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어쩌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이서준이 최서윤에게 물었다.
“……두 분의 모습을 보니까 저도 뭔가 호승심이 들끓더라고요. 그리 고 어쩌면 앞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후회하 기 싫어서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최서윤이 내 눈 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
상했기에 딱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 았다.
이 상황 또한 원작의 흐름이었으니 까.
한가지 변화가 있다면 원래라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현주’가 나로 바뀌었다 정도겠지.
“……에휴. 이미 따라왔으니 어쩔 수 없지. 근데 아버지께서 많이 걱 정하실 텐데.”
“돌아가면 되죠. 혼은 좀 나겠지 만.”
최서윤이 다시 한번 머쓱한 미소를 홀렸다.
이서준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더 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나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보았 다.
깊은 어둠이 붉은 노을을 덮고 있 는,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황 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연에서 느껴지는 마력과 분위기가 원래의 세계와는 조금 달 랐다.
이질적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 한국은 아닌 거 같지 않
아요?”
“웅,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 파악 에 힘쓰던 그때.
“오랜만에 손님이 왔군.”
우리들의 앞에 쭈글쭈글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등장했다.
옷은 허름했고, 인종은 한국인이 아닌 백인이었다.
유창한 한국말에 당연히 한국인이 라고 생각했던 건지 이서준은 당황 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러센이라고 하네.”
“..!”
이서준과 최서윤이 깜짝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러센.
최근 불사를 연구했던 사람올 조사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신비 학자의 이름이었다.
“러센이라면 분명 30년 전쯤 행방 불명됐다고 들었는데……
“나를 알고 있나?’’
“……네, 근현대 신비 학자 중 한 분이라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러센은 딱히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상의 세계에 방문한다른 사람들 역시 러센을 보며 같은 반응을 보였 었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현실의 3초가 일주일 인데 30년이면 대체 이곳에서 몇 년을 사신 거지?”
“미안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지낸 지는 40년이네.”
“그게 가능한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현실과 이곳
의 시간 축은 복잡하게 얽혀있거든. 참고로 2010년의 사람이 2020년의 사람보다 늦게 온 적도 있어. 뭐, 역사가 길어진 만큼 이 세계의 기록 도 많이 변질됐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러센이 하늘을 올려보더니 말했다.
“아무튼,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따 라오게. 밤이 되면 괴물들이 잠에서 깨어나거든.”
“……괴물이요? 이곳에도 괴물이 있나요?”
“그래, 이곳은 가상 세계지만 ‘곽 무진’이 경험한 모든 것이 담겨 있
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러센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러센을 따라 이동했다. 삭막한 황무지를 지 나 작은 초원에 도착했다.
러센이 바닥에 손을 짚자 마법진이 떠오르며 바닥이 열리며 공간이 생 겨났다.
“오.”
그렇게 우리는 지하로 내려왔다.
아늑한 생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 지냈는지 낡은 생활 흔적 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화르륵一!
러센은 마법으로 벽난로에 불을 붙 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최서윤이 내 옷깃을 잡았다.
“선배님, 저 뼈는 어떤 몬스터의 뼈 일까요?”
최서윤이 벽에 장식된 거대한 뼈를 가리켰다. 몬스터 해부학을 배우며 수많은 뼈를 보았지만 이건 처음 보 는 형태의 뼈였다.
“아마 현실 세계에는 없는 몬스터 일 거야.”
“......네?”
최서윤이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 이냐는 표정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주려는 찰나, 이서준이 러센에게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어디긴, 당연히 내 집이지.”
“……그게 아니라 이곳 세계요. 곽 무진이 경험한 세계니까 실제로 있 는 장소일 거 아니에요.”
러센은 이서준을 빤히 바라보더니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농담이고 이곳은 저숭이다.”
“......네?”
“정확히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그 러니까 ‘경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 지.”
러센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서준과 최서윤은 당황한 표정을 지 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경계의 세계.
이름 그대로 이승과 저숭의 경계를 말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입장할 수 없는 장소인데,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 언젠간 꼭 방문해야 할 장소이 기도 했다.
