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김진우와 헤어진 뒤.
한세연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둡고 고요한 거실.
한세연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외로움을 느끼다가 작은 실내 둥을 켰다.
그 뒤 주방으로 걸어가 물 한잔을 따라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술기운에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김진우의 앞에서 술 취해 흐트러졌던 자신의 행동들이 떠올랐다.
순간 강한 부끄러움이 올라오며 창 백해졌던 그녀의 양 뺨에 열기가 올 라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세연은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손 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큰 실수는 안 해서 다 행이네.”
평소 술이 강한 편이라 다행이었
아마 평범한 주량을 가진 사람이었 다면 과음에 그대로 필름이 끊기고 온갖 추잡한 행동을 보였겠지.
“후우.”
한세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로 걸어가 몸을 던지듯 드러누 웠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오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진우 씨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 어요.
술기운을 빌려 용기내어 한 말에 생각에 잠기던 김진우.
김진우는 어딘가 씁쓸해하면서도 갈둥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 기는가 싶더니 내게 말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말할 수 없다 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어떻게 보면 당시 김진우가 했던 말은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세연은 그 말에 숨은 진 심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됐든 김진우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 특별한 사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김선우.”
한세연은 몸을 일으키고는 테이블 위에 복잡하게 늘어진 마법사관학 교, ‘김선우’의 서류를 확인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진 속 얼굴이 김진우와 너무나도 닮았다.
다시 한번 궁금해진다.
‘김선우’와 ‘김진우’.
둘 중 어느 신분이 그의 본 모습 일까?
두 개의 신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중 하나는 만들어진 신분 일 텐데…….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으 려나.”
한세연은 테이블 위에서 다른 서류 를 꺼냈다.
복잡한 술식이 그려진 사진.
김진우가 보내준 김창현이 조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술식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성가에 소속된 신비 학자들의 개인 해석과 소견이 적혀 있었다.
한세연은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다른 차원의 영혼. 그리고 통 로……
너무 생소한 분야라 봐도 봐도 잘 모르겠다. 마법이나 신비도 아니고 차원이라니.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 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 유명한 차원 학자의 명함을 받았었는데.
한세연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깜깜한 가을의 밤.
한세연과 헤어진 나는 ‘김선우’의 모습으로 마법사관학교로 향하는 길 을 혼자 걷고 있었다.
기대했던 술자리. 좋은 상대와 고 급술이 함께 했음에도 기분이 썩 좋
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한세연을 속이고 있었다 는 생각에 괜한 미안한 감정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한세연 역시 나에 대해 많은 의구 심과 섭섭함을 갖는 것 같았고.
“……설마 내가 김선우인걸 눈치챈 건가?”
최근 ‘김선우’의 신분으로 한세연 과 이것저것 엮이기는 했다.
특히 부유섬에서 김선우의 신분으 로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었으니까.
눈치 빠른 한세연이라면 의심을 느 끼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근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한세연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의향 은 있다.
언제나 내게 깊은 신뢰를 보였던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라 생각하니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제약’이 있 는 상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어 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부터 말해줘야 하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어 느덧 마법사관학교에 도착했다.
밤 11시의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학교 내부는 인적이 없어 허전했다.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학교의 풍경을 눈에 담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마력 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아뇨. 상상력을 더 써야 해요. 얼음 속성은 상상력이 80%라.
공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천
천히 그곳으로 걸어가자 윤하영과 최서윤이 벤치에 앉아 마법을 사용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해볼게.
쩌저적一
윤하영의 손 위로 구현되는 얼음의 화살.
그것을 본 최서윤이 그녀에게 세세 하게 피드백을 해준다.
보아하니 마력 활용 능력 테스트를 대비하기 위해 최서윤이 훈련을 도
와주는 것 같은데.
……뭔가 기특한데.
2학년 1위이면서 같은 얼음 속성 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후배에 게 배운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 을 텐데.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끼어서 도와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셨으니 자제해야겠 지.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위해 슬그머 니 다시 빠져나오려는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나를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자 최서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윤하영 역시 둥글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지나가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어, 훈련하고 있었나 봐?”
“네, 근데 선배님 방금 오신 거예 요?”
최서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밖에 볼 일 마치고 왔는데, 생각
보다 늦었네.”
이번에는 윤하영이 물었다.
“무슨 약속인데 이렇게 늦게 와?”
“그런 일이 있어.”
작게 웃으며 나는 슬쩍 뒷걸음질했다.
“아무튼, 피곤해서 이만 가볼게. 수 고해.”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는 그때 최서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게 다가왔다.
“선배님, 잠깐 윤하영 선배님 마법 한번一.”
그때 최서윤이 스스로 말을 잘라냈 다.
그러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자신의 코를 잡았다.
“……술 냄새.”
그리고 어느새 내게 다가온 윤하영 도 ‘윽!’ 하며 내게서 떨어지더니 코 를 잡았다.
그 모습에 나는 내 몸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저렇게까지 기겁할 정도로 냄새나 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선우야. 너 술 마셨어?”
“내가 마신 건 아니고 어른이 한잔 하라며 준 건데. 그러다 보니 거절 하기 쉽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횡설수설한 설명에 신뢰가 없었는 지 나를 향한 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떤 어른이 학생한테 술 냄새가 옷에 다 밸 정도로 줘요? 진짜 못 된 사람이네.”
