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일 수도 있긴 하지.
한세연에게 부탁한 일이 있기도 하 고.
“그럼 잠깐만.”
나는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일정 끝나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소수 일족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찾아서요. 직접 전해드리고 싶어요.]
……정보를 찾았다고?
나도 모르게 굳어진 표정올 보았는 지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그녀가 걱정된 말투로 물었다. 나 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으음.”
내 반응이 수상했었는지 그녀가 물 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동료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고 만나자고 하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런 걸 이해 못 할 사람도 아니고.
그러자 최서윤이 눈을 깜빡였다.
“……중요한 정보요? 누군데요?”
그 물음에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 했다.
“한세연.”
순간 그녀가 표정이 멍해졌다. 하 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술 마시고 같이 가면 되겠네 요.”
“선배님은…… 진짜 아무것도 몰라 요…… 내가 진짜 얼마나…… 하 아.”
최서윤과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약 1시간 30분이 흐른 시점.
한잔 한잔이 그녀의 목구멍을 넘어 갈 때마다 그녀의 혀가 조금씩 꼬이 기 시작했다.
눈은 진작에 풀렸고 언제나 착실한 그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진 상
태다.
그녀는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르 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 거 같아요. 선배님이 술을 마시는 이유…… 처음엔 좀 썼 는데, 계속 마시니 달아. 헤헤……
그렇게 술을 들이켜려는 그녀의 잔 을 황급히 빼앗았다.
“야야. 너 그만 마셔.”
“왜요……? 저 아직 더 마실 수 있는데……
최서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 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향해 빙긋 웃더니 양 손바닥으로 자
신의 뺨을 감쌌다.
“꽃받침〜”
“……얘 맛이 갔네.”
세잔 네잔 마실 때만 해도 멀쩡한 가 싶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 자기 훅 가버렸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굉장히 당혹스럽다.
“여기 술집 아니고 레스토랑이야. 민폐라고.”
“아닌데요……? 여기 레스토랑 느 낌의 술집인데요……?”
“뭔 소리야. 레스토랑인……
그때 내 시선 끝에 가게의 이름이 보였다.
레스토랑 브}.
……진짜 술집이었네.
잠시 할 말을 잃자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근데 선배님. 한세연 님이랑 무슨 관계예요……?”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발음은 여전히 뭉개진 상태지만.
“동료지. 그건 왜.”
“……아뇨. SNS 에서 사이좋다고
자꾸 티 내길래. 다른 특별한 무언 가가 있나 했죠.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렇고.”
최서윤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말 을 이었다.
“그런데 속 보인다. 오늘 나랑 약 속 있는 거 알면서.”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최서윤은 그렇게 말하며 물 한 모 금을 더 마셨다.
이후 몇 분의 대화를 더 이어나가 다가 더 이상 안 될 것 같아 계산 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붉었던 저녁 하늘은 어느덧 시꺼멓 게 물들어 있었다.
시원한 밤공기를 쐬자 기분 좋게 만들던 술기운이 조금은 달아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반대로 최서윤의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숨을 푹푹 내쉬더니 소심하게 내 옷깃을 잡았다.
“너 괜찮아?”
“갑자기 어지러워서 그래요. 조금 만……
괜히 걱정돼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
아까만 해도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 이 지금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술병 났나 보네.”
자신의 주량도 모르고 막 마셨으니 예정된 결과다.
처음 술을 마셔본 성인이라면 누구 나 겪는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혼돈마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최서윤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꿈 을 꾸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민폐 끼쳐서……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졌
정신을 차리기 힘든지 이제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녀에게 등을 내줬다.
“업혀.”
“……아뇨. 조금만 더.”
“여기서 잠들게?”
그제서야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내 등에 업혔다.
“..죄송해요. 다시는 술 안 마실
게요.”
“됐어. 신경 쓰지 마.”
나는 그녀를 등에 업은 채 밤길을
걸었다.
그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었 고, 나는 약속대로 한세연의 오피스 텔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어디 사는지도 모르기도 하고, 이럴 거면 근처에 사는 한세연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길을 걷자 길 건너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한세 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 투를 앞둔 사람처럼 심상치 않은 기 운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등에 업혀 잠든 최서윤을 발견하더니 그 기운 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최서윤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떡 이 된 거예요? 선우 씨가 잘 조절 했어야죠.”
