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크루아스의 말에 이서준은 잠시 당 황했지만, 금세 침착을 되찾고는 물 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서준의 물음에 크루아스가 크게 날갯짓을 했다.
후웅!
강한 돌풍이 불어오며 이서준의 머 리카락이 휘날렸다.
[먼 훗날 세계의 법칙을 어지를 씨 앗인 너를 죽이기 위해서지. 그것이 바로 운명이 정해준 나의 사명 …….]
……나를 죽이는 것이 사명이라고? 아니, 그보다 세계의 법칙을 어지 를 씨앗이라는 건 또 뭐야?
그 순간 이서준은 자신의 무의식에서 들었던 어릴 적의 기억, 진천우 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 아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변화를 위한 시작이야.
—하지만 언젠간 이 아이도 죽게 되겠지.
진천우는 내가 모든 변화를 위한 시작이고, 미래에 죽을 것이라 말했다.
—김창현이 구해내야 할 아이가 바 로 이 아이군요.
—정확히는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이지만.
그리고 진천우는 내 죽음을 막기 위해 오랜 시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천우가 막으려 했던 나의 죽음 이, 눈앞의 흑룡과 연관이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니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눈앞의 마수는 ‘김선우의 무의식’ 이 만들어낸 생물체이다.
그리고 무의식이 만들어낸 생명체 가 가진 뒷배경과 이야기는 김선우 의 ‘경험’ 혹은 ‘상상’에 의해 만들 어진다.
김선우의 말에 의하면 눈앞의 흑룡 은 그의 상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 는 생물.
그 말은 즉, 김선우는 크루아스와 나 사이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알고 있다는 중거였다.
“……김선우.”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대체 뭘 알고 있길래, 무의식이 만 든 생명체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이서준은 입술을 꽉 깨물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우웅!
검을 두르고 있던 새하얀 빛이 강 해졌다.
크루아스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력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힘이군.]
이서준은 양손으로 검을 쥐어 자세 를 잡았다.
동시에 그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번쩍이더니 크루아스와 격돌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검은 마수를 하나 씩 처치하며 우리는 간신히 학교 5 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올라갈수록 마수의 기세가 거세졌 지만, 신영준과 유아라의 활약으로
큰 문제 없이 오를 수 있었다.
파앙!
—끼에에엑!
눈앞의 마수가 쓰러지자 신영준이 식은땀을 닦으며 내게 물었다.
“후우!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왔어. 5충이야.”
“너 아까 10분 전에도 거의 다 왔 다 했잖아.”
“진짜로 거의 다 왔어. 저기야.”
콰앙!
나는 눈앞의 검은 마수를 처치하고 는 복도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신영준과 유아라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다목적실?”
“맞아. 다 왔지?”
“……어, 그러네.”
신영준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끼에에에엑!
어디선가 용의 울음소리가 크게 터 져 나왔다.
동시에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퍼지 며 커다란 진동을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자 이서준과 크루아스가 정면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리는 치열 한 전투.
그것을 보자 문득 [차원 관측]으로 보았던 이서준과 크루아스의 대결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른 다.
“서두르자.”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검은 마수를 처치하며 다시 앞으로 나갔다.
잠깐 사이에 처치한 마수의 수만 100마리가 넘는 기분이다.
신영준과 유아라까지 합치면 300 마리 정도는 되겠지.
그 여파로 복도는 검은 피로 가득 하다.
숨도 쉬어지지 않던 지독한 악취도 코가 마비됐는지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앞길을 막던 마수들을 처치
하고 목적지인 ‘다목적실’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옷깃으로 뺨에 묻은 검은 피 를 닦아냈다.
“……후우. 드디어 도착했네.”
그때 유아라가 활짝 열린 다목적실 의 내부를 바라보더니 긴장된 얼굴 로 입을 열었다.
“안에서 엄청 불길한 기운이 느껴 져.”
“……그러게. 안에 뭐가 있는 거 야?”
신영준이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다목적실 내부로 들어섰다.
“큭 ”
내부로 들어서자 강렬한 기운이 내 몸을 밀어내는 둣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물속에 잠긴 몸처럼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숨까지 막히는 기분이다.
나는 무겁게 한 발짝씩 앞으로 걸 었다.
책상 위로 다가가자 아까와 같이 스마트폰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 였다.
이것이 바로 나의 무의식을 만들어 낸 결정체…….
