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5화 (424/535)

425화

협회와의 작은 충돌이 끝나고.

은신처로 돌아오자 하령과 선화가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둘의 얼굴을 본 나는 잠시 양심의 찔림을 느꼈다.

다름 아니라 이 둘이 카시스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혼돈’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인의 왕이 되기 전 이 둘 과 했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

었다.

―우리가 네 번째 일지를 찾는 이 유도 그거야. 어떤 미래인지 모르지 만, 그것이 종말이라면 반드시 막아 야 하니까.

이들은 초대의 예언을 통해 종말의 씨앗이 될 수 있는 ‘혼돈’을 경계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정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내게 적의를 들 어낼지도 모르는 일.

“왕이시여.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하령과 선화는 평 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그 둘을 바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아 참. 협회 일은 해결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이 둘을 지 나쳐 은신처 내부로 천천히 걸어 들 어갔다.

복도를 지나 왕좌에 앉자 내 뒤를 따라온 선화와 하령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일족들이 용의 습격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고 있는 상태입

니다.”

“으음. 그렇겠지.”

잠시 난감함을 느꼈다.

뜬금없이 용이 출몰한 것도 모자라 내게 선전포고까지 하고 갔으니, 납 득할 이유를 설명해야 할 터.

“……왕께서 난처해하실 것 같아 그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해결했습니다.”

“......웅?”

알아서 해결했다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당황하자 하령이 말했다.

“과거 초대 왕이 남기셨던 예언이 있습니다. ‘먼 훗날 재앙급 마수가 세계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예언이죠.”

하령은 말을 이었다.

“이를 이용해 ‘용족이 새롭게 태어 난 마인의 왕을 중심으로 일어날 변 화를 경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다행히 일족들은 별다른 의문 없이 잘 넘어간 상태입니다."

어쩌다 보니 거짓말을 하게 된 셈 이었지만 모든 것을 그대로 설명할 수 없으니 깔끔히 잘 처리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이 따 로 있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근데 너희, 앞으로도 내게 충성할 생각이야?”

카시스의 등장으로 두 사람은 내가 자유의 힘, 즉 ‘혼돈’을 지니고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에 파멸을 일으 킬 ‘혼돈’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고.

내 말에 하령은 잠시 생각에 잠기 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왕께서 초대가 말씀하셨던 ‘혼돈’이었다는 사실에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초대께서는 ‘혼돈’이 일으킬 세계의 파멸을 계 속해서 경고해왔으니까요.”

나는 잠시 씁쓸함을 느꼈다.

신비도 그렇고, 오늘 마주쳤던 재 앙급 마수도 그렇고.

내가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이 유 하나만으로 이들은 나를 세계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정작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억울한 건 난데.

그때 선화가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계속 왕께 충성하 기로 했습니다.”

계속해서 내게 충성하겠다고?

“어째서지? 초대의 말에 의하면 나 는 파멸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존 재일 텐데?”

“초대께서는 ‘혼돈’이 반드시 세계의 파멸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지 않 으셨습니다.”

선화는 고개를 들고는 또박또박 말 을 이었다.

“종말. 혹은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

질 것이라 했죠.”

그녀의 말에 나는 마인의 왕이 되 기 전, 그녀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 랐다.

—일종의 종말론 같은 거야. 세계 를 유지하던 법칙과 개념이 무너지 고 혼란이 찾아온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그 혼란 이후 종말이 찾아올 수도 있고 새로운 신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다고 했어.

“저희는 짧은 시간 왕의 곁을 지키

며 보았습니다. 왕이 가진 능력, 행 동…… 그리고 의지. 저희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왕이 보였던 모습은 분명 세계의 파멸과는 거리가 멀다 고 생각합니다.”

선화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배팅하기로 했습니다. 왕께서 만들어낼 미래가,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신세계의 시작이라는 것을요.”

잠시 입을 다물고는 둘을 바라보았 다.

둘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진심이 담 겨 있었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가능성 에도, 이들은 나를 지지하겠다고 선 언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 는 완전한 나의 편이 생겼다는 것에 가슴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게 느껴 졌다.

“……후.”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신세계. 그거 좋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최근 연속해서 터져 나오는 사건으 로 인해 마법사 협회 최상층, 간부 회의실은 쉴 틈 없이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그 마인 애송이 녀석 때문에 1년 치 회의를 한 달 동안 하고 있 네.”

수많은 정상급 마법사가 모인 회의 실에서 염제가 불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인자한 성격의 미하엘은 그

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죠. 혼란의 시기에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저희가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성자 나셨어.”

염제가 조롱하듯 말하자 미하엘이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회의 진행 하죠. 끝나고 할 일이 많거든요.”

언제나 그랬듯 오늘의 회의 주제는 협회의 뜨거운 이슈 메이커인 ‘마 왕, 김선우’였다.

김선우는 오늘도 협회의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떡밥을 투척했다.

“자자. 오늘 김선우가 회장님께 전 달한 메시지는 알고 계시죠?”

“한 달 내로 크루아스가 서울을 침 공할 것이다…… 장난해? 그걸 어떻게 믿어?”

염제의 말에 가만히 지켜보던 미국 협회의 간부, ‘황금의 인형사’라는 이명을 가진 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의 말을…… 그것도 제대로 된 근거도 없잖아요?”

그러자 미하엘이 끼어들었다.

“강원도 동해…… 그러니까 김선우

가 발견된 장소에서 용의 마력이 감 지됐던 건 다들 아시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미하엘은 회의실 내부의 모두를 둘 러보며 말을 이었다.

