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9화 (458/535)

—선배님

나는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담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남성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이 선 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작게 미 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터질듯

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여유로운 모습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 다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는 것을.

—너한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뿐 이야. 그리고…….

읏!”

번뜩 눈을 뜨며 최서윤은 잠에서

깨어났다.

흐려진 눈앞에 얼어붙은 천장이 보 이고 동시에 쌀쌀한 추위가 느껴졌 다.

손등으로 눈가를 홈치자 촉촉한 눈 물이 묻어나왔다.

또 그 꿈이다.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도 그날의 기억이 뇌리에 박혀 지금 까지 자신을 괴롭힌다.

최서윤은 입술을 깨물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풍경이 눈 에 들어왔다.

얼어붙은 동굴과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보온 랜턴.

그리고 침낭 안에 웅크린 채 잠든 동료들…….

이곳은 남극 지하에 발견된 초대형 유적지였다.

“일어났어?”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이서준이 천천 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왔어. 슬 슬 한계인 거 같아서 쉴만한 공간이 없나 찾아보려고.”

초대형 유적지 탐사를 시작한 지 벌써 4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탐사에 준비되 어 있던 식량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 고 있었고, 체력적으로 모두가 지쳐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까지 긍정적으로 탐사를 하던 최서윤도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 었다.

“그래도 슬슬 끝이 다가오는 거 같

아요. 일반 몬스터의 수도 점점 줄 어들고 있고.”

“그렇기는 하지.”

유적지는 특성상 끝에 가까워질수 록 일반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들고 보스급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늘어 난다.

최근 일주일간 이들은 보스급 몬스 터들을 수도 없이 상대했기에 유적 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후우. 그나저나 빨리 돌아가고 싶 네. 통신도 끊겨서 답답해.”

이서준이 최서윤의 옆에 털썩 앉으

며 말했다.

최서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 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바깥세상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요?”

“글쎄. 별일 없지 않을까? 있어 봐 야 자운의 테러 정도 같은데…… 근 데 자운도 어느 순간 테러를 멈춰 서.”

“흐으음. 아무 일도 없길 바래야죠. 아 맞다.”

최서윤이 무언가 생각난 듯 품 안 에서 홀로그램 생성기를 꺼냈다.

톡톡 터치를 누르자 환한 빛과 함

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이거 보셨어요?”

홀로그램에 떠오른 건 복잡한 마법 진으로 그려진 술식이었다.

이번 유적지 탐사를 통해 새롭게 얻은 정보들이었다.

이서준은 의문에 찬 눈으로 술식을 살폈다.

술식 안에는 ‘차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게 왜‘?”

“김창현이 지금까지 쫓았던 것이 차원. 그리고 시간에 관련된 술식이

었잖아요.”

“어. 그렇지.”

최서윤은 홀로그램을 톡톡 건드렸 다. 그러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포탈. 그리고 소환식에 대한 술식 으로 2년 전 협회에서 발견했던 김 창현이 찾던 술식의 내용들이었다.

“협회는 이 술식을 통해 김창현이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소환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었죠.”

이서준 역시 잘 알고 있던 내용이 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렇지. 신비 학계에서는 부 정하고 있지만.”

김창현이 조사한 차원 소환 술식은 ‘이론적으로 완성될 수 없다.’가 신 비 학계의 의견이었다.

이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인 류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이론 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는 협회에서 처음 발표 했던 대로 김창현은 다른 차원의 무 언가를 소환하려는 게 맞는 거 같아 요.”

“......그래?”

이서준은 의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서윤은 홀로그램에 떠오른 술식

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법칙 이 하나 더 있는 거죠. 세계를 부정 하지 않으면서 이론을 완성할 숨겨 진 열쇠라고 할까요?”

“……숨겨진 열쇠라.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해봐요. ‘회귀자’의 존재는 신 비를 통해 이미 입증되었어요. 하지 만 인류의 이론에 의하면 ‘회귀’는 인과율에 위배되어 불가능한 것이 죠.”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인간의 이론상 ‘회귀’란 불가능하

지만 회귀자는 분명 존재한다.

최서윤의 말대로 아직 인간이 밝혀 내지 못한 세계의 특수한 법칙이 존 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이서준이 말했다.

“만약 숨겨진 법칙이 있다면, 김선우도 그 법칙을 알고 있던 걸까?”

갑작스러운 김선우의 이야기에 최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멍하니 눈앞에 떠오른 술식을 바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우리끼리 농담 삼아 이야기도 했었잖아요. 선우 선 배님이 회귀자일지도 모른다고.”

