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같이 있었네.”
“방금 만났어.”
“그래? 아 참. 주변을 둘러봤는데 딱히 수상한 건 발견하지 못했어.”
“흐음.”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이서준은 내 심 아쉬움을 느꼈다.
열차 내부 어딘가에 분명 자운이 숨어들었을 텐데 아직 그 어떠한 단 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유령’이 생각났다.
그의 정체가 내가 생각하는 ‘그’가 맞다면, 자운의 정체를 이미 파악했 을지도 모를 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서준은 빠르 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유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지금 특별 칸에 남은 8()1의 멤버 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바로 오늘 처음 모습을 공개한 8()1의 숨겨진 여성 멤버였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건 이서준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의 유아라 역시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때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듯 그 녀의 시선이 유아라를 향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고, 유아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 사람. 왠지 우리가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
창밖이 어두워진 밤.
첫날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머리 칸의 숙소로 돌아온 나는 동료들에 게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열차에 숨은 자운을 찾아냈으며 c 클래스 41호 방에 투숙해 있다는 것을.
하루 만에 밝혀진 사실에 모두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두가 빠르 게 냉정을 되찾곤 자운의 말살 계획 올 위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부터 더 힘든 일정이 있을 테니 푹 쉬어 둬.”
내일은 해상열차의 가장 큰 위험 요소라 할 수 있는 ‘마력 폭풍’과 재앙급 마수 ‘크라켄’이 모습을 드 러낼 가능성이 높다.
“마력 폭풍은 그렇다 쳐도 크라켄 은 조금 걱정되긴 하네.”
크라켄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바다 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마수.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그게 걱정되는 반응이 다.
“겁먹을 필요 없다. 덩치 좀 큰 문 어일 뿐이니. 열차 내의 모두가 힘 을 합하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하.”
다만 같은 재앙급 출신(?)인 구미 호는 자신감에 찬 반응을 보였다.
어찌 됐든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취침을 준비했다.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커튼을 쳤으며 이후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잘자.”
“너희도 잘 자거라.”
“거기 누군지 모르는 두 분도 잘 주무세요. 아, 그리고 대장님도.”
나 역시 커튼을 치고는 가면을 벗 었다.
방의 불이 꺼지자 짙은 어둠이 드 티웠다.
나는 멍하니 창밖으로 보이는 검은 바다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직 큰 변화는 없지만 파도의 힘 이 미세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죽음의 섬 주변에 드리운 ‘마력 폭 풍’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죽음의 섬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하루에서 이틀 정도.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 자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가장 큰 것은 역시 자운에게 엿들 었던 대화였다.
그들은 스카를 죽인 범인이 열차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 었다.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 인지 그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일지인가.”
풀어준 자운의 요원이 가져오는 정
보를 통해 그들이 네 번째 일지를 습득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미래의 예언이 적혀 있을 것 으로 예상되기는 하는데.
……설마 내가 스카를 죽일 것도 일지에 적혀 있던 건가?
그게 가능해?
……아니, 불가능할 건 없지.
자운이 네 번째 일지를 찾는 조건 은 예언의 신비로 미래를 볼 수 없 는 때.
전제부터가 나와 관련이 있었다.
“……골치 아파졌네.”
이 일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 겠다.
계획에 허점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 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몸의 피로로 서서히 눈이 감기려던 그때.
쿠우웅!
갑작스러운 강한 충격과 함께 기차 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엘린의 놀란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
나는 곧바로 가면을 쓰고 커튼을 열었다.
이미 모두가 충격에 놀라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잠시 후 천장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외부에 강한 충격이 발생했습니다. 승객분들은 침착하게 안내를 기 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쿵!
다시 한번 강한 충격이 터져 나왔 다.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이었다.
이후 빠르게 달리던 기차가 움직임 을 멈추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에 어인 형태의 몬스터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강렬한 파도 사이로 수많은 어인이 기차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어인 보병.
크라켄의 수하로 ‘바다 해적’이라
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몬스터였다.
[상황실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외부 충격으로 엔진실에 몬스터가 난입했습니다. 잠시 운행을 중단하 겠습니다.]
