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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화 (285/535)

286화

피의 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10분 가량의 설득 끝에 한세연은 결국 입 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 같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자자, 세연 씨. 이런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나 하죠.”

“다른 이야기요?”

“근황이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요.”

“......근황.”

한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 정을 보아하니 근황이 유쾌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이 니 당연한 걸 테지만.

“저야 늘 아버지랑 회사 일로 바쁘 죠. 그룹 내부에서도 아버지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걸 아니까 대비하려 는 움직임이 크고요.”

“한세진 부회장은 어떻습니까?”

한세진은 한대현의 사후, 한성 그 룹을 장악하며 자운과 마인을 잇는 새로운 빌런이 되는 인물이다.

최근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 증 하나였다.

“오빠요? 음. 잘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여기저기 사람들 은 만나러 다니는 거 같기는 한데. 그 뭐라고 해야 할지……

한세연이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히

“요즘 이해 안 되는 행동을 많이 해서요. 사교 행사에 참여하는 비중 이 전보다 부쩍 늘었다고 해야 하 나?”

한세진이 참가하는 사교 행사.

아마 ‘마인’과 관련된 모임일 것이다.

한세연이 한성 그룹에 지지 세력을 빠르게 넓히는 지금, 그것에 맞춰 그 역시 마인의 힘을 빌려 대비하려 는 걸 테니까.

거기다 마인 특유의 잔혹한 성격을 생각하면 한세연에게 어떤 위험한 일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일…….

심지어 한세연은 이미 두 차례 마인의 기습을 당한 전적이 있기에 충 고를 해줄 필요가 있다.

“세연 씨, 제 말 잘 들으세요. 앞 으로 그 누구도 믿으시면 안 됩니

다.”

“......네?”

내 말이 조금 뜬금없었을까? 한세 연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세연 씨에게 다가와서 달콤한 말 을 속삭이는 모두를 경계하라는 말 입니다.”

한성가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한 세연이었기에 간신을 구분할 능력 정도는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인은 간신이 아니다.

그들은 간신의 탈을 쓴 암살자다.

내 말은 간신이 아닌, 암살자를 구 분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한세연은 과거의 경험을 토 대로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 해서 묻는 건데, 혹시 PL 그룹 회장 과 따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한세연의 표정을 살리자 그녀는 자 칫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최근 비즈니스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어요.

관련 계열사 분들도 함께 만났고 요.”

“계열사라면 ‘태상금융’이라던가

‘AY생명’ 같은?”

“……네, 근데 그걸 어떻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참고로 태상금융과 AY생명은 마인 들이 운영하는 회사이다.

원작에서는 한성가의 후계 구도에 따라 큰 수혜를 입게 되는 회사였다.

특히 태상금융 같은 경우는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인이 운영 하는 회사의 특성상 마피아나 다름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람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PL 그룹이요.”

“하지만 PL 그룹은……”

말을 하던 한세연이 잠시 말을 멈 추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 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우 씨 말대로 조심할 게요. 진우 씨가 했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한세연이 생각 났다는 둣 다시 말했다.

“그런데 진우 씨, 저번에 PL 그룹 회장이랑 대화를 나눠봤는데 그 사 람 진우 씨한테 관심 있던 거 같던 데요?”

PL 그룹 회장의 신분을 가진 마인 의 왕이 나에 대한 것을 물었다는 것에 잠시 놀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한대현의 병문안 때 만남 에서 무언가 의심이 생겼던 모양이 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기 에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한 세연에게 직접 물을 정도면 그때의 만남이 생각보다 강렬했던 모양이 다.

그리고.

[미래의 커다란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인과율이 1 상승합니다.]

인과율이 상승했다. 높은 등급의 빌런을 처치했을 때나 얻는, 1이나

되는 수치였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한세연과의 대화가 미래를 크게 뒤바꾼 모양이 다.

이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

그리고 저녁.

한세연과 헤어진 나는 기숙사가 아 닌 아파트로 돌아왔다.

다름 아니라 한세연에게 받은 ‘신 비 대여권’의 술식을 새기기 위해서 였다.

“……어우. 먼지.”

오랜만에 방문한 아파트의 거실과 방에는 구석구석 먼지가 끼어 있었다.

너무 오래 비워뒀던 모양이다.

청소를 좀 해야겠는데.

“그레텔.”

이 넓은 집을 혼자서 청소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그레텔을 소 환했다.

그레텔은 오랜만에 보는 아파트 풍 경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밝게 웃었다.

“지금부터 청소할 건데 도와줄 수

있지?”

그레텔의 가사 능력은 이전에 확인 한 바가 있다.

은근 꼼꼼한 성격이라 청소도 아주 잘한다. 솔직히 말해서 못하는 게 뭔가 싶을 정도.