바로 생명의 잔을 성유물인 ‘성배’ 로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재료, ‘근 원의 씨앗’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 다.
그때 러센이 힐끔 나를 보더니 물 었다.
“자네는 놀라지 않는군. 혹시 농담
이라고 생각한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다른 것 도 아니고 불사의 방법을 알아냈다 는데 그 정도 경험은 해 보지 않았 겠어요?”
그러자 러센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예전에 죽은 영혼을 만나 본 적도 있고요.”
내 말에 이서준이 내게 시선을 돌 렸다.
그녀의 어머니인 이윤경의 영혼을 불렀을 때를 떠올려서 그런 걸 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최서윤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하.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재밌 는 녀석들이 찾아왔군.”
러센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너희는 누구 냐‘?”
러센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희는 한국 마법사관학교 학생입 니다.”
“……한국 마법사관학교?”
러센이 중얼거리자 이서준이 물었
“우리 학교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 요?”
“아니, 예전에 이곳에서 좀 특이한 녀석을 만나본 적이 있거든. 그 녀 석도 그 학교 출신이었어.”
이서준이 놀란 눈이 되어 물었다.
“그거 흑시 진천우라는 사람인가 요?”
“어? 어떻게 알았나? 맞네. 자네들 처럼 나이에 맞지 않게 신비한 통찰 력을 가진 사내였지.”
이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나도 오래 만난 건 아니라서 잘 알지는 못해. 다만……
“ 다만?”
“곽무진의 연구 자료를 쫓아 들어 온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떤 확고한 목적을 갖고 가상 세계에 들어온 것 같더군.”
“확고한 목적이요?”
“그래, 신비의 ‘대가’를 찾으러 왔 다고 했었나? 뭐, 아무튼 여러가지 로 특이한 사내였지. 심지어 그놈은 마법도 무지막지하게 잘 썼어. 경계
의 몬스터들은 엄청나게 흉포해서 웬만한 마법사들도 안 건들거든. 그 런데 놈은 시원시원하게 몬스터들을 처리했어. 아직도 그날 보여주었던 몬스터 학살은 꿈에서도 나을 정도 라니까. 흐흐.”
그때 였다.
끼에에에엑——
지상 위에서 귀를 찢는 듯한 기괴 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러센은 잠시 천장을 올려보았다.
“경계의 포식자가 사냥을 시작했 군.”
이서준과 최서윤이 의문에 찬 표정 을 짓자 러센이 말했다.
“경계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민이 다. 우리와 같은 생자(生者)를 만나 면 눈이 돌아가서 잡아먹으려 하는 녀석이지.”
러센이 피식 웃었다.
“아마 이해하기는 힘들 거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당황했거든. 곽무진이 어쩌다가 이런 경험을 하 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의 대화인지 러센의 이야기 는 끝이 없었다.
이서준과 최서윤은 지금 상황을 이 해해야 했기에 그의 말을 열심히 귀 담아들었다.
“아 참, 배는 안 고프나?”
“네, 여기 오기 전에 밥을 먹고 왔 거든요.”
“그런가? 그럼 나 혼자 먹지.”
그 말을 끝으로 러센이 요리를 준 비했다. 바닥에 불을 지피고 고기가 담긴 냄비를 올렸다.
최서윤은 구경하다가 물었다.
“이건 무슨 고기에요?”
“경계에 거주하는 동물의 고기다. 몬스터가 아니라 가축의 고기라서 맛도 꽤 비슷해.”
“아하.”
최서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고기의 냄새가 풍겨 왔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는 아니 었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러센이 식사를 하다가 물었다.
“너희는 근데 왜 이곳에 온 거냐? 뭔가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냐?”
“불사의 비밀도 찾고, 진천우의 혼 적도 쫓으려고요.”
“……허허.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천우는 여기서 나갔다던데요?”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 지만 그놈이 이상한 거지. 너무 무 모하군.”
