고개를 돌리자 이서준이 내게 다가 오고 있었다.
전장이라는 환경 속에서 긴장감 하 나 없는 모습이었다.
이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내게 말했다.
“2주 넘게 연락도 없이 뭘 한 거 야? 너 은월 가문도 다녀왔다며?”
“응? 아, 그렇지.”
며칠 전 흑색의 땅 환영 마법을 풀기 위해 은월가를 방문했었다.
가문의 은인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면서 엄청난 환대를 받아 꽤나 당황 했지만.
“갈 거면 같이 가지.”
이서준이 섭섭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안. 여러 가지 준비로 바빴거든. 아 참. 저번에 부탁한 건 처리했 어?”
“아. 이거?”
이서준이 허리춤의 검집을 들어 올 렸다.
검집에서 백천을 뽑자, 검신에 그 려진 술식이 빛을 뿜어냈다.
영혼 소멸의 술식.
안에는 이서준의 피의 마력이 담겨 있어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다.
“제대로 잘 해왔네. 잘했어.”
“얘는 무슨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 처럼 말하네.”
이서준의 농담하듯 한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이서준과 대화를 나누던 그
때, 또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 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는 연한 갈색 머리의 여성.
최서윤이었다.
순간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고 어색 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한 얼굴로 내게 어색함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이런 분위기가 된 건 이유가 있었다.
—고향으로 안 가면 안 돼요?
그날, 그녀와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헤어졌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당시의 감정이 지금까 지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평소 와 같은 미소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우리 같이 힘내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나는 고마움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힘내서 같이 이기자.”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기기만 해서는 안 돼요. 모두가 살아서 이겨야 해요.”
“맞아. 다치지도 마!”
어느새 윤하영이 끼어들며 한마디 를 했다.
이들의 말이 맞다. 이기기만 해서 는 의미가 없다.
모두가 살아서 이겨야, 승리에도 의미가 생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명의 돌 잘 간직하고 있지?”
“응. 지금도 들고 있어.”
이서준이 품 안에서 생명의 돌을 꺼내 들었다.
성유물답게 그 안에서 엄청난 신비 의 기운이 느껴졌다.
“절대 품에서 놓지 마. 그 돌이 널 지켜줄 거니까. 전에도 말했듯 이번 전투에서 네가 가장 중요해.”
“알았다니까. 그러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후우.
앞서 있었던 모든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숨을 크게 내뱉고는 마수 군단 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늘을 비행하는 거대한 흑룡.
놈의 육신을 중심으로 검은 마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회의 시간이 끝나고, 모든 여정 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 다.
나는 모두의 앞에 서서 마력을 끌 어올렸다.
뒤를 이어 염제도, 합세한 길드의 유명 간부들과 나의 친구들도 모두 전투를 준비했다.
크으으으으一!
그때 흑룡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 은 구체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푸른 빛의 눈을 빛내는 지상의 마 수들 역시 전투를 위해 자세를 낮췄 다.
크아아아아양-
그 외침이 신호탄이었다.
지상의 마수들이 포악한 움직임으 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고, 흑룡은
검은 구체를 우리를 향해 방출했다. 나는 곧바로 손바닥을 펼쳐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마력은 마법진의 형태가 되어 절대 방어의 마법, 원반격의 술식으로 변 화했다.
동시에 검은 구체가 원반격에 닿으 며 강한 빛을 뿜어냈다.
파아아앙!
구체는 빠르게 반사되어 지상의 마 수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마수들을 크게 휩쓸 었다.
[적의 마법을 이용하여 수많은 마 수를 처치했습니다!]
[‘마력 제어술(S)’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원반격을 저런 크기로?
뒤에서 누군가의 떨린 목소리가 들 려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곧바 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이내 다시 한번 마력이 내 손바닥 앞에 모이더니 새로운 마법진의 형 태가 되었다.
우우우웅!
