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영의 말에 최서윤이 수상하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자 뒤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릴리가 다가오더니 눈을 가늘게 떴 다.
“가만있어 봐. 그러고 보니 너 어 제 김선우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
“……선우? 너 어제 선우 만났어?” 윤하영의 두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 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최서윤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 수상한 모습에 윤하영이 눈을 찌푸렸다.
“뭔데? 너 설마…… 선우랑 외박한 건 아니지?”
“김선우랑 외박했다고?”
“ 진짜?”
흥미를 느꼈는지 이서준과 유아라 가 다가왔다.
사태가 커지려 하자 최서윤은 빠르 게 부정했다.
“아니에요. 한세연 님 집에서 외박 했어요.”
“한세연이라면 한성가의?”
“네.”
최서윤은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눈을 떠보니 한세연의 집이었고, 그곳에서 그녀가 차려준 아침 식사 를 한 것…….
워낙 정신없던 상황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한 건 그녀의 요 리가 상당히 맛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선배님에게도 몇 번 요리를 대접했는데 항상 맛있 게 먹었었다고…….
“어쩌다 거기서 외박하게 된 건 데?”
“아, 그건……
그때 특무팀의 리더, 김덕현이 다 가오더니 모두를 둘러봤다.
“이제 모두 온 건가?”
“넵. 이제 진행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제는 신인 티를 벗어난 3년 차 요원, 신영준이 손을 번쩍들며 대답 했다.
김덕현은 작게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어젯밤 전 세계 에서 동시다발적인 폭동이 일어났 다.”
김덕현의 손짓에 홀로그램 영상 하 나가 떠올랐다.
불타오르는 도시.
그 앞에선 정체를 숨기려는 듯 검 은 후드를 뒤집어쓴 수많은 사람의 행렬이 보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과거 18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바로 진천우의 영향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갈 때였지.”
최근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젊 은 층이 다수가 된 특무 요원들에게 는 낯선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 자들을 ‘추종자’라 부 른다. 진천우를 신처럼 모시는 광신 도이며, 자운과 크게 다르지 않은 테러리스트지. 진천우가 세계 최악 의 마법사라 불리게 된 이유 역시 이들이 한몫하기도 했고.”
그때 릴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사람들은 왜 진천우를 신처럼 모시나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겠군. 추종자들은 진 천우를 신으로 모시는 게 아니다. 진천우가 훗날 신이 될 것이라 믿는 자들이지. 언젠간 진천우에게 구원 받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야.”
그 말에 유아라가 멍하니 중얼거렸 다.
“……새롭게 탄생할 신을 미리 믿 어서 수혜라도 받겠다는 건가?”
“나름 합리적인데?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신을 믿는 것보다 진천우를
믿는 게 승산이 높잖아.”
릴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김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추종자들의 수는 앞으로 계속 늘 어날 것이다. 세계에는 큰 혼란이 닥칠 것이고, 그 혼란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에 반드시 제압 해야 한다.”
김덕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로 빠른 진압과 진천우 의 토벌을 위해 임시로 외부 세력과 협력하기로 결정됐다.”
“……외부 세력? 누구지?”
“설마. 그 사람 아니야?”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있었던 사건을 통해 어느 정 도 예측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김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예상했듯 8()1이 임 무에 합류하게 됐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모두가 순식간에 수긍했다.
8()1의 리더, 김선우가 자운과 깊은 악연을 지니고 있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801 외에 하나의 세력이
더 합류하게 될 거다. 반발이 심할 수 있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회장님의 명이니 따르도록 한다.”
이어지는 김덕현의 말에 모두가 고 개를 갸웃했다.
“……음? 대체 누구길래?”
“어느 세력인데요?”
쏟아지는 질문에 김덕현은 잠시 생 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바로 마인회다.”
순간 협회 내부에 짙은 침묵이 감 돌았다.
이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으니까.
“마, 마인…… 뭐요?”
[선배님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해요..
