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은신처 밖으로 나오자 하늘의 저편 에서 검은 용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 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녀석이 다가올수록 불길한 마력의 기운은 점차 커졌고 마인들의 얼굴 에는 깊은 두려움이 드리웠다.
“요, 용? 용이 왜 이곳에……T
갑작스러운 용의 등장에 마인들은 패닉에 빠졌다.
나 역시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용
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녀석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건 그 들에게 나를 추적할 능력이 있다는 중거 였으니까.
크루아스로부터 도망치는 계획을 짰던 나에겐 중요한 선택지가 하나 가 사라진 셈이었다.
나는 입 안이 바짝 마름을 느끼다 가 주변의 마인들을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녀석은 아마 나를 찾아온 걸 거야.”
“……어째서 용이 왕을?”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너 흰 여기서 대기해. 나 혼자 간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선화와 하령. 그리고 어느 정도 전 투 능력을 갖춘 몇몇 마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 를 끄덕였다.
놈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상 불가피 하게 전투가 생길 수 있다.
이들과 함께한다면 분명 도움이 되 겠지.
그렇게 나는 은신처의 결계 밖으로 나와 놈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
녀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엄 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나를 따라온 마인들은 그 중압감에 견디기 힘든지 표정을 굳혔다.
[드디어 만나보게 되는구나. 혼돈 의 씨앗이여…….]
거리가 가까워지자 녀석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내게 말했다.
[내 이름은 카시스 드로우…… 모
든 용의 왕이자, 세계의 심판자인 크루아스 님의 권속이다.]
카시스 드로우.
원작에서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 기에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다만 녀석에게 느껴지는 마력은 이 전에 상대했던 재앙급 마수인 ‘질병 의 마수’를 뛰어넘어 있었다.
예상보다 더 강한 마력에 나는 긴 장감을 느꼈다.
그때 녀석의 시선이 내 뒤를 따라 온 마인들을 향했다.
[……그보다 방해꾼이 많군.]
스으으으!
갑작스레 녀석의 몸을 중심으로 거 대한 마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중압감이 지상을 짓 눌렀다.
“크윽!‘
마인들은 다급하게 마기를 끌어 올 리며 저항하려 했지만, 마법사도 아 닌 재앙급 마수의 기운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크 O O 으I”
[꺼져라.]
우우우웅!
콰아아아앙!
카시스의 몸을 중심으로 마력이 퍼 져나가며 주변 일대를 크게 휩쓸었다.
경악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나를 따라온 마인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한순간에 나와 카 시스. 단둘이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이제야 대화할 환경이 되었 군.]
카시스는 흡족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나는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마인 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말했다.
“……너. 어떻게 나를 찾아온 거 지?”
[너와 크루아스 님에게 이어진 운 명의 표식을 통해 찾아왔다.]
“운명의 표식?”
[그래. 너는 지금 크루아스 님과 ‘숙적’이라는 이름의 운명으로 이어 져 있다. 네 심장이 멈추기 전에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 운명의 끈이라 할 수 있지.]
……뭐야. 그런 게 있었다고?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녀석이 내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건, 크루아스와의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나는 참담함을 느끼다가 녀석과의 전투를 위해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 렸다.
그러자 녀석이 말했다.
[경계할 필요 없다. 나는 너를 해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내게 그럴 권한도 없고.]
그 말에 나는 끌어 올리던 마력을 풀었다.
“……뭐야. 그럼 여기는 왜 온 건 데?”
[크루아스 님의 명을 따라 네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
크루아스가 내게 거래를 제안했다 고?
“무슨 제안인데?”
[자결하거라.]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잘 못 들었나?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 으니 말하마. 나의 주군, 크루아스 님께서 너를 세계를 어지른 죄로 심 판하려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는 녀석의 이어지 는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심판의 날이 머지않 았다. 주군은 너를 심판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운명의 힘을 모으셨지.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죽음을 피할 수 없단 뜻이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 목숨이 니 서로 편하게 자결하라고?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살면서 이런 황당한 제안은 처음 받아본다.
거래라길래 뭔가 솔깃한 제안을 하 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군.]
카시스가 말했다.
[네놈을 제외한 모든 필멸자는 운 명이라는 굴레에 묶여 있다. 신비의 사도이자 나의 주군인 크루아스님 역시 마찬가지이지.]
[네놈을 죽이기 위해 주군께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혼돈의 힘을 빌렸다. 만약 네놈을 심판하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세계에는 엄 청난 혼란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랬다.
어차피 죽을 거 곱게 죽을 것이냐, 아니면 저항하다가 세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죽을 것이냐.
[네놈이야 죽으면 모든 게 끝이겠 지만, 이 세계에 남은 필멸자들은 그렇지 않다. 새롭게 생겨난 혼란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으 며 살아가겠지. 네놈도 그걸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했으 나 막상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설득력이 있었다.
내 죽음을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녀석의 말대로 평화롭 게 끝내는 게 더 좋지 않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귀 이후, 나는 이 세계에서 수많 은 인연을 쌓았다.