“김선우는 용과의 만남을 통해 어 떤 소스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다른 장소도 아니고 서울을 침공한다는데 당연히 홀려들으면 안 되죠.”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 된 도 시 중 하나로 수많은 시민이 밀집되 어 있다.

만약 김선우의 말대로 용이 서울에

강림하게 된다면 마인 테러 이상의 끔찍한 사고가 터질 수 있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하 엘의 주장을 듣던 염제가 말했다.

“……전부터 느끼는 건데 저거 은 근 김선우와 관련된 건 전부 옹호한 단 말이지?”

미하엘은 잠시 입을 다물다가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그리고. 최근 2대 마인의 왕이 일으켰던 테러 사태는 잊은 겁 니까?”

서울 마인 테러 사건.

빠른 진압은 물론, 2대 마인의 왕 을 토벌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완전 한 승리라 볼 순 없었다.

그사이 이루어진 인명, 물적 피해 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엄청 났기 때문이다.

“……크홈. 그건 사고였다. 협회의 감시 시스템이 아무리 뛰어나도, 놈 들이 ‘신비’를 이용하면 방법이 없 어. 우리도 억울한 거 알잖아.”

그렇게 회의가 과열되려 하자 베시 가 다시 끼어들었다.

“결국 이거네요. 김선우의 말을 믿

고 모든 시민을 한 달간 대피시킬 지. 아니면 서울의 마법사 병력 배 치를 늘리는 것으로 끝낼지. 맞죠?”

“잠깐. 마인 놈의 말을 믿고 서울 을 한 달간 비워놓는다고? 경제적 손실이 얼마인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염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올 이었다.

“그리고. 이게 김선우의 함정이었 다면? 마인에게 농락당한 것에 전 세계의 비웃음을 받을 건데. 이건 괜찮고?”

“체면이 중요합니까?”

미하엘이 반박하자 염제가 다시 말 했다.

“그래, 네 말대로 시민들 모두 대 피시키고 병력을 밀집했다고 치자. 김선우가 그것을 노리고 다른 지역 을 테러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건.”

미하엘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 베시가 조 용히 지켜보던 김진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진철은 의자에 둥을 기대며 팔짱

을 꼈다.

그러고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내 의견 물어서 뭐 하게? 어차피 투표로 니들끼리 정할 거 다 알고 있는데.”

한이 맺힌 듯한 말투.

그러자 회의장 내부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의견이 비등비등한 상황 에서는 회장의 힘으로 결정될 수 있 으나 한쪽으로 몰린 상황에서는 김 진철 역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됐고, 투표나 진행해라.”

시간이 흘러.

약 한 달간의 은신처 생활을 접고 서울로 내려왔다.

다름 아니라 내 목숨을 노리는 ‘크루아스’의 습격을 대비해, 세계 최 고의 요새라 알려진 서울에 은신하 기 위해서였다.

사실 서울 자체가 수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경제의 중심이다 보 니 요새라고 불리기에는 많이 허술

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안전 시스템 역시 마법 교도소, ‘아포리아’에 비할 바 아니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서울이 세계 최고 의 요새라 불리는 이유는 단 한 가 지다.

세계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는 ‘김 진철’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2대 마인의 왕도 서 울 테러를 계획할 때 김진철을 자신 의 은신처로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 었지.

삐 삑삑

나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서울 풍경이 훤히 보이는 거대한 창문과 푹신한 의자, 테이블 등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넓은 사무실과 비 슷해 보였다.

“......오호.”

이곳은 하령이 소유한 빌딩이었다.

서울에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단 말 에 하령이 이곳을 내어주었다.

“생각보다 되게 넓네.”

최근 칙칙한 은신처에서만 생활하 다 보니 오랜만에 보는 인간의 생활 공간에 묘한 감동이 느껴졌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천천히 주변 을 둘러보았다.

“흐음.”

티비, 냉장고, 식탁, 에어컨…….

있을 건 다 있네.

나는 그렇게 실내를 둘러보다가 테 이블의 위에 있는 리모콘을 눌렀다.

삑.

동시에 티비가 켜졌다.

[3 일간 이어졌던 마법사관학교의 기말시험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학 생들은 1년의 마무리를 성공적으로 지은 것에 후련함을 느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티비를 켜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눈 에 들어왔다.

마법사관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 다니고 인터뷰를 하는 학생도 보였다.

잠시 후 시험의 주제에 대한 설명 과 학생들의 활약, 과정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3학년의 최종 1위는 이서준. 2위는 유아라로 확정됐습니다.]

화면 너머에서 이서준의 모습이 스 쳐 지나갔다.

괜히 반가움이 느껴지려는 찰나, 기자가 인터뷰를 시도하는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이서준은 녀석답지 않게 인 터뷰를 거절했다.

유아라와 신영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화면 너머로 굳은 얼굴의 최 서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 다.

평소답지 않은 어두운 분위기에 왠 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으..쯔 ”

*X-

[다음 뉴스입니다. 재앙급 마수, 크루아스의 마력 반응이 여전히 감지 되지 않은…….]

삑.

티비를 껐다.

그러고는 넓은 창으로 걸어가 지상 을 내려보았다.

서울의 야경.

늦은 밤 시민들이 퇴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협회의 요원에게 직접 크루아스가 서울을 침공할 것을 알렸지만 서울 의 분위기는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입 술을 깨물었다.

“하령.”

스으으...

동시에 내 주위로 어둠이 피어오르 더니 하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결국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네. 얘 네. 내 경고는 귓등으로 듣고 있어.”

내 중얼거림에 하령은 대답하지 않 았다.

나는 서울의 풍경을 내려보다가 굳 은 얼굴로 하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수 없네. 직접 공포심을 심 어주자고.”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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