(울먹이는 강아지 이모티콘)]
8()1의 아지트에서 한세연에게 받 은 서류를 보고 있는데 최서윤에게 웬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어제 일의 사과가 담긴 내용이었
순간 어제의 일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앞으로 술 은 자제하자.]
그렇게 답장을 보내자 이번에는 다 른 메시지가 왔다.
[서윤 씨는 잘 돌려보냈어요.]
한세연에게 온 메시지였다.
어쩔 수 없이 최서윤을 그녀의 집 에 재웠는데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한 거 같아서 미안한 기분이 든다.
술에 취한 사람을 대뜸 자기 집에 재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만약 나였으면 바로 쫓아냈을 텐데 말이지.
[매번 도움만 받네요. 꼭 보답하겠 습니다.]
그렇게 답장을 보내자 근처에서 어
둠이 피어오르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시여.”
선화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 를 끄덕였다.
“하령에게 왕의 계획을 모두 전달 했습니다. 내부 반발이 있긴 하지만, 계획에는 큰 차질이 없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선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게 잘하는 일인지 모 르겠네.”
“협회의 일에 마인을 투입 시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인간과 마인은 숙적의 관계이다.
그 관계를 되돌리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났고, 마인은 인간에 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죄를 저질렀 다.
이 둘은 동등한 관계가 아닌, 가해 자와 피해자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런 인과를 무시하고 억지로 그
둘을 섞으려 한 건 아닐지 그런 걱 정이 들었다.
“왕의 지혜로 일족이 인간의 피를 자체적으로 수급할 수 있게 된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 종족의 분쟁은 피할 수 없겠지만 흡 혈 욕구로 인한 사고는 터지지 않을 겁니다.”
“네 말대로 사고만 안 터지면 다행 이긴 한데. 괜히 이 일로 잠잠해졌 던 갈등이 커지는 건 아닐까 싶어 서.”
선화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혹시 왕께서는 인간과 마인이 교류하는 미래를 만들고 싶은 겁니 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나도 내 주제를 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외부자’인 내가, 어떤 방법으로 그 둘을 교류 하게 만든단 말인가.
나는 성인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 니다.
그런 주제넘은 짓은 할 능력도, 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인간과 마인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인간만 일방 적으로 맞은 피해자에 가깝다.
“그건 너희가 풀어야 하는 숙제지. 내가 나설 문제가 아니야.”
선화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건 저희의 숙제죠. 왕은 이 일의 외부인이니까요.”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 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할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일족 중 한 명이 자운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 말은?”
“네, 왕의 말씀대로 자운이 일족의 주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선화와 함께 달의 섬 근처에 세워진 새로운 마인의 은신처로 이 동했다.
섬에 도착하자 익숙한 기운이 풍겨 왔다. 짙은 마기.
인간 시절에는 이 기운이 불쾌했지 만, 왕의 권능을 얻고 난 뒤에는 친 숙하게 느껴진다.
“……여기로.”
선화는 나를 안내했다.
은신처를 이주한 지 그렇게 오래되 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치 오래전에 지어진 성처럼 거대한 크 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단하네. 이걸 몇 년 만에 짓는 게 가능한 건가?”
거대한 성을 올려보며 중얼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새롭게 지은 성이 아닙니다. 과거 에 지어졌던 성을 다시 사용하게 된 겁니다.”
“……。}. 왠지.”
아무리 과학과 마법 기술이 발달한 세계라 해도 이 거대한 성을 순식간 에 만들어낼 순 없겠지.
“참고로 이 성은 초대 왕이 집권하 기 전부터 세워졌던 성입니다.”
“그래?”
내 기억에 의하면 초대 왕은 최소
300년 이상 살아온 자.
그렇다는 건 이 성이 지어진 건 상당히 오래전 일이라는 거다.
그러다 문득 갑작스러운 의문이 생 겼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초대 왕이 생기기 전에는 왕이 없었어?”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초 대 왕께서는 꽤 오래전부터 왕의 권 능을 지니고 계셨고, 자신을 드러낸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의 권능을 가졌음에도 자신을 숨겨왔다는 거야?”