한세연이 나를 혼내듯 말했다.
“그리 많이 마신 건 아니에요. 은 이슬 일곱 잔 정도?”
“……일곱 잔이면 한 병이잖아요. 그 정도면 많이 마신 거죠.”
하긴, 그 말도 맞긴 하다. 한세연 과 내 기준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한세연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 쉬더니 뒤의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한세연의 오피스텔에 도착한 나는 최서윤을 침대에 눕혔다.
정신 못 차리는 그녀를 바라보자 한세연이 말했다.
“나머지는 제게 맡기고 거실에 계
세요.”
“......아, 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거실로 나왔 다.
얼마 안 가 한세연도 방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 지만 꽤나 힘을 썼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그녀가 내 옆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내 그녀 가 어색함을 깨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꿀물이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 가 생각 난 듯 몇 가지 서류를 찾 아 내밀었다.
“부탁하셨던 소수 일족의 정보가 담긴 서류에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곧바로 내응을 살폈다.
언제나 그렇듯 알아보기 쉽게 소수 일족 명단과 능력이 잘 정리되어 있 었다.
“소수 일족들이 워낙 폐쇄적이라서 25개의 일족의 능력을 전부 찾진
못했어요. 서류상에는 몇백 년 전에 멸족됐다고 알려진 일족도 있었거든 요. 물론 조용히 숨어 지낸 거지만 요.”
“괜찮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도 움이 돼요.”
서류에 담긴 소수 일족의 능력은 총 20개였다.
잘 알고 있는 룬의 일족부터 시작 해서 패호 일족의 능력도 보였다.
그렇게 쭉 둘러보는데 예상외로 ‘달의 일족’의 능력은 보이지 않았 다.
아마 밝혀내지 못한 5개의 일족
중 하나에 속한 모양이다.
뭐, 달의 일족의 능력인 [달의 가 히는 일반적인 소수 일족의 능력과 는 다르게 티가 잘 안 나기 때문에 이해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게 소수 일족의 능력인지는 몰랐으니까.
“속성 관련 능력이 많네요.”
“네. 속성 능력만 최소 8가지에 요.”
용암, 나무, 연기, 철…… 등등. 종 류가 많다.
그렇다고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 진 않는다.
가장 대중적인 속성인 불, 전기, 얼음, 빛이 그렇듯. 각 속성에는 장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천우의 주특기는 강화계.
발현계 마법사보다 속성 의존도가 떨어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흐음.”
나는 진천우와의 전투에서 위협적 일 만한 능력들부터 살폈다.
그리고 순간 놀라움을 느꼈다.
“중력 마법에 환술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특이한 능력이
몇 보였다.
나와 싸울 때는 왜 사용하지 않았 나 의문이 들 정도로.
예를 들면 술식안(術式眼).
술식을 담은 눈을 뜻하는 것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이미 발동했는데 눈치를 못 챈 건가.”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진천우가 이상할 정도로 회피 능력이 뛰어나 긴 했었다. 이미 발동된 상태였을 지도 모르겠네.
“......흐음.”
나는 서류를 살피며 나에게 위협될 만한 능력을 몇 가지 간추렸다.
속박, 중력, 환술, 술식안, 방벽, 무 효, 소환술, 봉인술, 육체 강화, 신 비 강화 정도일까.
최대한 줄여봤는데도 10가지가 넘 긴 하네.
문제는 나머지 5개. 아니, 4개의 능력이 뭐냐는 건데.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어요.”
남은 소수 일족의 능력은 외부자의 혜택을 뒤져서 추리해보던가, 아니 면 피코를 통해 알아내면 되겠지.
그때 한세연이 말했다.
“전해줄 게 더 있어요. 사실 이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 였거든요.”
요..2”
“소수 일족과 관련된 고대 설화에 요.”
그녀는 또 다른 서류를 내게 넘겼 다.
그녀의 말대로 서류 안에는 복잡한 술식 연구 기록과 함께 고대 설화가 담겨 있었다.
아니, 설화라기보다는 고대 신화라
고 해야 할까…….
이 신화는 ‘신비’와 관련된 신화였 다.
“소수 일족이, 신비와 형제다. 이런 내용이네요.”
“정확히는 소수 일족의 뿌리는 신 비와 같다는 내용이에요.”