그렇게 내 몸을 밀어내는 강렬한 기운을 뚫어내고는 스마트폰을 쥐는 그 순간.
공간 전체에 눈 부신 빛이 뿜어지 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앙!
그리고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푸른 빛의 파동이 우리의 몸을 스치며 넓 게 퍼져갔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몸을 누르고 있던 수상한 기운은 어느새 사라졌고, 자유가 된 것 같 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루아스와 검은 마수에 의해 무너 졌던 건물과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 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해치웠던 검은 마수의 흔적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서준과 전투를 치르던 크루아스 는 어느새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암혹으로 뒤덮였던 하늘도 어느덧 저녁노을로 아름답게 물들어갔다.
“……모두 끝난 건가?”
“……그런가 본데. 뭔가 허무한 결 말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유아라가 내 손 에 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그게 네 무의식의 결정체야?”
나도 유아라를 따라 스마트폰을 바
라보았다.
내가 소설 속에 떨어지기 직전에 사용했었던 스마트폰.
테두리에 살짝 파손된 혼적까지 예 전 그 모습 그대로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대답 했다.
“아마도.”
스마트폰을 회수하고 난 뒤 우리는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검은 마수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난 것에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의식이라고는 하나 과거의 사람 들이 죽는 것을 보고 마음 한켠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저 모습 을 보니 무언가 안심이 되었다.
“선우야!”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데 멀리서 윤하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윤하영이 반가워하 는 얼굴로 내 앞에서 있었다.
“해냈구나!”
“웅, 그렇지.”
이번에는 이서준이 다가왔다.
크루아스와의 치열한 전투로 몸 이 곳저곳에 상처가 보였다.
이서준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눈으 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 며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너도 수고했어.”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 이서준이 물 었다.
“그래서, 네 무의식의 결정체는 뭐 였어?”
이서준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내 게 집중됐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모두에게 보였다.
“이거야.”
“……스마트폰?”
모두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뭔가 구식 스마트폰 같은데…… 어떻게 이게 무의식의 결정체지?”
어느새 다가온 최서윤이 중얼거리 둣 말했다.
그런데 구식 스마트폰이라니.
이거 나름 최신 기종인데.
“선우야. 이거 무슨 사연 있는 물 건이야?”
윤하영의 물음에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 보았다.
“사연이라…… 있기는 하지.”
그 말에 모두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신영준을 팔짱을 끼다가 내 게 말했다.
“무슨 사연인…… 아니다. 보나 마 나 안 알려주겠지.”
잘 아네.
“김 선우!”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황은현이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또 다른 그리운 친구, 백민석과 박중민이 있었다.
“야!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갑작스러운 뉴페이스의 등장에 이서준과 유아라, 신영준, 이현주의 표 정에 잠시 의문이 깃들었다.
“……이분들은 누구셔?”
이서준의 물음에 나는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친구들.”
“ 친구들?”
내게 친구가 있던 게 신기했던(?) 것인지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신영준이 앞으로 나섰다.
“뭐야. 너 우리 말고 친구 없 잖…… 읍!”
이현주가 신영준의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본 윤하영이 작게 웃더 니 귓속말하듯 작게 말했다.
“선우가 예전에 실제로 사귀었었던
친구들이래.”
“......아.”
이서준은 작게 입을 벌리더니 의외 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은현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내게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검은 마수로부터 지 켜줬을 때 보았던 내 마법에 의문을 느끼는 거겠지.
하지만 의외로 황은현은 마법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저 사람들, 전부 네 친구들이야?” 황은현의 물음에 나는 이서준올 포
함한 모두를 둘러보았다.
“어. 친구들이야.”
황은현이 피식 웃었다.
“그러냐? 다들 인물이 좋네.”
그러더니 백민석과 박중민에게 시 선을 돌렸다.
“야. 우린 다른 애들 찾으러 가보
자.”
“엉? 누구 찾게?”
“성찬이랑 지현이랑……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성찬, 지현.
그리운 이름이다.
“그럼 가본다.”
“어어.”
황은현은 이서준 쪽으로 가볍게 고 개를 숙이곤 사라졌다.
잠시 적막이 일었다.
나는 멍하니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은 친구들이네.”
이서준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지.”
“자자, 이제 슬슬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그 스마트폰을 부수면 되는 건가?”
신영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 굳이 부술 필요는 없 을 거야.”
“그럼?”
“기다려봐.”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오랜만에 보는 배경 화면과 어플
들.
