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뭐야. 얘 어디 갔어?”
호텔 12층의 복도.
룬의 일족을 쫓던 베르트가 발걸음 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황당 함이 가득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코앞에 있던 녀석 이 옆의 통로로 방향을 틀더니 감쪽 같이 사라졌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어디로 도망친 것 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길은 없는 거 같은데.”
호텔의 복도는 일자로 이어져 있 다. 다른 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면 숨을 공간이 없었다.
화장실이나 휴게실 같은 공간도 확 인해 보았지만, 텅 비어있는 건 마 찬가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게 이럴 때 하는 말일까?
누군가를 추적하다가 이렇게 허무 하게 놓치는 건 처음인데.
“마력이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방법이 없네……
베르트는 입술을 깨물고는 뒤를 돌 았다.
그곳에는 룬의 일족의 기습 공격에 당해 어깨의 피를 뚝뚝 흘리는 백은 성이 서 있었다.
“다친 곳은 괜찮아?”
“아니, 겁나 아파.”
백은성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 얼거렸다.
베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꼴 좋다. 그러니까 누가 방심하 래?”
“마력이 안 느껴지는데 몰래 마법
을 구현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고. 그리고 거리도 너무 가까워서 피하기도 힘들었어.”
“……뭐, 그렇긴 하지.”
상대의 수준이 낮았다면 가까운 거 리라도 피하거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리 못해도 A등 급 이상의 마법人}. 그중에서도 최상 급의 실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 거리에서의 기습을 피하는 건 아무리 자운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쩔 거야? 코앞에서 놓쳐 버렸는데. 이대로 포기할 거야?”
백은성의 물음에 베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분’의 부활을 위한 재료인 블러 드 크리스탈의 회수에 실패해 아쉽 긴 하지만, 대체품은 얼마든지 있기 에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룬 의 일족 녀석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아내는 것이었다.
베르트는 생각에 잠기다가 물었다.
“김선우가 몇 호였지?”
“802호. 이서준이랑 같은 방을 쓰 고 있어.”
“802호……
지금 당장 802호로 달려간다면 룬 의 일족 녀석이 김선우와 동일 인물 이라는 중거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도박이다.
이미 자신들은 너무 큰 소란을 일 으켰다.
얼마 안 가 호텔의 보안요원들과 협회의 마법사들이 들이닥칠 터.
“……쳇.”
베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녀석에게 또 당해버렸다. 이전과
다르게 눈앞에서 마주쳤음에도 불구 하고 말이다.
심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확 증이 없으니 답답함만 늘어간다.
—12충에서 소란이 일었다고?
—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보이는데, 숙객 분들께도 알려드려 야 할까요?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밑에 층에서 올라오는 호텔 보안요 원들의 목소리였다.
베르트는 복도 끝에서 자신들의 모 습을 찍는 CCTV를 올려보았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자운을 따돌린 나는 창문을 통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가슴이 아직도 두근두근 떨린다.
눈앞에서 마주한 베르트와 백은성. 녀석들이 나를 향해 품고 있는 분노 의 감정을 잘 알고 있기에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다행인 점은 마력 은폐 비약의 효 과 덕에 기습이 성공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된 추격전 을 벌였더라면 녀석들에게 따라잡혔 올 것이다.
내가 녀석들에게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모두 최일현에게 배운 [공간 도 약] 덕분이었다.
“......후우.”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는 무형의를 잠자기 전에 입던 편안한 복장으로 바꾸었다.
나를 의심한 자운 녀석들이 이 방 에 침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뒤 블러드 크리스탈을 아공간에 넣어두고는 천천히 침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때.
—꺄아아악!
—뭐, 뭐야? 안에 사람이……
—이게 무슨…… 살인 사건인가?
문밖에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호텔의 보안요원이 12충의 참혹한 현장을 발견한 모양이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서준은 그 소란을 느꼈는지 몸을 뒤척이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 으음......
이내 몸을 일으키더니 창문 앞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나를 바라 본다.