“……몬스터가 난입했다고? 아니, 열차 엄청 단단하다며?”
엘린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력 폭풍을 견딜 수 있다는 거지 몬스터의 공격에 자유로운 건 아니 야.”
원작에서도 크라켄을 만나기 전 이 런 식으로 몬스터 군단의 공격에 충 격을 받는 상황이 나오기는 했었으 니까.
그런데 시기가 내 예상보다 빨.랐 다.
쿠우웅!
다시 한번 열차에 큰 충격이 이어 지고 동료들이 균형을 잃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뭔가 상황이 좋지 않다.
“가자.”
*
우리는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3대 길드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듯 표정이 어두웠다.
“외부에서 접근하는 몬스터는 우리 황금 사자와 로렌 길드가 진압하겠 네.”
황금 사자의 마스터 백우종이 거대 한 대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C와 B 클래스 쪽 엔진실은 801 이 맡아주게.”
“알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빠르게 엔진실로 이동 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A클래스의 지하 실이었다.
벽에는 충격으로 생겨난 구멍이 있 었는데 그 사이에서 물과 함께 어인 몬스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사슬을 구현하여 놈들 의 머리를 터트렸다.
“……해적들 수가 계속 늘어나는데 요? 구멍은 어떻게 해요?”
한지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수만 빠르게 줄이면 어떻게든 해 결될 거야.”
저 정도의 구멍은 열차가 가진 신 비로 금방 고칠 수 있다.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어느덧 S클래스와 A클래스의 마법 사들도 엔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는 윤하영과 최서윤, 유 아라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를 향하 고 나 역시 그들을 바라보던 때였 다.
크어어어!
몬스터 하나가 빠르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침착하게 사슬로 놈의 머리를 터트 리려 하는 순간, 강한 빛이 번쩍이 더니 녀석의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갔 다.
그 앞에는 ‘백천’을 쥔 이서준이 서 있었다.
작년 위저드 게임에서 보았던 이서 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움직임이 었다.
아무래도 ‘백천’의 효과로 한층 강 해진 거 같긴 한데 직접 눈으로 위 력을 보자 더욱 살벌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모두에게 말했다.
“어려우시겠지만 마력에 제한을 두 고 전투하셔야 합니다. 마법에 의해 더 큰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체급 높은 마법을 사용하다가 는 열차에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그럼 여긴 맡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B클래스의 엔진실을 향해 달려갔다.
* * ♦
이서준은 어인 몬스터를 향해 백천 을 휘둘렀다.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 음이지만 단순히 휘두르는 것만으로 도 이전과 다른 힘이 느껴졌다.
“……이게 SS 등급의 검인가?”
이서준은 전율을 느꼈다.
단순히 검을 쥔 것만으로도 신체
능력이 크게 상승하고, 마력 능력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 정도면 평상시보다 두 배 강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무기에 의존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기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서준은 ‘유령’이 떠난 복도를 바 라보다가 백천을 꽉 쥐었다.
백천.
신철공방에서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주는 검이라고 했지만, 그건 아마도 어설픈 핑계일 것이다.
아마 이건 나를 위해 준비한 ‘그
녀석’의 선물이겠지.
“……진짜 모르겠네.”
어째서 이 정도까지 나를 돕고 있 는 걸까.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개인의 목적, 복수 외에도 자신을 향한 알 수 없는 호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부터 보이던 신뢰의 이유
“……역시 회귀인가.”
이서준의 중얼거림에 다급하게 전 투하던 최서윤이 그에게 시선을 돌
렸다.
“네?”
이서준은 대답 대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어인 몬스터를 검으로 베 었다.
끄어어어
몬스터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놈 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애의 회귀 전엔 우린 어떤 사이였을 까 하는 생각.”
최서윤과 윤하영은 입을 다물었다.
……세계의 법칙.
그리고 신비의 말에 따르면 김선우 는 회귀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건 회귀 전 김선우와 자 신들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었을 터.
순간 최서윤과 윤하영의 표정이 슬 픔에 잠겼다.
