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철조망 내부에 들어선 지 10분.
황무지를 계속 걸었지만, 아직 선 현 가문과 관련된 흔적이 보이지 않 았다.
건물도 없고, 사람도 없다. 바닥은 완전히 메말라서 황야가 되었다.
유아연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주 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텅 비었네. 협회에서 전부 정리한 건가?”
“글쎄요. 서울 특무팀 소속이었는 데 아는 거 없어요?”
내 물음에 유아연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모르지. 선현 가문의 실험 장소가 밝혀진 건 내가 입사하기 전 인데.”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주 우연히 바 닥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을 느꼈다.
마력과는 다른, 조금 이질적인.
그러니까…….
과거에 마주쳤던 신비와 비슷한 느
낌이라고 할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신비와 대면한 경험들이 있었기에 나는 그 희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될지 알 거 같아요.”
“응? 어떻게?”
“일단 따라와요.”
“자, 잠깐만!”
그렇게 나는 바닥에 희미하게 느껴 지는 신비의 기운을 따라 이동했다.
과연 신비의 기운을 따라 이동한 것은 정답이었다.
약 10분가량을 더 걷자 큐브 형태
의 회색 건물을 발견했다.
딱 봐도 무언가 실험이 이루어졌다 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뭐야. 정말이잖아……
유아연이 건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고서는 힐끔 나를 바라본다.
“여기에 건물이 있는 지는 어떻게 알았어?”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서 따라갔 어요.”
“이질적인 기운? 전혀 못 느꼈는 데.”
“마력이랑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서 요. 아마 못 느끼시는 게 당연할 거 예요.”
내 말에 유아연은 ‘그럼 너는 어떻게 느끼는데’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유아연은 건물의 문 앞에 다 가섰다.
문에는 또 다른 잠금 마법이 걸려 있었다.
외부자의 혜택이 있는 나에게는 아 주 간단히 풀 수 있기에 바로 술식 을 해제했다.
우우응!
딸깍!
문이 열리자 유아연은 다시 황당함 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우리 길 드 술식 해제 전문가랑은 비교가 안 되는데. 혹시 그거 특성이야?”
“특성은 아니에요.”
“그럼 소수 일족?”
유아연의 물음에 나는 대충 고개를 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같이 가.”
[‘비밀 실험실 입장’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인과율이 1 상승합니다.]
인과율이 상승했다. 업적 명은 ‘비 밀 실험실’.
그 말은 이곳이 선현 가문의 실험 이 이루어졌던 곳이 맞다는 뜻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긴 통로가 보였다. 복도의 양옆에는 여 러 방이 보였다.
전기가 끊겨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진화와 적응’이 있어 앞이——
화르륵!
그때 뒤에서 뜨거운 화염이 허공에 떠올랐다.
유아연이 마법으로 주변을 밝힌 것이다.
“생각보다 깨끗하네.”
“네, 협회에서 싹 정리한 모양인데
요.”
유아연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통로를 걸으며 보이 는 방들을 하나씩 확인해갔다.
아쉽게도 대다수가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 었다.
단서나 흔적이 될 만한 것들은 이 미 싹 정리한 모양.
잠시 포기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힘들게 찾은 장소인 만큼 작은 단서라도 얻어가고 싶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어떤 실험이 이루 어졌는지만 알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살피는 데 우연찮게 어떤 방바닥에 숨겨진 술식을 발견했다.
“.…”이건.”
“뭔가 찾았어?”
유아연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바 닥에 쪼그려 앉아 술식을 살폈다.
“바닥에 술식이 숨겨져 있어요.”
“술식?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술식의 형태를 특수한 장치로 은 폐했거든요.”
“……너는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유아연이 내 옆에서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마력을 방사해 바닥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바 닥에 숨겨진 마법진이 빛올 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옆에서 유아연의 놀란 기척 이 느껴졌다.
나는 술식올 살펴보았다.
“흐음.”
술식의 형태가 조금 특이했다.