순간 눈이 마주치고 약 3초가량의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이서준이었다.
“……김선우?”
“……어, 일어났냐?”
내 말에 이서준은 의문에 찬 표정
을 짓더니 물었다.
“……갑자기 시끄러워서. 근데 너 거기 서서 뭐 해?”
“아~ 잠깐 화장실 갔다가 추워서 창문 닫으려고 했지.”
탁.
창문을 닫았다. 이서준은 그런 나 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잠은 이미 달아났는지 눈빛이 또렷하다.
그때 다시 소란이 들려왔다.
—……누구야?
—……무슨 일 터졌나 본데?
“……밖에 무슨 일 있냐?”
이어 잠에 취해있던 신영준도 잠에서 깼다.
호텔의 방음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 훈련으로 감각이 단련된 탓 이었다.
타다다다닥.
그리고 밖에서 여러 발소리가 계속 해서 들려오자 심각성을 느꼈는지 이서준이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우리도 나가보자.”
그렇게 우리는 방문을 열고 나왔
우리와 같이 소란을 느끼고 나온 학생들과 투숙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12층에 사람이 죽었다는데?”
“..진짜?”
“어, 그중에 마인도 있대.”
이건용의 죽음이 생각보다 빠르게 밝혀졌다.
아무래도 자운과 추격전 중에 생겨 난 충돌이 원인인 듯싶다.
하긴 복도에서 그렇게 뛰어다니고 마법을 쏴댔는데 모를 수가 없기는
하지.
“서준이랑 선우다!”
그때 반대편 복도에서 우리를 부르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같은 잠옷을 입은 윤하영, 이현주, 유아라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네도 일어났나 보네.”
이서준의 말에 이현주가 심각한 표 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1206호에서 두 구의 시 체가 발견됐대.”
“두 구의 시체?”
이서준이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건용이라는 사람의 시체랑 마인 의 시체가 함께 있었다는데……T
마인의 시체라는 말에 이서준은 다 시 한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사건이 벌어진 12충에 올 랐다.
어느새 호텔 전역에 소문이 퍼졌는 지 일대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협회입니다. 지나가겠습니다.”
협회의 수사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건이 벌어진 시각을 생각하면 상 당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마인의 시체에 빛 속성이 검출됐 습니다. 형태는 발현계 구체입니다.
—빛 속성 구체?
—네, 그리고…… 같은 부위에 빛 속성과 다른 특이한 성질의 마력도 함께 검출됐습니다. 아마 빛 속성과 시너지로 사용한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전에 벌어진 마인 암살 사건에서 검출된 성질과 같습니다.
—……동일범이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시너지를 사용한 적은 없 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 윤하영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선우야.”
윤하영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혹시 마인 저거 네가 한 거야?”
윤하영이 속삭이듯 내게 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윤하영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다음 날 아침.
1206호에서 벌어진 미스테리한 사 건은 학생들의 SNS와 언론의 발표 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호텔은 협회의 수사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밝혔으며 CCTV에 범 인의 흔적이 남아 집중적으로 조사 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또 이동 경로를 CCTV가 없는 창문 위주로 움직였기에 흔적 이라고 할만한 건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트와 백은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남아 사람들의 관심은 그곳에 쏠리게 되었다.
「이건용을 살해한 마인의 정체는 세계적인 투자가로 알려진 유철로 밝혀졌습니다. 유철과 이건용은 어 제 제주 가을 축제에 있었던 신비 경매에서 ‘블러드 크리스탈’을 두고 마찰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만 유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도 미스테리로 남은 상태입니다. 또
한 두 사람이 마찰을 빗게 된 원인 이었던 ‘블러드 크리스탈’의 행방도 현재 알 수 없는 상황이며 협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유철을 살해한 용의자가 블러드 크리스탈을……」
[댓글]
[요즘 마인이 암살되는 사건이 자 주 일어나는 거 같네... 추천 : 8021 비추천 :17]
[내 생각엔 마인 암살한 거 전부 동일 인물이 한 거 같음. 추천 ; 5622 비추천 : 22]
亡[마인 암살 사건 시작이 작년 마
법사관학교 시험이라는 썰이 있던데 거거 이번에 거기 수학여행 장소가 그 호텔이라며? 추천 : 428 비추천 : 216]
[CCTV에 찍힌 게 자운 애들이라 는 썰도 있던디.. 추천 : 154 비추 천 : 15]
“……홈. 어떻게 잘 풀린 거 같기 는 한데.”
