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38/535)

239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우리가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베르트가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 려보며 말했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혔 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마력이 내 목을 옥죄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움츠려진다거나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영웅의 가히가 내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었으니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손에 담긴 마력을 강하게 끌 어올렸다.

……그렇게 손에 쥐어진 결정체에 마력을 심으려는 순간.

“야! 야야야! 멈춰! 멈춰!”

자운 일행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손에 주어진 힘을 풀어내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반웅.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목숨을 건 도박이 아니었다.

원작을 보아온 나는 알고 있다.

저 녀석들은 절대 내 제안을 거절 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자운은 진천우라는 신을 모시는 종 교 단체.

신에게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자신 의 목숨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 놓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그리고 ‘관측의 악마’가 가진 미래

예언은, 그들의 신을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네 조건 받아주지. 대신 우리 쪽에도 조건이 있어. 계약서라 는 건 원래 양쪽 의견을 들어봐야 하잖아?”

베르트의 말에 말해보라는 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건이 우리에게 약간이라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순간 맹세 를 파기할 수 있다.”

“그건 안 돼. 그리고 조건도 두루

뭉술해.”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은 녀석은 죽일 수 있다.”

“범위가 너무 넓어. 확실하게 좁 혀.”

“……우리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방 해하는 인물에게는 위 조건에서 제 외할 수 있다.”

« o »

W....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적어도 직 접적인 해를 끼치기 전까지는 안전 할 테니까.

목숨은 확실하게 보장받은 셈이다.

물론 저 말에는 교묘하게 자신들의 계획을 위해 ‘이서준’을 노려도 된 다. 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는 하 지만 그것까지 정정할 생각은 없다.

바꾸자고 해서 저들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좋아. 그리고 여기에 없는 네 다른 동료들도 우리를 못 건들게 하겠 다고 약속해. 또 다리아의 동생도 안전한 상태로 돌려주는 건 알고 있 지?”

내 말에 다리아가 나를 바라보더니 자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트는 다리아를 빤히 바라보다

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네 동생은 오늘 내로 안 전하게 돌려보내 줄게. 맹세의 조건 대로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 를 끼치지도 않을 거고. 여기에 없는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

“좋아. 첫 번째 조건 성립. 그럼 두 번째 조건.”

내 말에 베르트가 다시 눈을 찌푸 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굴 욕과 분노로 떨렸다.

“너희가 가진 신비의 대여권을 원 해.”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었는지 내 옆 의 이서준까지 놀란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베르트 역시 황당해하는 얼굴로 눈 올 껌뻑였다.

보다 못한 백은성이 나섰다.

“야! 신비를 대여해달라고? 장난 해? ……가 아니라, 손에 힘 좀 풀 어줄래?”

백은성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나를 말렸다. 그 모습이 퍽 웃기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자운이 저 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평생 보기 힘든 귀한 장면이다.

김진철 회장 앞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나도 무작정 신비를 달라는 게 아 니야. 말 그대로 대여니까. 대여 기 간은 1일.”

“무슨 일에 사용하려는 건데?”

내가 대여하고자 하는 신비는 바로 ‘마나의 핵’이다.

무한의 마나를 가졌다고 알려진 이 신비를 이용해 나는 인과율의 능력, ‘차원 관측’에 필요한 마나를 공급 할 생각이다.

“개인적인 일에 사용할 거라 알려 줄 순 없어.”

“……너. 적당히 까불어.”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베 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화를 풀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확실하게 대답해줄게. 너희 에게 해를 끼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그럼 너도 피의 맹세를 해. 대여 한 신비를 돌려주겠다는 맹세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데 사용하지 않 겠다는 맹세.”

“좋아. 그 정도는 해주지. 단 피의 맹세를 하는 건 대여하는 당일에 한다.”

“그래, 그럼 마지막 세 번째 조건 은 뭐지?”

사실 세 번째 조건은 생각하지 않 았다.

그래서 급하게 생각해낸 것이.

“세 번째는 소원권.”

“……소원권?”

“어,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거 야. 간단하지?”

내 조건이 어이가 없었는지 베르트

옆에서 있던 백은성과 나타샤가 헛 웃음을 흘렸다.

