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깊은 어둠이 드리운 도심 속에 있 는 어느 빌딩의 최상층.
김선우와의 비밀스러운 만남 이후, 하령은 넓은 창가의 지상을 내려보 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선우.”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만남을 가졌 던 김선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김선우의 비밀 몇 가지를 알아냈지
만, 그 비밀에 의해 새로운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때 뒤에서 위스키를 따라 마시던 선화가 물었다.
하령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뭘 말이지?”
“김선우 말이야. 믿을 수 있겠냐 고.”
김선우는 오늘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희가 증오하는 ‘왕’을 죽여줄 테
니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라고.
계획은 단순했다.
왕에 대한 정보를 협회가 알 수 있도록 은밀하게 외부에 발설하는 것. 그리고 예언의 아이가 ‘김선우’ 라는 것을 왕에게 확실하게 각인시 키는 것.
“김선우가 보였던 왕에 대한 적개 심은 진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행 동으로 증명했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아니, 김선우가 ‘왕’ 외의 마인에 게 악감정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냐고.”
김선우의 말에 의하면 그는 ‘왕’과 그의 충신들의 토벌에만 성공한다면 더이상 마인을 건들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그 말은 즉 왕의 죽음 이후, 마인 세계의 장악권…… 그러니까 새로운 ‘왕’의 자리를 자신들에게 넘기겠다 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 잖아. 아무리 예언의 아이라고 해도 그렇지, 우리 일족에는 아무런 감정 이 없는데 ‘왕’의 죽음만을 원한다 고?”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마인에 그 어떤 악감정도 없는 김 선우가 왜 굳이 왕을 죽이려는 것일 까?
“……왕에 대한 중오라.”
하령은 머릿속에 홀어진 퍼즐 조각 을 맞추기 시작했다.
김선우.
19살 답지 않은 압도적인 강함, 예 언의 아이, 왕에 대한 악감정, 진천 우에 대한 관심…….
그분과 같은 예지 능력.
그리고…….
“……초재생능력.”
“옹?”
“김선우는 어떻게 초재생능력을 사 용할 수 있는 거지?”
이것이 가장 의문이었다.
초재생능력, 그것도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재생하는 능력은 마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초재생능력 은 우리 일족의 능력이잖아.”
“……정말로 인간이 맞기는 한 건 가‘?”
“그게 무슨 소리야? 김선우가 마인 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선화의 물음에 하령은 대답하지 않 았다.
그가 본 김선우는 분명 마인의 마 기가 아닌 인간의 ‘마력’을 사용하 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선우와 관련된 단서를 조 합하다 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김선우는 자신의 주군인 예언 의 왕과 모종의 비밀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허무맹랑한 가설이지만 만약 이 가 설이 맞다면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
문이 해결되기는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압도적인 강 함.
일족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았지 만, 현재의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이 유.
또 예지 능력과 초재생능력을 갖고 있는 이유와 진천우를 쫓는 이유까 지.
“김 선우……
하령은 그를 떠올릴수록 자꾸 오래 전에 죽은 자신의 주군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령의 머릿속은 점차 김선우에 대한 의문으로 복잡해 져
갔다.
[미래의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인과율이 1.0 상승합니다.]
[세계의 거대 세력들이 당신을 주 목합니다.]
[‘혼란의 중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10,000포인트를 획득합
니다.]
“......뭐야?”
하령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옴과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인과율과 포인트의 상숭.
인과율은 그렇다 치더라도 갑작스 레 달성한 업적의 이름이 심상치 않 았다.
“……혼란의 중심? 협회, 자운 마인. 모든 세력에 주목을 받아 달성 된 건가?”
어째 1만 포인트를 얻었다는 기쁨 보다는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게 만드는 업적이다.
뭐 세계에 개입할수록 이렇게 될 운명이기는 했지만.
“그레텔, 나 왔어.”
메시지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누워 쿨쿨 잠든 그레텔의 모 습이 보였다.
앞에서는 영화 채널이 틀어진 티비 가 켜져 있는데 보다가 중간에 잠든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레텔을 보며 작게 미 소를 지어주다가 티비를 껐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거실.
나는 그레텔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 러운 움직임으로 소파 앞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고는 필기 노트를 하나 꺼내 펼쳤다.
최근 알게 된 정보나 법칙들이 많 고 복잡해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 해볼까.”
그렇게 15분 정도 노트를 끄적였 을까. 필기를 멈추고는 오늘 정리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1. 세계의 법칙이란 세계에 속한 자들이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게 되는 법칙이다.
2. 나는 세계에 속하지 않은 외부 자이기에 정해진 운명 없이 내 의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3. 내가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바 꾸고, 세계에 간섭할수록 다른 사람 들도 ‘자유’의 일부를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아주 기본적인 설정이 며 알게 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몇 번 확인했던 결과들이기 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오늘 하령으로부터 추가로 알게 된 내용이었다.
4.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은 혼란과 파멸을 막기 위해 세계가 만 들어 낸 법칙이며, 해로운 것이 아 니다.
나는 지금까지 세계의 법칙이 사람 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종의 족쇄 라고 생각했다.
법칙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은 나 를 보며 부러워했고, 내 생각에도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썩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그 다음 줄을 읽었다.
5. 세계의 법칙에 속하지 않은 ‘외 부자’는 세계에 개입할수록 세계의 법칙을 무너트린다.
6. 세계의 법칙이 무너지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세계는 거대한 혼 란과 파멸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나는 멍하니 6번의 문장을 바라보 았다.
