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발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았다.
“보, 봉인구를 채우겠다! 그러니 나를 풀어다오!”
순간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으나 겨 우 참아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거든.
“강요하는 거 아니야. 억지로 채울
필요 없어.”
“괘, 괜찮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최대한 곤란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과몰입’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정도 연기는 식은 죽 먹기다.
“……으음. 역시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볼게. 억지로 채우는 건 나도 원하지 않거든. 조금만 더 기 다리면一.”
“아니, 아니. 내가 채우고 싶다! 내 가 원한다! 부탁이니 봉인구를 채워 다오!”
결국 녀석이 부탁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뻔해 서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과몰입’ 을 발동했다.
“……크흠. 그렇게 부탁하니 어쩔 수 없네. 네가 원한 거다?”
“그래! 빨리!”
나는 [언령의 봉인구]를 녀석의 목 에 채웠다. 동시에 봉인구에서 강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운명으로 지정해. 시간 없 어.”
진천우의 봉인술이 빠르게 녀석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여우 역시 그것을 아는지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올려 봉인구에 주입했다.
우우우웅!
이내 봉인구에서 수많은 술식이 떠 올랐다.
나는 그 술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이내 내 마력이 섞이 며 신비한 기운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언령의 봉인구 착용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규칙을 지정해주십시오.]
“규칙. 봉인구의 착용자는 앞으로 내 모든 명령을 따른다.”
“……응? 자, 잠깐! 거부한다!”
여우가 크게 소리쳤다.
나는 녀석의 몸에 피어오르는 술식 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 없어서 그래. 빨리.”
“……크으으윽! 그래도 모든 명령 이라니.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알았어. 그럼 규칙. 봉인구의 착용 자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를 돕는 다.”
“으으으음. 아, 알겠다!”
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규칙을 수락했다.
……사실은 그게 같은 말인데.
우우웅!
이내 빛이 크게 번지며 눈앞에 메 시지가 떠올랐다.
[‘운명 지정’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재앙급 마수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인과율이 0.5 상숭합니다.]
『현혹하는 말솜씨’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당신의 말에 담긴 설득력이 한층 강해집니다.]
“......됐다.”
이것으로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다.
재앙급 마수를 팀으로 두는 것.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 엄청난 이점 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엘 린이 내 뒤에서 황당한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나도 저렇게 당한 건가?”
*
이후 나는 여우에게 걸려있던 [영 겁의 봉인술]을 풀어내었다.
복잡한 고대 술식인만큼 풀어내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근 2년 사이, 술식 이해력이 S등급에 오르기도 했 고.
또 [정령 실체화 술식]과 같은 고 대 술식들을 자주 다루었기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우우우웅!
번쩍!
『영겁의 봉인술 해체’ 업적을 달성 합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마력 이해력(S)’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고대 술식의 해체 속도가 크게 상 승합니다.]
그 결과 나는 여우에게 걸려있던
봉인술을 2시간도 되지 않은 빠른 시간에 풀어낼 수 있었다.
“……후우.”
“드, 드디어 봉인에서!”
여우가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한 얼굴이 되어 외쳤다.
자유를 되찾은 것이 기쁜지 아홉 개의 꼬리를 헬리콥터처럼 회전시켰 다.
“자. 그럼 봉인도 풀었으니 이제 세세한 규칙을 설정해줄게.”
내 말에 여우가 행동을 멈추고 의 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규칙?”
“착용자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나 를 돕는다. 기억 안 나?”
“기억은 난다만 규칙과 너를 돕는 게 무슨 상관인 것이냐?”
“상관있지. 나를 도울 건데 나한테 방해되는 행동이 무엇인지는 미리 알아야 될 거 아니야.”
여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으으음. 확실히 그렇기는 하겠군. 그럼 말해라.”
“대단한 건 없고, 네 판단하에 나 한테 방해될 것 같은 일은 알아서
하지마.”
여우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아. 그리고 지금 모습 못 바꿔?”
“모습 말이냐?”
