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7화 (456/535)

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솔직하 게 말할 상황이 아니었어. 내가 순 간 가속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려면 내 모든 비밀을 털어 놓아야 했었으니까.”

‘과몰입’은 단순히 상황에 몰입하 여 연기력을 상승시켜주는 효과만 있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나에게 몰입, 공 감하게 만들어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과몰입의 효과 덕인지 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겠다는 듯.

분명한 건 아까와 달리 녀석의 경 계가 한층 얕아져 있다는 것이다.

내 진심(?)이 드디어 먹혀들고 있 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멋대로 오해한 건 너야.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그 상황 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는지.”

렌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 었다.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가 싶더니 말했다.

“……뭐. 생각해보니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겠군. 다짜고짜 찾 아온 게 나이기도 했으니 꽤 곤란했 을 거야.”

됐다!

[‘설득의 제왕’ 업적을 달성합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잠재 개성, ‘과몰입’의 힘이 소폭

상승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공감을 더욱 쉽게 끌어올릴 수 있게 됩니다.]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를 무시하 고는 말을 이어갔다.

“엘린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는 자운을 막기 위해 동료를 모으 고 있어.”

렌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네 힘이 필요해.”

렌은 잠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생 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내게 말했다.

“너는 이미 나를 속인 적이 있다. 네 상황을 이해한 것과 목적을 별개 로, 너를 따를 순 없다.”

단호한 대답.

과몰입의 효과로도 렌을 팀으로 끌 어들이는 건 불가능한 건가.

예상 못 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엘린도 설득한 상황이었기에 조금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때 였다.

“……하지만. 네가 진심을 보여준 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어지는 렌의 말에 나는 의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라.”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증거를 보이라는 것.

피의 맹세로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 었다.

“좋아. 그 정도쯤이야. 엘린 너도 이참에 똑바로 확인해.”

“..응?”

나는 손바닥 위로 마력을 끌어올렸 다.

마력은 곧 푸른빛의 가느다란 실처 럼 구현되더니 내 손가락 끝에 상처 를 만들었다.

동시에 붉은 피가 술식의 형태로 변했다.

“나는 지금부터 진실만을 말한다. 이를 어길 시 목숨을 잃는다.”

우우웅!

피로 만들어진 술식에서 빛이 뿜어 졌다.

‘피의 맹세’가 발동된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를 속이려고 접근한 것 이 아니다.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핑계를 댔을 뿐이다.”

우우웅!

술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말이 ‘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의 적이 아니며 해를 가 할 생각도 없다. 그저 진심으로 동 료가 되길 원할 뿐이다.”

이번에도 내 말이 참이라는 듯 피 의 술식에서 커다란 빛이 번졌다.

그것을 본 엘린과 렌은 입을 다물 었다.

“마지막. 나는 자운과 진천우에게 깊은 악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의 죽음을 원한다.”

술식이 다시 커다란 빛을 번쩍였 다. 이번 역시 ‘참’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피의 맹세를 종료한다.”

우우우웅!

번쩍!

허공에 떠오른 피의 술식은 그대로

사라졌다.

내 앞에 선 두 사람은 가만히 나 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그들을 향 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날 믿을 수 있겠어?”

피의 맹세의 절대적인 맹약에 렌은 완전히 나를 믿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적이 아니고, 진천우를 노리 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나를 적

대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렌이 팀에 합류하게 되고 우리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일본에 방문한 이유는 ‘렌’ 한 명 때문은 아니었다.

만나야 할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

“……분명 이 근처였는데.”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 신사.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다.”

렌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 다.

시선을 돌리자 수많은 술식이 그려 진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

“맞네.”

“……그런데 너. 정말로 할 생각이 야?”

엘린이 걱정에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 바위에는 재앙급 마수가 봉인되 어 있다.

과거 진천우에게 뒤통수를 맞고 ‘영겁의 봉인’에 걸리게 된 구미호 가.

녀석에게 한 약속도 있고, 시간도 꽤 지났으니 슬슬 녀석을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비록 봉인술에 의해 힘이 많이 약 화된 상태라고는 하나 상대는 재앙 급 마수.