소수 일족이 가진 신비의 친화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하여 진천우는 김창현 이라는 실험체를 만들어내 다른 시 간대의 차원으로 보낸 것이었고.
나는 다음 내용을 살폈다.
뒤에는 이야기가 아닌, 복잡한 술 식으로 만들어진 정보였다.
동시에 외부자의 혜택이 발동되며 수많은 정보가 내 머리에 스며들었다.
“……읏.”
“ 괜찮아요?”
한세연이 내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인식했다.
“……불사를 너머 신이 되기 위한 조건.”
“네‘?”
나는 한세연이 준비한 서류를 더 살폈다.
이 술식의 출처들은 과거 협회에서 김창현의 실험을 진행했던 ‘선현 가 문’으로부터 얻어낸 정보들이었다.
“모든 소수 일족의 피를 합쳐서 이 룰 수 있는 건 다른 차원의 이동뿐 만이 아니에요.”
진천우의 또 다른 숨겨진 목적.
오래전부터 신이 되기 위해 갈망한 그의 노력.
불완전한 인간을 벗어나 완전한 인 간이 될 방법.
“소수 일족의 피는 불사와 함께 신 이 되기 위한 재료였어요.”
이 정보에 따르면 진천우는 이미 반쯤 신이 되기 위한 조건을 달성했다.
만약 그가 이서준의 육신을 빼앗게 되면 그는 ‘불사’가 아닌 곧바로 ‘신’의 권능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정보에 당황하 던 그때.
우우웅!
스마트 폰에서 비상 알람이 떠올랐 다.
나는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안전 안내]
[20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폭동 발생. 안전에 유의하세요.]
짧은 경고 메시지. 그 밑에는 사진 이 하나 걸려있었다.
불타는 건물과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벽에는 붉은 피로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신이 돌아왔다.’
……자운이 저지른 짓이 아니다.
전 세계에 홑어져 있던 진천우의 추종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창가를 통해 스며들어오는 아침 바 람을 느끼며 최서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느껴지는 두통과 어지러움.
최서윤은 눈을 찌푸리며 관자놀이 에 손을 짚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지막 기억이 술을 마시고 선배님 과 함께 밖으로 나온 거였는데.
그 뒤로…….
“……기억이 안 나.”
최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낯선 방 안.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야?”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낯선 방에 서 깨어난다니. 지금까지 살면서 이 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 의 드라마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놨다.
다행히 양말이 벗겨진 것 말고는 어제와는 큰 차이가 없다.
침대 옆을 돌아봐도 마찬가지.
다른 특별한 누군가(?)가 옆에 잠
들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최서윤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을 느끼다가 당시 자신이 취해서 저지 른 만행들을 떠올렸다.
술의 마력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져 그에게 보여주지 못 할 짓들을 저질 렀다.
온갖 귀척, 애교부터 시작해서 질 질 끌려다니며 한 행동들…….
“질렸겠지……?”
그녀는 손바닥 위로 뾰족한 얼음의 송곳을 만들어냈다.
“……이대로 죽을까.”
아니다. 죽긴 죽더라도 최소한 내 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파악해 야 한다.
여긴 어디일까.
처음 보는 방이었다. 넓은 창가에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이 상당한 고급 아파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선배님의 집에서 외박한 건가?”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을 때 이게 가능성이 가장 높기는 하다.
……이건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사과는 꼭 해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왔다.
문으로 걸어가자 도마 위로 칼질하 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뭐야…….
설마 날 위해서?
최서윤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선배님?”
문 너머에서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소리가 멈추고는
그가 뒤를 돌았다.
“일어났어요? 몸은 어때요?”
순간 최서윤의 동공이 크게 떨렸 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으니까.
“……한세연님?”
그 정체는 한성가의 주인, 한세연 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다가 어 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한세연은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어제 선우 씨가 서 윤 씨 덕에 고생 많이 한 거.”
“최서윤. 너 뭐 하다가 이제 와?”
토요일 오전.
갑작스러운 특무팀의 호출로 최서 윤은 바쁜 발걸음으로 협회로 출근 했다.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 그녀는 억울함을 느꼈다. 오늘은 그녀의 휴 일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아냐. 너 원래 오늘 쉬는 날
이잖아. 출근한 것만으로도 잘한 거 지.”
요원 중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윤하영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살폈다.
“서윤아. 너 어제랑 옷차림이 같은 거 같은데. 설마 외박했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