지금 여우는, 인간의 육체에 얼굴 은 여우의 것을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인외의 존재였기에 동행 하기 곤란하다.
“앞으로 동행해야 하는데 그러고 다닐 순 없잖아.”
“그럼 이건 어떠냐?”
우우우웅!
강한 빛이 뿜어지더니 여우의 얼굴 이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것으로 변 했다.
2년 전에도 한 번 보았던 모습이 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다만, 엘린과 렌은 그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 이고 있었다.
“머리 위에 여우 귀는 못 없애?”
“이거 말이냐? 잠깐 기다려봐라.”
그리고 잠시 뒤.
녀석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지더니
뿅. 하며 여우 귀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감탄했다.
이렇게 보니 진짜 인간과 다름이 없었다.
엉덩이 뒤에 달린 9개의 꼬리만 제외하면.
“꼬리는 못 없애?”
“물론 할 수 있다.”
다시 녀석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 어지더니 뿅. 하며 꼬리가 사라졌다.
이것으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이다.
“오오오. 대박.”
나를 포함해 엘린과 렌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 반응을 본 여우는 팔짱을 끼며 우쭐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흐응.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라!”
가만 보니까 저 둔갑 능력. 상당히 쓸만해 보이는데.
갑작스러운 실험 정신이 발동했다.
“혹시 다른 사람으로도 둔갑할 수 있어?”
“다른 사람 말이냐?”
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예를 들면 나라던가.”
“하하. 물론이지.”
뿅!
여우가 순식간에 훈훈한(?) 무언가 로 바뀌었다.
마치 도플갱어라도 본 듯한 기분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저 능력.
확실히 쓰임새가 많겠는데?
내가 히죽 미소를 짓자 여우가 눈
을 가늘게 떴다.
“……무엇이냐? 그 기분 나쁜 눈빛 은‘?”
일본에서의 모든 일을 마치고 서울 에 위치한 801 길드 사무실로 돌아 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선우 씨!”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주는
여성. 한세연이었다. 이내 내 뒤에 선 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순신 맞으시죠?”
잠시 멍한 눈으로 한세연을 바라보 던 렌이 정신을 번뜩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토 렌이라고 합니다.”
“한세연입니다.”
“……흠흠. 귀하의 명성은 이미 알 고 있습니다.”
렌은 의외로 한세연 앞에서 낯을 가리는 반응을 보였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당황스러
운 건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 었다.
아무래도 한세연의 압도적인 미모 에 놀란 모양인데.
내가 렌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녀석 이 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 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뭐가?”
“너희의 관계를 방해할 생각은 없 다.”
……뭐라는 거야?
그때 였다.
“응애!”
뒤에서 그레텔이 뛰어오더니 도도 한 모습으로 내 발 옆에 서 있는 작은 새끼여우에게 다가갔다.
여우와 그레텔의 시선이 교차하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순간 한세연의 두 눈이 휘둥그 레지며 말했다.
“어머. 이 여우는 뭐예요?”
한세연이 쭈그리고 앉아 여우를 바 라보았다.
“너무 귀엽다…… 목줄까지 달아놓 으셨네.”
한세연이 여우를 번쩍 들어 올렸 다.
여우는 의외로 크르릉, 귀엽게 울 며 한세연의 품에 곱게 안겼다.
그레텔은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얘는 이름이 뭐예요?”
한세연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나에 게 묻자 여우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타마모다.”
“꺅.”
순간 한세연이 놀라서 여우를 떨어 트렸다.
이내 여우의 몸이 환하게 빛나더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자?”
한세연은 멍하니 여우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그러고는 여우의 목에 걸린 목줄을 보고는 방금전 그레텔과 같은 불안 한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제발…… 제발
허공에 생겨난 균열의 틈 사이에 서, 홀로 서 있는 씁쓸한 남성의 모 습이 보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거대한 흑룡이 흉포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서울 전체를 먼지로 만들어 버릴 검은 마력의 구체가 구현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 검은 구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고립되어버린 세계에서, 남성이 홀 로 감당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