단순한 결계 마법과는 다르게 술식 해제가 아닌 별도의 ‘열쇠’가 있어
야 열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이 술식은 어떤 장치를 인식해야 완전히 풀 수 있다.
“……왜 그래? 이건 못 풀어?”
내가 가만히 내려보자 유아연이 먼 저 물었다.
“열쇠가 필요해요.”
“ 열쇠?”
“네, 어떤 장치를 인식해야 술식이 움직여지게끔 설계되어 있어요.”
“ 열쇠라……
유아연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나도 방법을 궁리하던 중, 문득 머 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설마.
나는 품 안에서 미리 챙겨놓은 ‘김 창현의 어릴 적 사진’을 꺼냈다.
전에 신비가 말한 적이 있다.
이 사진에는 특수한 장치가 숨겨져 있다고.
그 숨겨진 장치가 혹시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이 사진에 장치가 없다는 건 확인 했다. 하지만 결계가 사진을 인식하
도록 설계되어있다면 모든 퍼즐이 정확하게 맞춰진다.
사진을 꺼내자 그것을 알아본 유아 연이 나를 딴히 바라보았다.
“어? 그 사진은……
나는 대답 대신 곧바로 마법진에 사진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강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
번쩍!
강한 빛과 함께 바닥이 열리기 시 작했다.
동시에 숨겨져 있던 어두운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사진에 숨겨진 장치.
선현 가문에 숨겨진 통로로 향하는 열쇠였다. 유아연은 통로를 바라보 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몇 번올 놀라는지 모르겠 네.”
“들어가죠.”
그렇게 나는 계단을 타고 내려왔
으스스한 분위기에 살짝 긴장되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몬스터에 대한 긴장감도 생겼고.
그렇다고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았 다. 내 뒤에는 ‘불의 마녀’라고 불리 는 최고의 화염 술사가 있으니.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 계단 끝에 존재하는 숨겨진 통로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신세계의 시작점’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인과율이 2.0 상승합니다.]
또다시 인과율을 습득했다. 이번에 는 2라는 꽤 큰 수치였다.
빌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도 아 닌데 어마어마한 인과율 습득이었다.
단순히 입장한 것만으로도 이토록 많은 인과율을 주다니.
이 장소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업적의 이름도 심상치 않다.
신세계의 시작점이라…….
무슨 의미지?
[출입자를 감지했습니다.]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임시 동력을 사용합니다.]
번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통로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멀리서 무언가를 발견 했다.
—끄윽, 끅!, 끽!
그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기괴한 울 음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생김새는 인간의 형태와 비슷했다. 머리가 있고 몸통이 있고 팔과 다리 가 있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인간’으로 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얼굴은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신체 일부는 검은 슬라임처 럼 변해있었으니까.
마치 겨울 방학 때 다녀온 수중 유적지, ‘마에 물든 신전’에서 보았
던 물고기 몬스터를 다시 보는 둣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괴한 몬스터를 처음 보는 유아연은 눈.을 찌푸리더니 화 염 구체를 구현하며 전투 준비에 돌 입 했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전 투 준비를 저지했다.
“기다려봐요. 확인할 게 있어요.”
“조심해. 녀석이 먼저 공격할 수도 있어.”
“네, 조심할게요.”
녀석은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지만, 곳곳에 인간의 혼적이 남아있었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얼 굴에는 안경이 쓰여 있었다.
아마 녀석이 ‘인간’이었다면 대화 가 통할지도 모른다.
—너, 는, 누구, 냐?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목소리 가 들려왔다. 그리고 미약한 신비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실험을 조사하러 온 사람이다.”
—조, 조사……? 끅!
괴인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오 른팔의 검은 슬라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징그러웠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너는 원래 인간이었나?”
—나는, 인간, 이다.
역시 녀석은 인간이 맞았다.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어떻게 살아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 실험실이 협회에게 알려 진 게 13년 전인데, 그렇다는 건
13년 동안 이 녀석은 이곳에 갇혀 있던 건가?
“너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벌을 받아, 신비 열병에 걸렸다.
“ 벌?”