수학여행이 끝난 마법사관학교의 기숙사.
나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 학생 수 첩을 통해 뉴스 기사를 살펴보고 있
었다.
대충 여론을 살펴보니 어찌어찌 잘 넘어간 것 같다.
CCTV에 찍힌 베르트와 백은성의 모습 때문에 모든 관심도 자연스레 그들에게 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댓글 반웅을 보면 마법사관 학교와 마인 암살 사건을 엮으려는 내용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조금 걱 정이 든다.
하도 일이 겹치다 보니 이제는 단 순 음모론 취급이 아니게 됐다고 할 까?
“근데 이건 어디다 쓰냐.”
나는 블러드 크리스탈을 손에 쥐었다.
일단 마인이나 자운의 손에 넘어가 게 둘 수 없어 훔쳐 오긴 했지만 나한테는 쓸모가 없다.
내가 마인처럼 피를 먹는 것도 아 니고.
“피는 어떻게 생성하지?”
나는 다시 외부자의 혜택을 발동해 설명서(?)를 확인했다.
[블러드 크리스탈(유물)]
설명 : 크리스탈에 마력을 주입해 피를 공급한다.
“마력을 주입해 피를 공급한다
나는 곧바로 크리스탈에 마력을 주 입 했다.
동시에 크리스탈이 붉은빛으로 빛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명처럼 피 가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야. 왜 안 나와?”
흐음.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 가 순간 어렴풋이 들었던 블러드 크 리스탈의 사용법이 생각났다.
나는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었다. 그리고 핏방울을 만들어 크리스탈에 떨어트렸다.
톡.
그러자 크리스탈이 핏방울을 그대 로 홉수하더니 투명했던 내부가 붉 은 액체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쓰는지 알겠네.”
사람마다 가진 피의 정보가 다르 다.
크리스탈이 어떤 피를 만들 것인지 지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블러드 크리스탈에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동시에 크리스탈에서 붉은 물방울 이 생기더니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 지기 시작했다.
“오오.”
피의 양은 점차 늘어나고 책상이 붉게 물들자 나는 곧바로 마력 공급 을 중단했다.
“아이고 더러워졌네.”
나는 휴지를 꺼내 테이블 위를 닦 아 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러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잠깐.”
그때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 쳐 지나갔다.
서둘러 아공간에서 ‘생명의 잔’을 꺼냈다.
블러드 크리스탈과 생명의 잔.
어쩌다 보니 사자(死者)의 부활을 위한 중요 재료가 두 개나 내 손에 들어온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걸 이용할 방법이 있을 텐데.
“응애.”
그때 그레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레텔이 걱정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크리스탈이 만들어낸 피 를 보고 내가 다친 줄 착각한 모양 이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레텔을 안아 올렸다.
“그레텔, 다친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레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레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 기며 머리 위에 생긴 열매를 보았 다.
이틀 사이에 열매의 크기가 제법 커졌다.
소시지 안에 몰래 갈아 넣은 영약 의 효과가 확실히 체감되고 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익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지만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우웅.
그때 스마트 학생 수첩에서 알람이 울렸다.
[사진]
“……뭐야 이건.”
오랜만에 유아연에게 온 메시지였다.
웬 복잡한 술식이 그려진 여러 장 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형태가 아닌 퍼즐처 럼 복잡하게 흩어진 형태였기에 ‘외 부자의 혜택’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다.
그리고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김창현이 조사한 술식 들이야. 해 석할 수 있겠어?]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