진짜로 못하는 게 뭐지?

“응애!”

그레텔은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 더니 여러 갈래의 나무줄기를 소환 해 청소를 시작했다.

나무줄기 하나당 하나의 손걸레.

총 7개의 손걸레질을 동시에 하는

신기를 보여주며 바닥을 쓱쓱 닦았 다.

마정석 광산에서도 느꼈지만, 그레 텔의 노동력은 공장 기계 부럽지 않 다.

고용비가 소시지값 밖에 들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성비의 고 급 노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약 40분의 시간이 흐 르고.

“후! 드디어 끝냈네.”

그레텔의 도움 덕에 청소를 순식간 에 마칠 수 있었다.

쭉 주변을 둘러보자 거실과 방 구

석구석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때였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멸의 지옥 마계수 그레텔’의 유 대가 6% 상승합니다.]

[‘나무 소환(A)’의 숙련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소환 제어술(A)’의 숙련도가 소폭 상숭합니다.]

[‘불멸의 지옥 마계수 그레텔’의 마

력이 0.2 상승합니다.]

“오……

그레텔의 스킬 숙련도와 능력치. 그리고 유대가 상승했다.

아침에는 된장찌개 한 끼로 능력을 얻더니 이번에는 청소로 스텟이 상 승했다.

“……일상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건 가?”

어째 전투나 훈련보다 더 습득력이 높은 거 같은데.

확실히 혼자서 훈련을 시켰을 때보 다 나와 함께 무언가를 할 때 효율 이 더 높은 것 같다.

앞으로 염두에 둬야겠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레텔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레텔 수고했어. 좀 쉬어. 이따 맛있는 거 사줄게.”

“응애.”

그레텔에게 퍼즐 하나를 던져준 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복잡한 술식이 담긴 종이, ‘한성가의 신비 대여권’ 을 꺼냈다.

“바로 시작해볼까.”

곧바로 술식에 마력을 주입했다.

동시에 술식이 빛을 뿜어내더니 허 공에 떠올랐다.

나는 섬세하게 마력을 운용하여 술 식을 손둥 위로 담았다.

우우우웅.

번쩍!

“……됐다.”

손등 위에 각인처럼 새겨진 복잡한 술식.

마력을 차단하자 술식의 빛이 사라 지며 이전과 같은, 아무것도 새겨지

지 않은 깨끗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손등에 마력을 주입하 면…….

우우웅!

숨겨져 있던 손등의 술식이 빛을 뿜어내며 발동하게 된다.

“역시 한성가라 그런지 시스템도 최첨단이네.”

협회의 기록 보관소에 몰래 다녀와 야 하는 지금,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신비를 대여할 날이 올 것 같다.

마지막으로 외부자의 혜택을 이용 해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톡톡 화면을 두들기며 검은 색 바탕의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했다.

[적암]

적암.

국내, 아니 세계 최대 규모의 정보 길드이다.

의뢰비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 비밀 유지와 정보력만큼은 한성가와 더불

어 최고라 불릴 만하다.

김창현 조사 때 한번 이용했으니 이번이 두 번째 의뢰인가.

나는 익명으로 의뢰서를 작성했다.

[태상금융 회장, ‘정태혁’의 자세한 스케줄을 알고 싶습니다.]

내 다음 목표는 십마회의 최약체라 불리는 ‘S등급 마인, 정태혁’의 암살 이다.

“선배님 방에 틀어박혀서 뭐 해 요?”

마법사 협회 22층 특무팀 본부 팀 장실.

갑작스러운 정현수의 입장에 김덕현은 서둘러 살펴보고 있던 홀로그 램 자료를 껐다.

김덕현답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행 동이었기에 정현수는 곧바로 의심했다.

“뭔데 갑자기 숨겨요?”

“몰라도 된다.”

김덕현이 숨긴 자료는 김진철 회장 의 가족 관계에 대한 문서였다.

정확히는 18년 전 병으로 사망한 김진철 회장의 외동딸에게 숨겨진 자식이 있었는가에 대한 문서.

결론만 말하자면 회장의 딸에게는 숨겨진 자식이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약했기에 자 식을 낳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 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둣, 문서 조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 뭔데요. 아〜 알았다. 선배님 몰래 이상한 거 봤죠?”

“뭔 이상한 거?”

“에이~ 저 들어오자마자 창 내린 거 보니까 맞구만. 흐흐.”

정현수가 음흉하게 웃자 김덕현이 눈을 찌푸렸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가라. 꺼져.”

훠이훠이. 손을 휘젓자 정현수는 쳇. 불만을 품으며 방에서 나갔다.

흔자 남은 김덕현은 정현수가 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다시 홀로그램을 켰다.

동시에 떠오르는 한 젊은 여성의

사진.