녀석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벌이라니 무슨 벌을 말하는 걸까?
“알아듣게 설명해봐.”
—우리는, 정해진, 법칙을 조작, 시 도했다. 그래서, 세계의 법칙에 따 라, 벌을, 받았다.
……세계의 법칙을 조작하려 했다
고?
세계의 법칙.
성무제에서 관측의 악마가 말했던 내용에 의하면 이 세계에 숨겨진 절 대적인 힘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법칙을 조작하려 했다는 건가?
동시에 ‘차원 관측’을 통해 이전 삶에서 이서준이 죽는 순간 보았던 김창현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세계의 법칙이 뭐지?”
이것을 잘 모르는 유아연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녀석 에게 물었다.
“자세하게 설명해봐.”
—세계의, 법칙이란…….
“아니, 그거 말고 세계의 법칙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조작을 시도했 는지를 말해보라고.”
내 물음에 괴인이 잠시 놀란 표정 을 짓는다.
—너는, 세계의 법칙이, 무엇인지 아는 건가? 끅!
“대충은.”
—그런가, 재밌군, 우리는, 신비,
를 이용했다. 신, 비는 미약, 하지만 끅! 세계의 법칙, 에 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조작한 이유는?”
—당연흐], 정해진, 운명. 으로부터, 끅!, 벗어나기, 위해.
정해진 운명. 내 조사에 따르면 이 실험에는 진천우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원작에서 진천우가 늘 말하 던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이 되고 싶다는 의미는 진천우를 깊게 조사 할수록 ‘자유’를 얻고 싶다는 의미
로 들렸었다.
그렇다면 이 실험은 진천우가 ‘자 유’를 얻기 위한 실험이었을까?
……대체 이 세계는 뭐지?
나는 품에서 김창현의 어릴 적 사 진을 꺼냈다.
“이 아이를 알고 있나?”
—……그 아이, 우리, 끅!, 실, 험 체.
“어떤 실험을 했지?”
—대답, 을, 듣고 싶으면, 조건, 이 있다. 끅!
조건?
일단 어떤 조건인지는 들어보자.
“그래, 어떤 조건인데?”
—나를, 죽여, 줘…….
괴인의 눈가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고통스러운, 시간, 이었다, 더는, 한계…….
“그래, 원한다면 편하게 죽여주마.”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괴인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 다.
“자, 그럼 설명해봐.”
—저, 아이, 는, 소수 일족인 유성 일족의 생존자, 그리고 우리의, 실험 으로 끅! 인위로 신비가 주입된, 인 간.
“……잠깐, 유성 일족이라고?”
유아연이 나서서 물었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기에 유아연에 게 시선을 돌렸다.
유아연은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진천우가 멸족을 시도했던 소수 일족 중 하나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야, 우리 유씨 가문도 진천
우에 의해 무너졌으니까. 녀석이 노 렸던 특정 가문과 일족은 이미 오래 전에 조사해놨어.”
그런 건가. 몰랐던 사실이다.
“유성 일족이 소수 일족이라면, 그 일족의 특징이 뭐죠?”
“신비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
“신비의 친화력?”
“그러니까, 신비가 가진 잠재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일족이야. 소 문에 의하면 조상 중에 신비가 있다 는 이야기도 있었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내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들을 생각하
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럼 김창현은 소수 일족이었고, 선현 가문에서 그를 입양했다는 건 가?
그리고 그 김창현은 진천우가 데려 온 아이고?
—우리는, 그 아이, 에게, 25명의, 소수 일족, 과, 끅! 신비를 제물로 바쳐, 온갖, 실험을, 저질렀다.
진천우가 저지른 소수 일족 말살 계획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소수 일족이 가진 ‘보물’ 이 탐나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닐 까 싶었지만. 설마 그런 비밀이 있
었을 줄이야.
“그래서 너희는 김창현을 무엇으로 만들려 한 거야?”
내 질문에 괴인이 작게 흐느끼며 웃었다.
—크흐, 흐, 진천우의, 의지를, 이 어받은, 그의 사도를, 만들려 했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