김선우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많은 미스테리가 남아 있었다.

그의 정체. 그의 목적…….

그리고 마법사관학교의 시험, ‘심 연 탐험’을 통해 보았던 그의 기억.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었는데 그 세계는 자신이 알던 현실의 세계 와는 조금 달랐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마공학 기술도 없던 세계였다.

그 세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이서준과 최서윤의 대화에 몇몇 동료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서윤이? 지금 몇 시 야‘?”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윤하영이었다.

최서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에요. 슬슬 일어나셔야 해요.”

“흐아아암. 샤워하고 싶어……

그렇게 탐사팀의 동료들이 하나둘

씩 눈을 떴다.

20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 모 여 있기에 유적지 내부는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고, 아공간 가방에 서 식량을 꺼내 간단한 식사를 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탐사팀 대장, 김덕현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도 느끼고 있겠지만 유적지의 끝이 머지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도 록.”

“네!”

이후 탐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은 무참히 쓰러졌으며, 예고도 없이 튀 어나오는 함정들은 보조계 마법사들 에 의해 손쉽게 무력화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탐사대는 가로막힌 길에 도착했다.

“뭐야? 길이 막혔는데?”

“그러게? 설마 여기가 끝인가?”

그때 신영준이 벽 너머를 올려보더 니 말했다.

“여기도 술식이 있네.”

술식이 발견되자 최서윤은 곧바로

스마트 패드를 이용해 술식을 촬영 했다.

이서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해석할 수 있겠어?”

“네, 잠시만요.”

톡톡 패드의 화면을 건들자 술식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 아무래도 여기가 유적지 의 끝 같은데요?”

“엥? 수호자도 못 만났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서준이 눈을 찌푸렸다.

팀의 리더인 김덕현 역시 의문을

느끼며 최서윤에게 다가갔다.

“무슨 내용이지?”

“포탈 술식이랑……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어떤 메시지냐?”

김덕현이 묻자 최서윤이 천천히 메 시지를 읽었다.

“마지막 관문…… 신비……

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바닥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벽에 그려진 술식에서는 강한 빛이 뿜어지고, 신비로운 기운이 모두의

몸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최서 윤이 말했다.

“……저 술식, 보상 방으로 이동하 는 포탈인 거 같아요.”

“뭐?”

“갑자기 보상 방이라고?”

술식에서 뿜어지던 빛은 점차 모두 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번쩍이더니 공간이 바 뀌었다.

A O O O.

한순간에 공간이 달라지고 최서윤 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 간.

방금까지 함께 있던 동료들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몽롱한 느낌에 최서윤은 당혹감을 느꼈다.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인 간이여…….]

어디선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음성은 아니었다.

최서윤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누군 가의 ‘의지’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 신비?”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언가가 모 즙을 드러냈다.

커다란 눈이 달린 촉수 괴물이었다.

[신비라…… 너희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

w..역시.”

유적지 공략 도중 신비와 대화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 데 정말로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신비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신비는 ‘진리’를 깨우친 지적 존재.

그들이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의문을 해소해줄 것이라 생각 하고 있었다.

그때 신비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녀

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괴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최서윤은 긴장감을 느꼈다.

[……너는 ‘자격’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탐구했구나.]

“……자격이요?”

뜬금없는 말에 최서윤은 의문을 느 꼈다.

[그대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다른 이들 대다수가 ‘자격’에 도달

해있어. 물론 그대만큼 깊게 탐구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놀랍군…….]

신비는 계속해서 이해하기 힘든 말 을 내뱉었다.

최서윤은 그 말을 듣고는 물었다.

“제 동료들도 저처럼 당신을 만났 나요?”

[그렇다…… 현재 나의 분신들이

네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아무래도 신비는 여러 개의 자아를 나눌 수 있는 모양이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 만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재밌군. 재밌어. 이것이 혼돈이 만 들어낸 결과인가…….]

혼돈!

최서윤은 그 말에 눈을 번뜩 떴다.

김선우와 관련된 내용 중, 유일하 게 어떤 단서조차 찾을 수 없던 것

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방금 당신 이 말한 혼돈이라는 게 뭐죠?”

그 물음에 신비의 동공이 사방팔방 으로 굴러갔다.

[혼돈……? 흐흐흐…….]

신비가 낮게 웃었다. 기괴한 목소 리에 등골에서 소름이 돋았다.