하령과의 만남 이후, 나를 가장 혼 란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이 6번이 었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세계에 해 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으니까.
“……근데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세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가만히 있으면 이서준이 죽을 가능성이 높 고.
그렇다고 내가 나서면 세계의 법칙
이 무너지며 세계가 혼란에 빠질 가 능성이 높다고 한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어이가 없네.”
그렇게 다시 문장을 살펴보는데 문 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내 용.
이거 설마 저번에 들었던 내 업보 청산이랑 관련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재앙급 마수의 임무가 세계의 법칙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라 했는데.”
원작보다 크루아스의 등장 시기가 빨라진 이유…….
그리고 크루아스가 사람들에게 말 했던 ‘심판’의 의미.
“……설마 나를 노리고 있는 건 아 니겠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루아스의 역할을 생각했을 때 충 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세계의 법칙을 어지르는 존재는 나 밖에 없었으니까.
“뭐, 이서준을 노리는 것보다야 낫 기는 한데……
문제는 크루아스가 나를 노리는 게 맞다면 녀석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 느냐는 거다.
나는 아직 약하다.
1, 2년 사이에 크게 성장하긴 했지 만 아직은 [달의 가히가 없으면 S 등급 마법사도 쉬이 상대할 수 없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그 렇게 넓지 않다.
“베스트는 김진철이 그전에 먼저 크루아스를 토벌해주는 건데.”
하지만 협회의 소식에 의하면 크루아스는 완전히 기척을 숨겼다고 한
즉, 김진철의 크루아스 토벌을 당 장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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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신경 쓸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네.
‘왕’이 토벌된 이후 그 자리를 누 가 계승할지도 중요할 거 같고.
내가 생각했을 때 하령이 적임자라 생각하지만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는 모르지.
“에휴.”
할 일이 태산이다.
뭔지도 모르는 업보 청산이 끝나면 조금은 나아지려나.
그렇게 씁쓸한 얼굴로 노트를 살펴 보다가 옆에서 쿨쿨 잠든 그레텔에 게 시선을 돌렸다.
“……웅애.”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잠꼬대 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무언가 마음에 위 안이 들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짓고는 그레텔의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 스마트폰에서 메시지 알
람이 울렸다.
[미안해요. 최근 신경 쓸 일이 많 아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T T.J
한세연에게 온 메시지였다.
최근 연락이 뜸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사이 메시지 가 하나 더 도착했다.
[아! 그리고 그레텔의 나뭇잎과 나 뭇가지로 만든 포션의 샘플 나왔어
요. 다음 주쯤에 한 번 봬요.]
“벌써 샘플이 나왔구나.”
그레텔의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만 든 포션이라…… 뭔가 기대되는데.
나는 슬쩍 그레텔의 머리에 달린 열매로 시선을 돌렸다.
탐스럽게 거의 다 익은 열매.
본능적으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내일이나 내일모레쯤에 따면 좋을 거 같은데.
그레텔의 영약과 한세연의 제약 능 력이 합쳐지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
올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열매 위로 먼지 같은 것이 살짝 쌓인 것이 눈 에 들어왔다.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런 게 있으면 안 되지.”
그렇게 열매의 먼지를 살짝 털어내 려는 그때.
뚝.
열매가 그레텔의 머리에서 떨어지 더니 바닥을 통통 굴렀다.
“......어?”
그리고 동시에 그레텔이 몸을 움찔
거리며 눈을 떴다. 그러면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본다.
“응애?”
화를 내지 않을까 순간 긴장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열매가 떨어진 지 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거 땡잡았네.
나는 슬그머니 열매를 아공간 안에 챙겨 놓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레텔 피곤한 데 더 자고 있어.”
[신비한 마계수 열매(S)]
분류 : 영약
설명 : 복용 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마계수의 가호(S)]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흐음.” 금요일 방과 후.
빈 마법사관학교 도서관에서 술식 공부를 마치고, 그레텔의 열매 효과 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조금 특이한 효과를 가진 열매가 생겨났 다.
바로 S등급의 스킬인지 특성인지 모를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영약이 었다.
“……마계수의 가호라.”
정확히 어떤 능력이 숨겨져 있을지 는 모르겠지만 S등급인 만큼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외부자의 혜택을 살펴보면 효
과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상점에는 웬만한 특성과 스킬은 다 파는데 이건 의외네.
“흐음. 그레텔과 연관 있는 능력인가?’
당장 섭취해서 알아내고 싶었지만, 열매 효과의 중폭을 위해 한세연에 게 맡기기로 한 상황.
아쉬운 점은 약속이 다음 주로 미 뤄져 열매 또한 바로 섭취할 수 없 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기다리면 훨씬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 참아야지.
나는 열매를 아공간 안에 넣어두고 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방과 후 저녁 7시라 원래라면 텅 비어있을 복도.
하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태 휘제의 준비로 학교 분위기는 시끌 벅적했다.
각자 반끼리 모여 무언가를 준비하 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이고, 또 공 연이나 요리 연습, 구현 예술 대회 를 준비하는 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바로 그때.
—태, 태휘! 덤. 벼. 라!
어디선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외 침이 들려왔다.
순간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 가 창틈 사이를 보자 한 손에 대본 집을 들고 떠드는 유아라와 그 앞에 앉아서 무언가 코치(?)를 하는 윤하 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라야. 조금 자연스럽게 해봐.
—으응, 나는. 죽음의. 마녀. 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어이없는 웃 음을 흘렸다.
“……와. 진짜 연기 더럽게 못 하 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