그것은, 곧 ‘마력의 폭우’의 술식이 되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수많은 마법진이 증식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효과적으로 다수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나는 마력의 폭우에 ‘화염 속성’을 담았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수많은 화염의 비가 지상을 폭격하
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화염의 비에 직격당한 마수들의 비 명이 온 주변을 울렸다.
과연 다수의 적 상대에 특화된 화 염 속성답게 효과는 확실했다.
지상은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마수들은 그 속에서 고통을 호소했다.
뒤에 있던 마법사들은 그 광경을 보며 넋을 잃었다.
“……이게 뭐야.”
“폭우 마법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였다고……?”
그 순간.
끼에에에에엑!
나를 막기 위한 거대한 흑룡의 포 효가 울렸다.
이어서 지상의 히드라가 허공에 불 을 뿜었고, 바실리스크는 아군인 마 수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피해에 재앙급 마 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놈들에게 마력의 폭우는 의미 없 다.
어디까지나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에 특화된 마법이니까.
강한 물리적 힘을 지닌 존재에게는 그에 맞는 강한 물리적 힘이 필요하 다.
나는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어느덧 내 앞으로 다가온 바실리스 크의 발톱이 나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때 놈의 머리 위에 거대한 마법 진이 구현되더니 새하얀 거대한 무 언가가 쿵! 하며 놈을 깔아뭉갰다.
크아아아앙!
바실리스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놈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 가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경계의 대정령인
가?.]
놈을 깔아뭉갠 것은 경계의 대정령 이었다.
바실리스크가 한순간에 제압당하자 이번에는 흑룡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이어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이후 내 몸에서 마력의 기운이 다 시 솟구치며 새로운 마법진이 구현 되었다.
우우우우웅!
이내 지상에서 수많은 나무줄기가 솟아오르며 흑룡의 몸을 묶기 시작 했다.
[……큭! 이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나무 괴물. 나무는 곧 흑룡을 향해 주먹 을 내질렀다.
급속 성장으로 거대해진 그레텔의 풀 스윙이었다.
퍼어어어억!
끼에에에에에엑!
[두 마리의 거대 소환수 소환에 성 공합니다!]
[당신의 마력이 소환술에 적응합니다.]
[소환에 필요한 마력이 크게 감소 합니다!]
«..으 ”
거대 소환수를 둘이나 소환해서 그 런지 몸 안의 마력이 순식간에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
두 재앙급 마수를 제압하는 데 성 공했으니까.
하지만 재앙급 마수는 이 둘이 끝 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히드라가 나를 향해 달려 들기 시작했다.
경계의 대정령도 그레텔의 힘도 빌 릴 수 없는 상황.
나는 히드라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 키며 소리쳤다.
“가라 구미호!”
이내 내 뒤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 작했다.
그리고 강한 빛과 함께 여인은 거 대한 여우로 변신하며 히드라의 목 을 물었다.
히드라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구 미호는 끈질기게 놈의 목을 물며 나 를 노려보았다.
[나를 소환수 취급하지 마一!]
갑작스럽게 거대 생명체들의 3:3
구도가 만들어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상황 이 이해되지 않는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거대 소환수를 셋이나?
—소환협 회장 은퇴해야겠는데.
그때 염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공격해라!”
동시에 모든 인원이 앞으로 달려나 갔다.
'■저는 지금 마수와의 전쟁이 벌어 지고 있는 혹색의 땅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J
뉴스 화면 속에서 앵커가 긴장된 얼굴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앵커의 뒤에는 거대한 마력의 파동 이 퍼져 나오고 있었는데, 잠시 뒤 화면이 전환되었다.
3:3의 거대한 생명체의 싸움.
그리고 남은 2마리의 재앙급 마수 와 지상의 마수 군대를 마법사들과 마인이 상대하고 있었다.
「선봉에 나선 것은 마인의 왕, 김선우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마인 부 대를 이끌어 협회의 지원에 나섰는 데요.j
잠시 뒤 화면 속에서 김선우의 모 습이 잡혔다.
