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의 말에 따르면 가끔 꾸는 꿈의 세계라고 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역시 단순한 꿈은 아닌 듯했다.
심연이 만든 세계가 반드시 ‘과거’ 를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과거와 깊 은 연관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한참 과거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윤하영이 다가왔다.
“서윤아. 밥 다 차렸는데 정말 안 먹을 거야? 오늘 저녁 안 먹었잖 아.”
윤하영이 한 손에 그릇을 쥔 채 그녀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최서윤은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웃었다.
“네, 별로 식욕이 없어서요.”
“그래도 먹어. 언제 무슨 일이 터 질지 모르는데 든든하게 채워야지.”
그때,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양손에 그릇을 쥔 김선우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려 있던 그릇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밥 위에 고기와 소스를 얹힌 덮밥
이었다.
얼떨결에 그릇을 받은 최서윤은 멍 하니 김선우를 바라봤다.
김선우는 그 시선을 마주하더니 피 식 웃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김선우가 그녀의 옆에 앉고, 뒤를 이어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야야. 같이 먹어.”
“여기 불 따뜻하고 좋네.”
신영준과 유아라였다. 이후 릴리도 와서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
았다.
그렇게 모두가 밥그릇을 쥐고 식사 를 시작했다.
고기와 밥을 한입 삼킨 윤하영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 맛있다.”
“그러게. 고기 진짜 부드럽다. 이서 준은 이 맛있는 걸 못 먹네.”
최서윤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가 자신도 따라 음식을 삼켰다.
동시에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고기가 엄청 나게 부드러웠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임무인 만큼 이 정도의 음식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숟가락이 움직였다.
“고기는 김선우가 구웠어.”
유아라의 말에 최서윤이 옆자리의 김선우를 휙 돌아봤다.
“정말요?”
“어.”
김선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 답하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
“선배님, 잘 먹을게요.”
그러자 김선우가 힐끔 그녀를 보더 니 피식 웃었다.
“그래. 잘 먹어.”
그렇게 음식을 삼키던 유아라가 대 뜸 말했다.
“그래서, 언제 말해줄 거야?”
유아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김선우를 향했다.
숟가락을 집은 김선우의 손이 멈추 고, 유아라가 다시 말했다.
“베르트의 제안에 흔들렸던 이유 말이야.”
잠시 김선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 었다. 그러더니 안심하라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진천우에게 붙 을 일은 없으니까.”
그는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했다.
언제나 이렇다. ‘과거’와 관련된 질 문의 대답은 늘 이런 식이다.
그러자 신영준이 눈을 찌푸렸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누가 보 면 우리가 너 의심하는 줄 알겠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 미안.”
“응‘?”
예상외로 순순히 사과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신영준이었다.
괜히 뻘쭘해진 신영준이 머리를 긁
적였다.
사실 그 역시 김선우에게 ‘발설 제 약’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으니까.
“……아니, 미안할 건 없고. 괜히 무안해지네.”
김선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어. 모 든 일이 끝나면, 그때 전부 이야기 해 줄게.”
“……꼭 이야기해줘야 한다?”
신영준의 말에 김선우가 고개를 끄 덕였다.
“선우야. 그럼 어릴 적 이야기나 해줘.”
이번에는 윤하영이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김선우를 향하 고,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이야기라…… 뭐, 평범했 어. 평범한 가정, 평범한 환경.
김선우가 과거를 추억하듯 천천히 말했다.
그러다 그가 다시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전에 누구한테 이것과 비슷 한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나서.”
“누구인데요?”
최서윤이 묻자 김선우가 생각에 잠 겼다.
“음. 그게…… 아니다. 몰라도 돼.”
김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최서윤은 본능적으로 누군 지 알 것 같았다.
보나 마나 한세연이 분명하다.
잠시 불편한 기분이 느껴졌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묻지 못할 거 같아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순간 김선우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 게 굳었다.
역시 그에게 ‘고향’은 특별한 의미 가 담겨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궁금해.”
유..2”
“그냥,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잘 지내고 있는지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담긴 의미를 그
녀는 깨달았다.
그의 고향은 이 세계에 없다.
회귀 전의 세계 역시 아니며, 자신 이 모르는 제3의 세계일 가능성 역 시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 다.
예리한 그녀의 촉이, 본능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만약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면, 그건 그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는 걸.
……겨우 재회했는데 또다시 이별
해야 된다고?
순간 울컥함에 주제넘고 이기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선배님.”
그녀의 부름에 김선우가 그녀를 바 라봤다.
……하면 안 되는 말. 하지만 그녀 는 이번 한 번만 이기적이기로 했다.
“……고향으로 안 가면 안 돼요?”
그리고, 김선우의 두 눈이 크게 떨 렸다.
이야기의 종착점이 서서히 다가오 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직은 이르니까. 라는 이유로 항 상 미뤄왔던 고민을, 이제는 진지하 게 할 순간이 왔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과거에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 긋한 세계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 아가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부모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 구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땅에 살고 있 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늘 그리웠으 니까.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홀러 버 렸다.
그 긴 세월 간 새롭게 쌓인 정과 추억은, 이제는 내가 감당할 수 없
을 만큼 커져 버렸다.
—……고향으로 안 가면 안 돼요?
지금의 나에겐, 이 세계는 낯선 세 계가 아닌 소중한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 야……
“선우 씨.”
들려오는 목소리에 번득 정신을 차 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한세연의 얼굴
이 내 시야 가득히 들어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했네요.”
♦ « ”
한세연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맞은편 의 자에 앉았다.
이곳은 801의 사무실.
오늘, 그녀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이곳을 찾게 되었다.
“아,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一.”
“사실 알고 있어요.”
그때 한세연이 내 말을 자르고 말했다.
뭔가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자 마치 내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 씨가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말이에요.”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고향 생각했죠?”
“어? 그걸어떻게?”
진짜로 깜짝 놀랐다.
한세연에게 독심술 특성이 있었나?
“척 보면 알죠…… 는 농담이고 사 실 엘린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어 요.”
“아.”
베르트가 내게 제안하던 순간, 엘 린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니까.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한세연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더 니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밝은 미소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씁쓸한 감정 이 조금 느껴졌다.
“전 선우 씨의 선택을 존중해요.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말고, 스스 로 결정해요.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라…….
뼈와 살이 되는 좋은 말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 지 그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제가 진천우 쪽에 붙는 건 아니죠.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내 말에 한세연이 쿡쿡 웃었다.
진짜로 웃겨서 웃는 건 아니고 형 식적인 웃음이었다.
애써 감정을 감추기 위한 그런 만 들어진 웃음.
이내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 다가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선우 씨에게도 긴 휴가가 찾아오겠네요.”
지난 시간 전혀 쉬지 못하고 치열 하게 살아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떻게 쉴지는 정하셨어요?”
고개를 젓자 그녀가 말했다.
“여행은 어때요?”
“……여행이요?”
“네. 세계 일주라던가. 낭만 있잖아 요?”
나는 피식 웃었다.
“세계 일주라…… 그거 괜찮네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