웬만한 S등급 마법사 여럿 모인 것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 이다.

물론 재앙급 마수인 만큼 완전히 풀어주는 미친 짓은 절대 하진 않을 거다.

“그럼 시작한다.”

나는 봉인 술식을 살펴보았다.

이전에는 진천우가 남긴 [영겁의 봉인] 위에 아베노 일족의 봉인이 덮여 있어 상당히 복잡했는데, 지금 은 [영겁의 봉인] 하나뿐이라 풀어 내는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 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과거의 나였다면 봉인을 풀어내는 데 꽤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

우우우웅!

술식에 마력을 주입하자 강한 푸른 빛이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산 전체가 크게 울리고 바위가 저 저적 갈라지며 금이 생겨나기 시작 했다.

“……크윽!”

그리고 이어지는 불길한 마력.

둥골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 바위의 형태가 점점 커지 더니 산을 보는 듯 거대한 여우의 형상으로 변했다.

새하얀 얼굴에 찬란하게 빛나는 금 색의 털.

O O O으]

여우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봉인이 풀려나 자 놀란 모습이었다. 이내 녀석은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너는……

“안녕. 오랜만이네.”

내 인사에 여우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크으윽! 2년을 기다렸다…… 너무 늦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속은 줄 알고……!]

여우가 내게 크게 소리쳤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머릿속이 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두 손을 올리며 녀석을 진정시켰다.

“자자. 어찌 됐든 구하러 와줬잖아. 진정해.”

[……크르릉.]

내 말에 붉어졌던 여우의 눈이 다 시 원래의 금빛으로 돌아왔다.

이내 아홉 개의 꼬리 중 하나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더니 내게 말했다.

[……뭐. 비록 시간은 걸렸으나, 진 천우와는 다르게 너는 약속을 지키 러 와주었구나. 그 점은 높이 사 지!]

“그보다 올려보기 목 아픈데 전처 럼 작아질 순 없어?”

[물론 가능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건 없다.]

우우웅!

여우의 몸이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 더니 서서히 크기가 작아졌다.

이내 여우는 이전에 보았던 일본 전통복을 입은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여우의 모습

이다.

조금 괴상한 모습이지만 넘어가기 로 했다.

“됐느냐? 아니면 네 취향의 인간으 로 둔갑해줄까? 깔깔깔.”

“……내 취향은 됐고. 약속대로 널 풀어줄게.”

여우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 고 머리 위의 두 귀는 쫑긋 세워졌 다.

“그래. 어서 봉인을 풀어다오. 이제 곧 영겁의 봉인이 다시 나를 가둘 것이다!”

“그 전에.”

내 말에 여우가 가만히 나를 바라 보았다.

“조건이 있어.”

“……조건 말이냐? 하하하. 나를 무엇으로 보고? 나를 풀어준다면 알 아서 그대에게 금은보화를 선물하려 했다!”

여우가 깔깔 다시 기분 좋게 웃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마수 주제에 성 격이 참 입체적이다.

“미안한데 금은보화 같은 건 필요

없어.”

내 말에 여우가 웃음을 멈추었다.

“……음. 그러냐? 그럼 무엇을 원 하는 것이냐? 내 최선을 다해 그대 의 소원을 이루어주마.”

여우가 팔짱을 끼며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를 따라서 진천우와 그 일당들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줘야겠어.”

“.음?”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는지 살랑살 랑 흔들리던 아홉 개의 꼬리가 움직 임을 멈추었다.

“……으으음. 나보고 그대 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냐?”

“뭐, 그런 셈이지.”

영 탐탁지 않은 듯 여우는 팔짱을 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 입을 벌리고 손뼉을 치며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 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좋다! 네 말을 따르겠다. 그 럼 봉인을 어서 풀어주거라.”

여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딱 보니까 봉인을 풀어주면 바로

도망칠 생각인 거 같은데.

“엘린.”

내 부름에 잠시 멍한 얼굴로 대화 를 지켜보던 엘린이 어깨를 들썩였 다.

