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화
구름 속에 숨겨져 있었던 보름달이 떠오르고, ‘달의 섬’ 전체에 검은 마 기가 연기처럼 짙게 피어올랐다.
이내 검은 마기가 서서히 한 곳에 뭉쳐지더니 중앙에 선 남성, ‘왕’을 중심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지상의 모든 마인은 경악에 찬 눈
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폭주화의 전조를 보이며 검게 물들 기 시작하는 눈동자.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패악적인 마기…….
우스갯소리로 최약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는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홀로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마인회의 옛 장로들은 눈앞 의 ‘왕’을 바라보며 상황이 잘못 흘 러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왕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크게 특별하지 않 았다.
일반적인 마인보다 강한 힘을 가지 고 있는 건 분명하나, ‘왕’의 힘이라 고 부르기에는 분명 보잘것없었으니 까.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순간에 존재감이 폭발하더니 전대 왕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압도적인 힘을 보 이고 있었다.
“컥!”
그때 장로, 하신의 얼굴이 새하얗 게 질리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왕의 육신에서 뿜어져 오는 강렬한
존재감이, 그의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큭, 크억!”
하신은 괴로운 소리를 내뱉으며 천 천히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서든 왕의 기운으로부터 벗 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둘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있었다.
모든 마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하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마인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 했다.
“……와, 왕이시여!”
결국 이대로 놔둘 수 없었던 장로 하나가 다급하게 왕을 불렀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공손한 말 투...
하지만 안중에도 없다는 듯 왕은 무릎을 꿇은 하신을 가만히 내려볼 뿐이었다.
“다시 묻겠다. 내가 왜 너의 인정 을 받아야 하지?”
목숨의 위기를 느낀 하신은 곧바로 그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왕의 마기에 의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억울함이 가득 한 눈으로 왕을 올려보았다.
“와, 왕, 이, 시여……
“……왕이시여! 부디 자비를!”
다른 장로가 다시 한번 왕에게 외 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닿 았는지 왕은 고개를 들어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장로는 등골이 서늘 해짐을 느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시선.
그 모습은 과거 2대 왕을 처음 보 았던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두려움이 그의 정신을 사로잡았지 만, 그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 안목이 미천하여 저희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왕이시여. 부디…… 부디 자비를……
장로의 계속되는 외침에 왕이 입을 열었다.
“너희는 분명 나를 해하려 했다.”
그 말에 해명하려 했으나 왕이 먼 저 말을 이었다.
“만약 너희의 생각대로 내가 보잘 것없는 힘을 가졌더라면 내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했겠지.”
“그, 그건……
“이제 와서 발땜하려 해도 소용없다. 철저하게 약자만을 짓밟는 너희 의 비열함은 이미 알고 있으니.”
장로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이 자 리에 있는 모든 마인에게 하는 경고 이기도 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마인의 특성.
마인이라는 종족 전체를 꼬집는 것 이었다.
“내 실수다. 너희가 강자에게 굴복 하는 놈들이라는 걸 미리 인지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말과 동시에 왕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마기는 오른쪽 눈을 넘어, 그의 왼 눈까지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하신을 압박하던 기운 은, 자리에 있는 모든 마인에게 영 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두려움에 찬 눈으로 가만히 있던 장로들도 숨통이 조여옴을 느 끼며 괴로워했다.
“……왕이시여.”
그렇게 모두가 왕의 폭주에 고통을 호소하던 그때.
나지막이 하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고개를 돌려 하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도적으로 하령에게 영향이 없도 록 마기를 제어했지만, 그 역시 왕 의 마기에서 있기 벅찬 듯한 얼굴 이었다.
“……주제넘게 말씀드리지만 이쯤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왕은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장 내부의 있는 모든 마인이,
공포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이시여.”
그리고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선화 역시 나지막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왕은 그 둘을 바라보고는 잠시 입 을 다물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스으으으...
공간 전체를 압박하던 살벌한 마기 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게 물들었던 왕의 두 눈도 원래 대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겨우 숨통이 트인 하신은 침을 흘 리며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다른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령은 그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왕께서 자비를 베푸셨지만 두 번 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하신이 떨리는 눈으로 왕을 올려보았다.
이전에 담겨있던 오만함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공포심과 두려움 이라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하신은 벌벌 떠는 움직임으로 상체
를 일으키고는 왕을 향해 한쪽 무릎 을 꿇었다.
왕에게 충성을 표하는, 마인의 전 통적인 자세였다.
“……왕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 셔서 감사합니다.”
한충 공손해진 말투.
하신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인사드리겠 습니다. 대장로 하신이 위대하신 일 족의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동시에 하신을 따라 모든 마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하령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왕은 전대 왕 들과 비교해, 허술한 모습이 없잖아 있었다.
분열된 마인 사회를 다시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과 의심도 없잖아 있었고.
2대와 달리 3대는 자신의 의지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쓸데없는 걱 정이었다.
3대는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받아 들였고, 적응했다.