다시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리 며 메일함에 들어갔다.
[제목 : 축하합니다.〈현대 마법사〉완결 기념 이벤트에 당첨되셨 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선우 씨.〈현대 마법사〉의 작가 oik입니다. 김선우 씨는 출판사에 진행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당첨 상품은 특별 한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권입니다.]
[수령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내 예상대로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그 메일’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무의식을 구현한 결정체이자, 심연 탐험 시험이 보여 주고자 했던 나의 트라우마였다.
아직도 의문이다.
이 메일의 정체는 무엇이며, 나를 이곳에 보낸 01k는 누구일까? 정말
로 진천우가 나를 부른 것일까?
“김 선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유 아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럼 시작한다?”
“그래〜 빨리 여기서 좀 나가자. 어 차피 시험은 어차피 꼴찌겠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메일을 선택했다. 그리고 오른쪽 상단의 ‘삭제’ 버 튼을 눌렀다.
[1 개의 메일을 삭제했습니다.]
바로 그때.
내 앞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강렬 한 신비의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 했다.
그 기운에 우리들은 모두 잠시 놀 랐지만 무의식으로 만들어진 사람들 은 그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듯 평 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일그러진 허공은 어느새 새하얀 빛 을 내뿜는 거대한 균열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균열이 무의식에서 현실로 향하 는 통로라는 것을.
“와. 진짜로 끝났네.”
윤하영이 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그러게. 막판에 괴물들 때문에 진 짜 지긋지긋했다.”
신영준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한숨 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잠깐, 근데 이거 어떻게 나가야 하지?”
이현주의 물음에 최서윤이 대답했
다.
“그냥 균열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시험인데 나가는 순서가 중 요할 거 아니야.”
“ 아.”
모두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마법사관학교의 최상위권 성적을 가지고 있다.
나가는 순서가 곧 이번 시험의 순 위로 이어질 테니 민감할 터.
“……그럼 가위바위보로?”
신영준의 말에 모두의 눈이 가늘어 졌다. 괜히 뻴쭘함을 느꼈는지 신영 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서준은 그런 그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동시에 나가자.”
“동시에? 음. 균열 크기가 되려 나‘?”
균열의 크기는 상당하다.
잘하면 일자로 서서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균열 앞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균열의 넓이는 딱 한 명만 큼 부족했다.
“아, 이게 딱 한 명이 안 되네.”
“어깨를 딱 붙여서 잘 어떻게 해보 면 되지 않을까요?”
“아냐. 그래도 안 될 거 같아.”
“역시 가위바위보로……
신영준이 은근슬쩍 다시 주장을 내 세웠다.
그때 였다.
띠링!
메일을 삭제했던 나의 예전 스마트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나는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화면을 켰다.
[선우야. 지금 아버지 오셨어. 넌 언제 들어오니?]
어머니에게 온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해외 출장을 가셨던
아버지가 오늘 돌아오시니 일찍 오 라는 말을 했었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모두에 게 말했다.
“내가 빠질 게 너네 먼저 나가.”
내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같이 나갈 방법 찾아보자.”
“아니야. 잠깐 남아서 할 일이 있 거든. 너희 먼저 나가.”
“무슨 할 일인데요? 저도 남아서 도와드릴게요.”
최서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
다.
“괜찮아. 금방 따라갈게.”
이서준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우리 먼저 나가자.”
“엥? 진짜로?”
윤하영이 나와 이서준을 번갈아 바 라봤다.
이래도 되는지 양심에 찔려하는 표 정이었다.
“남아서 할 일이 있다잖아.”
“……으음. 서준이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네.”
윤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뭔 가 있겠지.”
신영준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6명이 균열 앞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입장하기 전 이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늦지 말고 빨리 와.”
“금방 갈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뭐, 그래. 그럼 간다?”
“응. 먼저 들어가라.”
그 말을 끝으로 6명은 동시에 균 열 안으로 들어갔다.
강한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모 습을 감추었다.
휘이이 잉一
어디선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며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 려보았다.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어느새 별이 떠오르는 밤이 되어 있었다.
소설 속 세계의 밤하늘은 수놓은 별들이 아름다웠는데, 이곳의 별들 은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 지 않는다.
소설 속 세계보다는 덜 아름답지 만, 이것도 이것 나름의 감성이 있 다.
“……그럼 가볼까.”
나는 뒤를 돌아 마지막 인사를 위 해 길을 걸었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