“응?”

“그거 줘봐.”

“아. 웅.”

엘린은 품 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 를 꺼냈다.

그녀가 경매에서 얻은 특별한 힘이 담긴 신비, ‘족쇄’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여우에게 내밀

었다.

“이걸 목에 채워.”

여우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더니 내게 물었다.

“……그 흉악해 보이는 물건은 무 엇이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개 목줄.”

“……방금 뭐라?”

여우가 눈을 찌푸리며 내 손에 들 린 검은 띠를 바라보았다.

똑똑히 들었음에도 자신의 귀를 의 심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급히 정정했다.

“개 목줄은 농담이고. 족쇄용 신비 야. 다른 이름으로는 ‘초소형 봉인 구’. 너도 알지?”

초소형 봉인구.

착용자에게 규칙을 강제해 힘을 억 제하는 효과를 지닌 신비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건 대요괴, 손 오공의 족쇄로 알려진 성유물 [긴고 아]가 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봉인구는.

[언령의 봉인구(유물)] 분류 : 초소형 봉인구

[지속 효과]

►운명 지정

착용자는 자신의 운명을 지정합니다. 착용자는 지정한 운명이 만든 규칙에 따라야 합니다.

►힘의 족쇄

착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60% 감 소합니다.

[사용 효과]

►봉인 해제

운명의 명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든 제약과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성유물인 [긴고아]처럼 타인이 강 제로 채우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럼 에도 효과 자체는 상당한 봉인구다.

그리고 여우 역시 언령의 봉인구가 가진 효과를 눈치챈 듯 경계의 눈빛 을 보냈다.

“……그대는 지금 나보고 이걸 착

용하라는 것이냐?”

“넌 위험해. 통제할 수 없다면 봉인을 풀어줄 수 없어.”

“그럼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겠 다.”

여우의 말에 나는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조용히 사 는 게 아니라 나를 돕는 거야. 규칙 도 느슨하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 싫다! 저 목걸이는 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달을 수호하는 대요괴! 인간의 애완견 따위가 아니

다!”

여우가 다시 눈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생각보다 격한 거부 반응에 괜히 나까지 당혹감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여우의 모습을 빤히 바 라보다가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차기 싫어?”

“싫다!”

“죽어도?”

“그래!”

나는 녀석에게 내밀었던 언령의 봉인구를 다시 집어넣었다.

“저렇게까지 거부하니 어쩔 수 없 네.”

“그, 그래! 잘 생각했다! 조용히 살겠다고 맹세하겠다! 그리고 너를 돕겠다고도 약속하지!”

여우의 표정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자. 그럼 어서 나를 풀어주거라.”

그때 구미호의 몸에서 서서히 술식 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천우가 녀석에게 걸었던 ‘영겁의 봉인술’이 다시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 엘린과 렌에게 말했다.

“계약 결렬. 그럼 슬슬 돌아가자.”

“......응?”

여우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대여?”

나는 다시 뒤를 돌아 녀석을 바라 보았다.

“미안하지만 봉인구 없이 널 풀어 줄 수 없어.”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 았느냐? 아! 그럼 피의 맹세를 하겠

다. 그러면 되지 않은가?”

녀석의 말대로 피의 맹세가 ‘봉인 구’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의 맹세라고 봉인구의 역 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건 아 니다.

피의 맹세는 어디까지나 규칙을 정 하는 것.

결국 팀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녀의 힘을 제어해 인외의 존재라는 걸 숨겨야 하는데, 피의 맹세는 그 것을 막아줄 수 없었다.

“이건 네 힘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 이기도 해. 피의 맹세로는 해결할

수 없어.”

스으으으.

여우의 몸에 [영겁의 봉인술]의 술 식이 점점 번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몸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어? 어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네가 만족 할만한 방법을 찾아서 다시 올 테니 까.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 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엘린과 렌에게 시선을 돌렸 다.

“그럼 돌아가자.”

……그렇게 돌아가려는 그때.

“그대여? 자,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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