이서준은 작게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혹시 이곳에서 진천우의 행적을 알고 계시나요?”
“대충은 안다.”
러센의 대답에 이서준의 얼굴이 순 간 밝아졌다.
“어디로 갔나요?”
“북부로 갔다. 그곳에 생자의 도시 가 있거든. 정보를 얻겠다면서 그쪽 으로 갔었지.”
“……도시가 있다고요?”
“그래, 경계에 빨려 들어간 생자들 이 모여 만든 도시다.”
다음 날 아침.
가상 세계에서의 두 번째 날이 찾 아왔다.
낯선 장소라 그런지 푹 자지는 못 했다.
바닥이 불편하기도 하고, 또 날씨 가 쌀쌀해서 춥기도 했으니까.
물론 추위 내성이 있어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완전 내 성은 또 아니라서.
이럴 줄 알았으면 아공간에 챙겨둔 침낭을 꺼낼 걸 그랬나.
“ 하암......
그때 잠에서 깬 최서윤이 하품하더
니 피곤한 눈을 껌뻑였다. 그러곤 비몽사몽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엉켜 있는 머리를 정리했다.
“선배님, 잘 주무셨어요?”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아서 제대 로 못 잤어. 너는?”
“저도요..너무 춥더라고요.”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최 서윤이 양팔을 끌어안았다.
나는 불 위에 올려진 주전자의 물 을 컵에 따른 뒤 그녀에게 넘겼다.
“앗, 감사합니다.”
그 후 이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 갈 거야?”
“글쎄. 일찍 나가야지.”
이서준이 짐을 챙기며 내게 말했다.
그때 방에서 나온 러센이 양치를 하며 우리에게 물었다.
“북부로 가려는 거냐?”
“네, 진천우의 혼적을 쫓으려고요.”
“그러냐? 아직도 있을지는 모르는 데 도시로 가게 되면 ‘월천 여관’이 라는 곳이 있을 거다. 거기에 네가 찾던 진천우가 들린 것으로 알고 있 으니 한번 방문해봐라.”
“월천 여관…… 감사합니다.”
이서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간단하게 씻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
작은 고기를 곁들인 수프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입맛에 맞지 않기 도 하고 배도 부르지 않아서 미리 챙겨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서준은 뭔 그런 걸 또 챙겼냐며 신기해하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최 서윤은 라면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좋아했다.
……그리고 러센은.
“끄윽, 끄으윽…… 으허헝
[등장인물, ‘러센’이 당신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보상으로 5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눈물을 홀렸다. 40년 만에 먹는 라 면이라면서.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나중에 먹으 라고 라면 봉지 하나를 챙겨주었다. 아공간에 많이 남기도 하니까.
“이 귀한 걸…… 이 은혜 평생 잊
지 않겠네……
러센은 내게 꾸벅꾸벅 여러 번 고 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불우 이웃 돕기’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모든 식사를 마친 뒤 우리 는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추웠던 밤과는 달리 아침의 날씨는
사막처럼 뜨거웠다.
아니 이곳 풍경을 보면 사막이 맞 구나.
“근데 저기에도 뼈다귀가 있었나?”
이서준이 무언가를 발견한 둣 사막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하룻밤 사이에 못 보던 거대한 뼈 다귀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러센은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경계의 사막 도마뱀의 뼈네. A등 급의 몬스터로 알고 있는데 보아하 니 포식자가 사냥하고 간 모양이 군.”
“……포식자는 얼마나 강합니까?”
이서준이 물었다.
“글쎄. 진천우라는 자의 말로는 최 소 B…… 그리고 S등급까지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
S등급이라는 말에 이서준과 최서윤 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러니 살고싶으면 포식자는 무조 건 피하게. 놈들은 무리를 지으며 다니기도 하지만 또 지능이 뛰어나 니 말일세. 특히 밤에는 절대 돌아 다니면 안 돼.”
이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가보게. 이 세계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 르겠지만……
“네,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 겠습니다.”
우리는 러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북부에 있는 생자의 도시 였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