많은 마력을 사용한 듯 식은땀을 홀리며 어딘가 지친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며 거대한 나 무, 토끼, 여우의 모습이 잡혔다.
'"그는 3마리의 거대 소환수를 소 환해 홀로 재앙급 마수의 힘을 억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전황이 협회 측에 유리하게 흘러가는 상황 입니다.」
'"기존에 알려졌던 나무, 토끼 소 환수와 다르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거대 여우 소환수는 김선우가 새 롭게 획득한 소환수로 예상되고 있 습니다.j
한성그룹의 회장실.
한세연은 긴장된 눈으로 뉴스를 지 켜보고 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전장 속.
김선우는 그 안에서 마수 군단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언제나 아기 같던 그레텔은 듬직한 모습으로 홀로 재앙급 마수를 상대 하고 있었고.
장난기 많던 구미호 역시 본모습으 로 돌아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 었다.
한세연은 그 모습을 보며 슬픔을 느꼈다.
그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없 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흑색의 땅 전투 의 결과에 따라 진천우와 협회의 운 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합니다. 협회 와 자운의 악연을 끊을 마지막 순간 이 될 수 있는 만큼 시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 말이 그녀의 머리에 계속해서 울렸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김선우와의 영원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서.
콰아아아앙!
재앙급 마수의 마력이 바닥에 부딪 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지상의 마법사들이 휩쓸 렸고, 사람들은 고통의 비명을 내질 렀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마수의 군단.
마력의 폭우로 마수의 수가 크게 줄었지만, 실시간으로 증식이라도 하듯 놈들의 숫자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재앙급 마수가 자신의 마력을 이용 해 계속해서 사역마를 소환했기 때 문이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를 진행하던 그때.
키.(가。}으I!
가까운 어딘가에서 마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가고일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서준의 등을 노리고 있었
나는 곧바로 마법 구체를 놈을 향 해 속사했다.
콰아아앙!
끼엑!
“야! 조심해!”
“아, 땡큐.”
이서준은 가볍게 감사의 인사를 하 더니 눈앞의 마수를 베어내곤 내게 다가왔다.
“상황이 좋지 않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레텔과 대정령. 그리고 구미호가 각각 재앙급 마수를 하나씩 상대하 며 잠시 기세를 가져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밀리기 시작했다.
소환수에게 공급해야 할 나의 마력 이 서서히 한계를 보이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 증거로 그레텔은 어느덧 나무줄 기를 소환올 멈추고 육탄전만을 벌 이고 있었다.
“......쓰읍.”
상황이 좋지 않다.
어찌어찌 세 마리의 재앙급 마수의 발을 묶었다고 하나 아직 두 마리의 재앙급 마수가 더 남아있다.
진천우와의 결전을 위해 힘을 비축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선뜻 나서 기가 쉽지 않았다.
콰아아앙!
그때 거대한 폭발이 다시 터져 나 오더니 그레텔의 몸이 잠시 기울어 졌다.
재앙급 마수 하나가 그레텔의 뒤를 공격한 것이었다.
동시에 내 몸에서 마나가 다시 한 번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 졌다.
불사의 힘을 가진 그레텔의 회복에 사용된 것이었다.
“……읏.”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민에 빠 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의 정리를 위해 내가 나서 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재앙급 마수들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나무줄기로부터 벗어난 혹룡은 빠 르게 날갯짓하며 하늘 위로 오르더 니 그레텔을 향해 검은 구체를 구현 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거대한 마력.
그렇게 놈의 마법이 방출되려는 그 때——.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마력과 함께 흑룡의 몸
이 폭발했다.
끼에에에엑!
흑룡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 락했다.
그리고 잠시 뒤, 대정령과 구미호 가 상대하던 바실리스크와 히드라의 몸에서도 거대한 폭발이 터졌다.
“……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