[흐흐흐흐.. 흐흐흐흐흐흐흐

…….]

[..흐흐. 미안하다.. 나도 모

르게 즐거워서 말이지…….]

신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더니 말했다.

[……뭐. 오랜 탐구로 너는 자격에 근접해 있으니 말해줄 수 있겠지. 운이 좋군. 이건 쉽게 들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닌데 말이야.]

스으으으...

동시에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 을 스쳐 지나갔다. 감겨 있던 신비 의 눈이 다시 뜨여지고 그녀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 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지 식이 스며들었다.

정해진 미래, 세계의 법칙, 신비, 운명…….

“으으읏!”

최서윤은 강한 두통을 느끼며 머리

를 움켜쥐었다.

“……허억. 허억. 허억……

최서윤의 두 눈.이 떨렸다.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제서 야 인과율에 위배되는 ‘회귀’를 김 창현이 어떻게 이루어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런 세 계였다고?”

최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 리자 신비가 말했다.

[이것으로 너는 완전한 ‘자격’을 갖

추었다. ‘혼돈’이 무엇인지 알 권리 를 얻게 된 것이지.]

최서윤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 세계의 수많은 지식. 정해진 운 명…….

회귀자라도 미래를 바꾸는 건 불가 능하다.

“……선배님은 대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김선우가 미 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걸.

그리고 자기 뜻대로 미래를 바꿔왔 다는 것을.

이건 세계의 법칙에 위반되는 것이 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법칙에서 자유로 웠던 거지?

그때 신비가 말했다.

[혼돈이란…… 세계의 법칙에서 속 하지 않은, 신의 그릇을 말한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 간.

신비의 기운이 흐르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이서준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신비가 보여준 끝없는 지식.

이서준은 자신이 모르던 세계의 이 면을 알게 되자 깊은 충격에 빠졌 다.

진천우가 왜 자운을 만들어 테러를 일으키게 되었는지.

또 강령술의 신비가 자신에게 말했 던 ‘자격이 없다.’라는 의미가 무엇 인지 그는 모두 알게 되었다.

“……김선우는 이 모든 걸 알고 있 었던 건가?”

그렇게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 도 김선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선우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리고 정해진 미래를, 어떤 방법 으로 자신의 의지로 바꿔왔던 것일

까?

[흐흐…… 흐흐흐흐…….]

그렇게 충격의 늪에서 헤엄치던 사 이.

신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혼돈의 씨앗이여…….]

혼돈의 씨앗.

크루아스의 침공 때 가고일에게 불

렸던 호칭이었다.

당시 녀석의 말에 의하면 ‘혼돈의 씨앗’이란 변화의 잠재력을 가진 존 재를 말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 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혼돈이란 뭡니까?”

이서준의 물음에 신비의 눈알이 시 계방향으로 굴러갔다.

[‘혼돈’에는 복잡한 의미가 담겨있 어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질서 로부터 벗어난 존재…… 자유 의지

를 지닌 자…… 변화의 힘…… 그 외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기 때 문이지…….]

이서준은 가만히 신비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혼돈의 진정한 의미를 묻 는다면 나는 ‘신의 그릇’이라고 대 답하겠다.]

“……신의 그릇?”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서준은 의문 을 느꼈다.

[신의 그릇이란 신이 될 가능성을 지닌 자를 말한다. 내가 너를 ‘혼돈 의 씨앗’이라 불렀던 이유 역시 그 이유 때문이지. 네 육신에는 미약한 불사의 힘이 담겨 있다…….]

……불사.

그 말의 의미 역시 이서준은 알고 있었다.

진천우가 불사를 이루기 위한 재료

로 자신을 되살린 걸 알고 있었으니 까.

[그리고 불사는 신이 되기 위한 조 건 중 하나…… 그 말은 즉 너 역 시 ‘신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밝혀지는 정보에 이서준 은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신비의 설명에 ‘혼돈’이 무엇인지 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난해했다.

[물론 네가 신이 될 가능성은 ‘씨 앗’이라 불릴 만큼 아주 미미하다. 신의 진정한 힘은 육체가 아닌 정신 에서 오는 것이니...... 흐흐흐흐

흐…….]

남극에 발견되었던 초대형 유적지 공략에 성공한 탐사대는 안전하게 기지로 귀환했다.

유적지에서 돌아온 탐사대의 표정 은 하나같이 어두웠으며 그들의 귀 환을 환영하던 기지의 사람들은 의

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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