또한 위기가 찾아오자 어떻게 행동 해야 할지 한순간에 파악해 모두를 압도하며 ‘왕’。] 누구인가를 중명해 보였다.
지금 그의 눈에는 3대의 모습이 오래전 자신이 충성했던 초대 왕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확신이 생겼다.
지금의 왕은 충성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하령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는 말했다.
“상황이 정리됐으니 이제 계승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왕의 자격 중명’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한계 초월’ 업적을 달성합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수많은 마인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보상으로 10,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미래의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인과율이 1 상승합니다.]
한차례 사건이 지나가고.
계승식 준비를 하면서 방금 획득한 보상을 확인했다.
2만 포인트와 인과율 1.
잠깐 사이에 나름 만족스러운 보상 을 획득했다.
방금 일로 생긴 모든 피로가 한순 간에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잘 풀렸네.’
유적지 위에서 나는 야외 연회장을 내려 보았다.
아까의 냉소적인 분위기는 온데간
데없이 사라지고 다소 진중한 분위 기로 바뀌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란에 모두가 긴장감 을 느끼게 된 것이겠지.
나는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내게 적의를 보이던 하신…….
사실 죽이려면 죽일 수 있었다.
마인 사회가 혼들리고 그 중심에 선 내가 얕보이는 지금.
본보기를 보인다 해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이후 마인들의 반 응도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2대 왕과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아서였다.
공포 정치는 모두를 하나로 단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누군가의 원한을 사기도 쉽다.
내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 라면 모를까, 신입 왕인 내가 모든 마인의 존경을 받는 하신을 죽이게 된다면 크게 혼들릴 수 있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유로는 하령과 선화가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있
마인의 정치는 나보다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 그들의 의견을 수렴 해 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어찌 됐든 초장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오버하기는 했는데 결 과가 좋아 만족스럽네.
“……그나저나 신기하네.”
나는 마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벽에 둥을 기댔다.
방금 달의 가호와 폭주화가 동시에 발동하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단순 계산으로 8
배에 가까운 힘을 얻었으니까.
“.…”뭐지.”
달의 가호로 얻는 능력치는 4.4배.
그리고 부분 폭주화로 얻을 수 있
는 능력치는 최대 2배였다.
합 연산이면 6.4배의 능력치가 올
라야 정상일 텐데.
“……설마 곱으로 오르는 건가?” 하지만 곱이라고 하기에도 정확한
수치가 맞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른 이상한
점도 떠올랐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폭주화
의 이성 유지가 전보다 훨씬 잘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폭주화’가 ‘달의 가호’를 이기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고 해 야 할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평소에는 폭주화의 강력한 마기가 나를 강제로 집어삼킨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마기 잠식도에 따라 생기는 마력 탈진 현상도 없이 멀쩡하고.
이러고 있으니 내 안에 여러 개의 자아라도 있는 것 같네.
특성끼리의 힘 싸움이라니.
순간 어이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 한 가지 사실을 알 게 되었다.
달의 가호가 발동된 상태에서는 폭 주화를 훨씬 더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큰 호재이다.
“왕이시여. 시간이 됐습니다.”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데 하 령이 내게 다가왔다.
……드디어 시작인가.
계승식.
단순한 의식에 불과하지만 괜한 긴 장감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의식은 아닌가?
선화의 말에 의하면 권능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 흐음......
어떤 권능을 얻게 되려나.
초대와 같은 예언? 불사?
여러 추측이 떠올랐지만, 당장 준 비해야 하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혹시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계승식
의 절차는……
“됐어. 기억하고 있으니까.”
계숭식의 절차는 크게 복잡한 건 없어 확실하게 외우고 있다.
하령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고개 를 끄덕였다.
이후 하령이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계승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동시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지 며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하령을 따라 이동했다.
계승식의 절차는 단순하다.
이곳, ‘달의 유적지’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 [달의 제단] 앞에 선 다.
이후 제단 위에 놓여진 성유물, 피 의 잔에 나의 피를 따라 마시면 되 는 것이다.
나는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계단 을 향해 걸어갔다.
양옆으로 의복을 차려입은 수많은 마인이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내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화
려한 술식의 빛이 화르륵 타오르며 어둠 속을 밝혔다.
계단 앞에 도착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달의 제단을 올려보았다.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마인의 왕이 되는 게 맞는 걸까, 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 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게 돌아갈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 고.
……에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마인의 왕 같은 게 되어 버릴 줄 은 생각도 못 했는데.
문득 마법사관학교에 남은 주요 등 장인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서준, 윤하영, 신영준, 유아라. 그리고 최서윤…….
그들이 내게 보였던 호의. 그리고 함께 한 추억들이 계속해서 머릿속 에 떠올랐다.
씁쓸한 감정과 동시에 고마움과 미 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적대감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 고.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그렇게 한 발짝 올라설 때마다 유 적지 특유의 신성한 기운이 퍼져나왔다.
처음 느껴보는 신비한 현상에 신기 함을 느끼며 나는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지는 긴 계단을 올랐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