“그러게. 누구랑 마신 거야? 길드 미팅 같은 거야?”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흠. 그건 비밀이고. 마법이나 봐줄게. 한번 보여줘 봐.”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네. 누구랑 마신 건데?”
윤하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있어. 그런 사람.”
하지만 나도 말해줄 생각은 없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윤하영이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쳇. 알았어. 그럼 마법 보여줄 게.”
그러고는 손바닥을 펼쳤다. 이내
그녀의 손바닥 위의 공기가 얼어붙 으며 얼음의 화살이 되었다.
하지만 오후 방과 후 훈련 때와 형태가 크게 다르진 않다.
“봐봐. 네가 봐도 형태가 불안정한 게 보이지? 아까 내가 봐줄 때보다 도 더.”
“웅......
윤하영이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훈련 중 혼났던 것을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미소 를 지어주었다.
“너무 열심히 훈련해서 그래. 상상
력이 바닥난 거야.”
상상력은 소모품과 같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다.
그리고 내 말이 의외였는지 윤하영 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쉬어. 훈련한 게 있으니 내일은 훨씬 좋아질 거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선선했던 가을도 거의 끝나가고 한 기가 느껴지는 초겨울이 다가왔다.
교복만으로는 추위를 버티지 못하 겠는지 간간히 패딩이나 코트를 입 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춥다 추워.”
“……진짜 바빠 죽겠네.”
“그러게. 2차 중간시험은 그냥 빼 주면 안 되나.”
3학년들 사이에서는 곡소리가 터져 나오는 중이다.
프로 마법사 자격증 시험부터 시작 해 2차 중간시험까지 생각해야 하는 혹독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 문이다.
거기다 이력서 작성과 각종 마법 활동으로 스펙 쌓기까지.
다행히 학교에서도 3학년들의 혹독 한 일정을 알고 있기에 2차 중간시 험의 난이도와 성적 비중을 많이 낮 춰주는 배려를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기초 마법 급수 평 가를 시작하겠습니다. 평가는 총 네 가지. 마력 활용, 웅급 구조, 술식 해석, 마수 토벌 해제를 봅니다.”
그리고 오늘.
프로 마법사 자격증 시험의 자격을 위한 마법 급수 시험이 시작되었다.
서울 마법사 협회의 거대한 강당에
마법사관학교 학생을 포함해, 재평 가를 받고 싶은 마법사, 무소속 예 비 마법사. 그리고 국내의 다른 마 법 학교 학생들이 가득 모였다.
옷에 숫자가 적힌 번호표를 붙인 채.
내 옷에는 4번이라는 번호표가 적 혀 있다.
—이야. 멤버 봐라. 이번 시험은 볼 맛 좀 나겠네.
—그러게. 실력 궁금했던 애들 많 았는데, 오늘 볼 수 있겠네.
―누가 제일 기대 돼?
단상 위의 난간에서 심사위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이서준이지.
그 말에 저 멀리 신영준과 함께 서 있는 이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가슴에는 62번이라는 번호표 가 달려 있었는데 밝게 웃으며 수다 를 떠는 모습을 보아하니 긴장감이 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래? 난 김선우인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김선우보단 이서준이지.
—뭐래냐? 얘 진짜 볼 줄 모르네. 둘이 1:1 대련하는 거 못 봤냐?
—대련이랑 실전은 다르지.
심사위원들은 나와 이서준을 비교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종종 일어나던 다툼(?) 이라 신경을 끄려는 찰나, 다른 심 사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저기 206번이 기대되는데.
-206? 아, 유성진?
유성진이라는 이름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내 시선의 끝에는 갈색 머리로 염 색한 젊은 남성이 크게 하품하고 있었다.
—쟤도 기대되긴 하더라. 혼자서 달빛 흑곰을 잡았다며. 출신도 불명 이던데.
—어, 심지어 마법도 독학으로 배 웠다더라.
—독학 그걸 믿냐? 구현하는 거 보면 겁나 체계적으로 배웠더만.
유성진. 21살.
기초 마법 능력 평가 이후, 나중에 진행될 ‘프로 마법사 자격증 시험’ 에피소드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 는 새로운 등장인물이다.
참고로 선역은 아니다.
유아라만큼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 어 나중에 자운에 합류하게 될 예비
빌런이거든.
아니, 지금 녀석의 스승이 진이랑 나타샤니까. 이미 빌런인가?
그렇게 녀석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유성진의 시선 이 나를 향한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녀석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리고 심사위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첫 번째 기초 평가인 마력 활용은 각자의 주특기에 맞춰 평가합니다. 강화계는 마력 강화의 강도. 발현계 는 구현의 형태와 디테일을 봅니
다.”
“선우야. 나 잘할 수 있겠지?”
그때 옆에서 윤하영의 떨리는 목소 리가 들려왔다.
“잘할 거야. 준비 많이 했잖아.”
내 말에 힘을 얻었는지 윤하영의 딱딱한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괜히 나까지 긴장된다. 떨지 말고 잘해야 할 텐데.
“그럼 바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하는 분은 앞으로 나와주시 길 바랍니다.”
심사위원이 서류를 보며 말을 이었
“이민주, 박혁, 김민아 그리고…… 김선우.”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 한다. 왠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나 는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갔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