김덕현은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 며 서류의 ‘김선우’의 사진과 비교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둘은 전혀 닮 은 구석이 없었다.

아니, 아예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이 너무 많단 말이지.”

원반격을 다루는 재능도 그렇고.

……또 ‘그 사람’의 선택을 받은 것도 그렇고.

퍼즐이 이렇게 딱딱 들어 맞을 수

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 에.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지만 그라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김진철 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면서 도 김선우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끝없는 착각의 늪에 빠진 김덕현은 그대로 서랍 밑에서 번호가 적힌 종 이를 꺼냈다.

긴급 상황에 연락하라며 건네주었 던 비상 연락처였다.

삑삑삑

번호를 누르자 통화 연결음이 들리 더니 남성의 외침이 터졌다.

—아씨! 김덕현. 너 뒤질래? 클리 어 직전이었는데 너 때문에 죽었잖 아! 네가 코인 물어줄 거야?!

김덕현은 시작부터 할 말을 잃었다.

뭔지는 몰라도 게임 도중에 사망한 모양이다.

이래서 이 사람한테 연락하기 껄끄 러웠던 건데.

“……뭔지는 몰라도 죄송합니다.”

—하아. 됐고, 무슨 일로 전화한 건데?

“급히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 습니다. 최일현 님.”

김덕현의 통화 상대는 다름 아닌 최일현이었다.

최일현이야말로 김선우와 김진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김덕현의 진지한 말에 수화 기 너머의 최일현 역시 진지해진 말 투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혹시 이서준이

랑 관련된 거냐?

“김선우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김선우? 걔는 또 왜? 실습 중에 사고 쳤어?

최일현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 었다. 나름 제자라고 신경 써주는 말투였다.

“아뇨. 혹시 김선우가 회장님의 숨 겨진 손자가 아닌가 궁금해서……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전화가 끊겼다.

늦은 밤 11시.

충청도 외곽에 위치한 몬스터 필드 에서 나는 윤하영을 만났다.

S등급 마인 암살을 위해 윤하영의 [멸마의 힘]의 잠재력을 더 끌어 올 리기 위해서였다.

우선 훈련에 앞서 윤하영에게 내 목표에 대해 설명했다.

바로 태상금융 회장의 신분으로 정 체를 숨긴 s둥급 마인을 암살하는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 계획을 들은 윤하영은 회장이 마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궁금증도 느끼기 전 에 먼저 당황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잠깐, 선우야. 이거 너무 무모 한 거 아니야?”

“못할 게 뭐 있어? 우리 둘이서 처치한 마인이 몇인데.”

“그건 그렇지만 그때는 밀폐된 공 간이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열린 공간이라며.”

예전에 마인을 토벌했던 장소는 던 전과 공연장 같은 밀폐된 공간이었

하지만 이번 마인 암살 계획은 상황 특성상 도시 한복판이나 차도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녀석을 처 치해야 하기에 난도가 더 높아졌다 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위해서 여기 모인 게 아니겠어?”

하지만 그녀의 불안감은 쉬이 사라 지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그녀의 마력으로는 S등급이 까마득해 보일 수 있으니까.

“나만 믿어. 내가 언제 틀린 말 한 적 없잖아.”

내 말에 윤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알았어. 같이 해 보자.”

윤하영이 결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해볼까? 저 멀리에 표적 보이지?”

나는 손가락으로 산 중턱에 미리 세워둔 표적을 가리켰다.

어림잡아도 300m가 넘는 거리에,

밤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 도 보이지 않는 수준이다.

그렇게 눈을 가늘게 뜨며 내가 가 리킨 곳을 바라보던 윤하영이 표적 을 찾아낸 듯 말했다.

“응, 찾았어. 저기 흰색 판 말하는 거지?”

“잘 찾았네.”

나는 곧바로 손 위로 마법 구체를 구현했다. 그리고 마력을 깊게 압축 해 손을 뻗었다.

“……설마 저걸 맞추려고?”

나는 대답 대신 마법을 방출했다.

파앙!

구체가 어둠 속에서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표적을 향해 쏘아졌다.

상당한 거리. 하지만 멈춰있는 표 적이기에 못 맞출 이유는 없다.

콰앙一!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표적이 박 살 난 것이다.

[‘저격수’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2,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최대 사거리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마력 제어술(A)’의 숙련도가 3% 상승합니다!]

단순히 시범만 보여주려 했는데 업 적 달성과 마력 제어술의 숙련도가 상승했다.

만족스럽게 화면을 보고 있는데 윤 하영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진짜 제어술 하나는 최고 다.”

윤하영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 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작게 웃어 보였다.

“너도 할 수 있어. 오늘부터 멸마 의 힘으로 표적을 맞힐 수 있을 때 까지 연습할 거니까.”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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