만약 자신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 더라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조차 쉽 지 않았으니까.
그 반응을 본 이서준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전 투에 집중하자.”
“......네!”
이서준은 엔진실에 난입한 몬스터 들을 빠르게 처치했다.
몬스터는 계속해서 난입했지만 시 간이 흐를수록 그 수도 서서히 줄어 들었다.
그렇게 전투에 집중하던 그때, 엔 진실의 구석 끝에 의문의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
출항 축하식 때 유아라와 부딪혔던 남성이었다.
그리고, 몬스터 하나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서준은 순간 당황했다. 후드의 남성이 일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그때.
끄아악!
어인 몬스터가 순식간에 마법에 찢 기며 사라졌다.
놀라울 만큼 깔끔한 마무리였다.
“……뭐야 마법사였나?”
이내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서준은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바 라보며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함을 느꼈다.
끄아아악!
해상열차 C클래스 엔진실에서 어 인의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슬에 숨통이 끊긴 어인 몬스터는 바닥에 푸른 피를 적셨고, 나는 그 상황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남은 적의 수를 빠르게 파악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어인 습격도 열 차 내부 마법사들의 활약으로 빠르 게 진압되고 있었다.
용병단으로 위장한 자운까지 간간 이 토벌을 도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거의 마무리 된 거 같네.”
엘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남은 어인은 셋.
참고로 맨 뒤에 선 덩치 큰 녀석 이 어인의 행동대장이다.
“대장은 내가 맡을게. 나머지는 너 희가 맡아.”
“오케이.”
마무리 전투를 위해 각자 흩어지
고, 나는 행동대장을 향해 걸어갔다.
놈의 외형 자체는 기존 어인 몬스 터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착용한 장비에서 차이가 있다.
눈부신 황금빛의 갑주. 그리고 기 다란 황금 창.
외형부터 나 특별하다.라고 주장하 고 있다 해야 하나.
그때, 놈이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 었다.
—크륵, ……네가 주인님께서 말한, 그 인간이군.
«..2”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놈은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네 주인이라면 크라켄을 말하는 건가?”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 히 나를 바라볼 뿐.
무언의 긍정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놈의 말을 해석하자면 크라켄이 내 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니까.
“……습격 타이밍이 왜 빨라졌나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나.”
뭐, 크루아스 때 한 번 겪었던 만 큼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놈■이 나를 노리는 과정에서 내 예상과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든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녀석 이 창을 세우고는 나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크아앗!
과연 행동대장답게 기존 어인들과 는 움직임이 차원이 달랐다.
간단하게 피하긴 힘들 것 같아 [순 간 가속]을 발동했다.
후웅!
놈의 창끝이 내 허리를 아슬아슬하 게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슬을 이용해 녀석의 몸통을 속박했다.
_큭!
사슬은 몸통을 넘어 뱀처럼 녀석의 목을 빠르게 둘렀다.
....크륵!
몸이 한순간에 속박되자 녀석은 움 직임을 멈추었다.
“크라켄이 나에 대해 무엇을 말했 지?”
녀석의 목을 두른 사슬에 힘을 주 자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후 놈이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크륵, 크흐흐, 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
놈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니다
이후 놈의 몸에서 푸른 거품이 피 어오르더니 그대로 눈을 뒤집히며 자결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크라켄이 노리는 게 내가 아니 라고?
그렇다면 누구지?
크루아스도 노렸던 이서준인가?
그렇게 잠시 의문에 빠져있던 그 때, 상황정리가 끝난 듯 엘린이 내 게 다가왔다.
“이쪽은 전부 정리됐어. 다른 쪽도 다 마무리된 모양이야.”
“수고했어.”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구미호가 내 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다.”
가면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지 만,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비록 본래의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녀의 본질은 재앙급 마수.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나는 심각함을 느꼈다.
“무슨 일인데?”
“이 열차. 그리고 죽음의 섬을 중 심으로 세계의 운명이 모이고 있 다.”
“.”…운명?”
“내 힘이 약화되어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커 다란 일이 벌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