“네 맞습니다. 아마 그분이 가지신
예언 능력의 힘 때문에 조심스러웠 던 것 같습니다.”
“흐음.”
어느덧 우리는 성의 중심에 들어갔 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주변의 마인들이 선화를 알아보고는 내게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끼이이 익.
거대한 문이 열리고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선화?”
이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후드를
벗었다.
“오랜만이야. 하령.”
“……왕이시여.”
하령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
다.
“왕을 뵙습니다.”
“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
내 스타일 알잖아.”
그제서야 하령은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내 얼굴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말로 살 아계셨군요.”
“어, 그렇게 됐네.”
나는 왕의 방을 둘러보았다. 화려 한 금빛으로 가득한 호화로운 공간 이었다.
마인의 은신처는 예로부터 짙은 어 둠이 드리운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 장소만큼은 밝았다.
아마 나에게 맞춘 거겠지.
힐끔 왕좌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황금의 의자.
하령이 앉으라는 눈치를 줬지만 부 담스러워서 앉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운의 흔적을 찾았다 고?”
“네 맞습니다.”
하령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왕께서 미리 언질을 주신 덕에 놈 들의 습격으로부터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자운은 진천우에게 걸린 고대 주술
을 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놈들을 찾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고.
물론 놈들도 내 계획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테니 쉽게 걸려들진 않겠 지만.
“받으시죠.”
하령이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새하얀 술식이 그려진 검은 구체였 다.
[죽은 자의 원념(유물)]
“이건?”
“추적용 신비입니다. 이것과 같은 유물을 소지한 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그들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오.”
제법 재밌는 물건을 구해왔다.
신기함을 느끼는 중 하령이 말했다.
“고대 마인의 주술을 알고 있는 일 족들에게 이 유물을 심었습니다. 만 약 그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바 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여름이 지 나 가을이 다가오는 무렵.
마법사 협회는 최근 가장 큰 골칫 거리였던 ‘진천우의 추종자’의 근거 지 중 하나를 찾아냈다.
‘진천우의 추종자’ 세력 중 가장 거대한 규모로 추정되는 중국 지부 였다.
협회는 곧바로 20명의 특무팀을 포함한 토벌팀을 꾸렸으며 오늘, 놈
들의 토벌을 위해 중국 평야에 모이 게 되었다.
“……대단하네. 2달 만에 이런 요 새를 만들어 낸 건가?”
유아라가 드론으로 촬영한 보며 감 탄하듯 중얼거렸다.
거대한 탑을 보는 듯한 철제 구조 물.
외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설치된 수많은 마공학 시설들과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벽이 보였 다.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추종자들이 모여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 힘든 거
대한 규모였다.
“추종자들이 자운과 접촉했다는 소 문이 사실인가 봐요. 저런 요새를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자본이 필요할 테니까요.”
최서윤이 말했다. 그러자 이서준이 대답했다.
“몇몇 대형 길드가 진천우에게 붙 었다는 소문도 있긴 하던데. 거기서 지원해준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요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 던 그때.
“추종자들이 자운과 접촉한 건 사 실이다. 저 요새 역시 자운의 지원
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 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특무팀의 리더, 김덕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요새를 제작하는데 자운이 개 입한 만큼 어쩌면 진천우의 행방을 찾을 단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 다.”
정보팀의 말에 의하면 요새를 중심 으로 수상한 마력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그 말은 저 요새에 협회에서 아직 밝혀내지 못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번 작전을 성공 시켜야 한다. 그러니 모두 긴장을 유지하도록.”
“넵!”
모두의 힘찬 대답이 들려오고, 요 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근데 팀장님. 정말로 저놈들이랑 같이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겁니 까?”
요원이 힐끔 옆으로 시선을 돌렸 다. 그의 시선 끝에는 20명의 마인 이 모여 있었다.
“저놈들. 작전 중에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잖아요.”
“홍. 그건 우리가 할 말이다. 인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