이서준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들 은 물론이고, 한세연과 같은 인물들 과도 많은 교감을 쌓아왔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이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나의 죽음으로 혼란을 느끼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 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용의 물음에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엿이나 먹어.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
그런 건 되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부터 영웅의 모험담을 좋아하는 일반인일 뿐,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 었으니까.
[‘용에게 엿을 먹인’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
다.]
[……거래는 불발된 건가?]
“도마뱀. 닥치고 잘 들어.”
내 말에 녀석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절대 안 죽어. 네놈들이 혼 돈의 힘을 빌려서 세계를 멸망시키 든, 다른 이상한 짓을 하든. 나는 절대 안 죽어.”
[…….]
나는 녀석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
“그리고 내가 너희를 죽일 거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너희 일족 전 부 내가 멸한다.”
이건 나의 각오이자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그 기다란 목. 잘 닦고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시스는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나를 내려보았다.
[……어처구니없는 놈이 이 세계에 넘어왔군.]
이내 녀석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 다.
동시에 폭풍과도 같은 거대한 바람 이 주변에 크게 휘몰아쳤다.
[혼돈의 씨앗이여.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운명과 자격이 없으니 이만 물러나겠다.]
카시스는 점점 하늘 위로 높게 떠 올랐다.
[모든 운명이 그분에게 쌓이는 순 간, 네놈을 찾아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카시스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녀석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쉬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왕이시여.”
목소리의 주인은 하령이었다.
S등급의 마인답게 카시스의 마력에 도 잘 견딘 모양이었다.
“방금 대화. 모두 들었습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화 역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저번에 물었을 땐 말을 돌렸었는
데,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걸 털어놓 을 수밖에 없었다.
“들은 내용 그대로야. 재앙급 마수, 크루아스가 나를 노리고 있어.”
하령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 혼돈......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왕께서는 혼돈을 지니고 계신 겁니까?”
예언의 왕의 측근이었던 하령은 그 에게 세계의 법칙에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과거 진천우의 계획과 관련하여 내 게 몇 가지 정보를 주기도 해주기도 했었으니까.
“맞아.”
내 말에 하령의 두 눈에 깊은 혼 란이 깃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 듯 중얼거렸다.
“초대 왕께서 말씀하셨던 혼돈이 바로……
그때 였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어디선가 터지는 소란에 모두의 시 선이 그곳을 향했다.
인간의 마력.
협회의 요원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 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카시스의 등장으로 인해 드러 난 마력을 감지해 협회가 조사팀을 보낸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시스의 마력에 휩쓸린 마인들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
이대로 가다가는 협회와 마주치게 될 터.
“내가 시간 끌 테니까 모두 데리고 은신처로 복귀해.”
“……왕이시여?”
선화가 나를 불렀다.
“무리 안 할 거야. 그리고 저 정도 는 혼자서 감당 가능해.”
나는 산 너머에서 느껴오는 마력을 느꼈다.
숫자는 총 12명.
그중 S등급의 마법사는 단 하나뿐
이다.
저 정도라면 [달의 가히가 없어도 시간을 끄는 정도는 쉽게 할 수 있 다.
“왕이시여. 그럼 저라도 남아서 돕 겠습니다.”
“됐어. 계승식 때 내 능력 못 봤 어?”
그 말에 선화는 할 말을 잃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화는 이내 주변에 정신을 잃은 마인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요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 잘됐네. 해야 할 일이었 는데.”
마법사 협회 최상층, 회장실.
정보팀 팀장 양지태가 김진철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동해 부근에서 감지되었던 용의 마력이 사라졌습니다. 아쉽게도 추 적에는 실패했습니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출현한 위치가 뜬금없기도 했고.”
김진철은 정말로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 쿨한 반웅을 보였다.
신경 쓰지 않았다기보다는 기대조 차 하지 않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양지 태가 말했다.
“그보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사뭇 조심스러워진 양지태의 어조 에 김진철이 의문에 찬 눈으로 시선 을 돌렸다.
“뭐냐?”
“용의 마력이 감지된 장소에 김선 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 김선우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김진철 은 처음으로 동요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게......
양지태가 말끝을 흐렸다.
“혼자서 모든 요원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마인의 상징인 폭주 화를 사용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말이죠.”
“폭주화라…… 이거 또 난리가 났 겠군.”
“네, 이 일로 협회 내부에서 김선 우가 마인이라는 의견이 확신에 가 까워지고 있습니다.”
“쯧. 결국 녀석도 인간성을 잃어가 는구만.”
“......네?”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지금의 김진철은 다른 협회의 요원 들에게 김선우가 인간이라는 것을 설득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고집 강한 노인네 취 급일뿐일 테니까.
“그래.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라.”
김진철은 그렇게 말하며 창가를 향 해 뒤를 돌았다.
“……회장님. 전달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양지태의 목소리 에 김진철은 다시 뒤를 돌았다.
“또 있어?”
“네. 김선우가 요원들과의 충돌 이 후, 회장님께 전달하라고 메시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웅? 김선우가? 내게?”
예상치 못한 말에 김진철은 눈을 깜빡였다.
“걔가 무슨 말을 남겼는데?”
양지태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한 달 내로 크루아스가 서울을 침공할 거니 잘 부탁한다 고……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