“야. 쟤가 지금 뭐라는 거냐?”

“기어오르는 것도 적당해야지.”

분위기가 좋지 않다.

이건 너무 선 넘었나?

이대로라면 진짜 결정체고 뭐고 내 머리부터 날려버릴 것 같아서 서둘 러 정정했다.

“무리한 부탁은 안 하고 너희가 들 어줄 수 있는 수준으로 할게. 당연 하겠지만 너희에게 해가 되지 않는 조건.”

“범위가 넓어.”

“범위는 네 양심.”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의 맹세에서 말하는 ‘양심’은 꽤 넓고 강한 효력을 갖고 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세세한 조건보 다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 해 도 과언이 아니겠지.

조금이라도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 순간 계약 위반으로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좋아.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지는 우리의 ‘양심’에 맡기지.”

하지만 자운도 ‘양심’이라는 조건 이 자신 있던 모양이다.

예상외로 혼쾌히 수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모든 ‘맹세의 조건’이 성립 되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있네.

“……그럼 이제 계약을 진행하지.”

자운의 일행 모두가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금빛의 마나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팔목을 살짝 그었다.

팔목에서 피가 맺혔다. 하지만 그 어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그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위의 조건으로 우리는 피의 맹세 를 한다.”

우우웅!

이내 팔목에 맺힌 피는 붉은 빛의 술식의 형태로 변화했다.

그리고 술식은 그들의 왼쪽 팔목에 길게 새겨졌다.

나는 그들의 팔목에 새겨진 술식의

내용을 읽었다.

지금까지 말한 조건이 제대로 적혀 있었다. 효력이 제대로 담긴 ‘피의 맹세’가 완성되었다는 증거다.

잠시 뒤 왼쪽 팔목에 새겨진 술식 은 빛을 뿜어내더니 사라졌다.

베르트는 자신의 왼쪽 팔목을 내려 보더니 오른쪽 팔목을 들어서 내게 보였다.

그러자 오른쪽 팔목에 감춰졌던 술 식이 떠올랐다.

“이 오른쪽의 술식은 오래전 ‘그 분’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피의 맹세이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술식에 담긴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운을 배신하지 마라.

자운에게 해를 끼치는 짓을 하지 마라.

진천우에게 복종하라, 진천우를 추 종하라.

“그리고 여기, 왼쪽 손목에는 너와 의 술식이 새겨졌다. 그분 이후로는 처음 새기는 맹세라고 할 수 있지. 김선우. 그분과 같이 내 몸에 술식 을 새긴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열쇠를 내놔.”

계약은 완료되었다. 이것으로 안전 이 보장되었으니 넘겨도 상관없다.

그렇게 베르트를 향해 걸어가려는 그 순간.

“김 선우.”

뒤에서 이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이서준을 돌아보았다.

자운에게 가는 것이 걱정되는 모양 이다.

“괜찮아. 피의 맹세가 걸려서 이제 안전하니까.”

이서준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가볍게 미소를 보이고는 자운을 향 해 다시 걸었다.

어느덧 나는 그들의 앞에 도착했다.

동시에 자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녀석들이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덤덤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결정체를 베르트에게 넘기자 그녀 가 내게 말했다.

“김선우.”

M C꺼

“자운에 들어올 생각 없나?”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살짝 놀랐다.

……자운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나는 고개를 들어 베르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베르트는 여유가 담긴 눈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참 마음에 드는데. 어 때?”

“……미안한데 테러에는 관심이 없 어서.”

“잘 생각해보라고. 다시는 안 올 기회야. 우리의 위대한 여정에 참가 할 기회는 지금뿐이니까.”

베르트가 후후. 웃었다.

“네 눈에는 우리가 세계를 어지럽 히는 테러리스트로 보이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세계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다.”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 하곤 하지.”

정곡이 찔렸는지 뒤에서 지켜보던 백은성과 스카가 큭큭 웃었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이서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선우, 너는 언젠간 꼭 내 손으 로 죽여주마.”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이서준에 게 돌아갔다.

“김선우. 너 괜찮아?”

“어,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잘 될 거야.”

이서준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베르 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베르트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품 안에서 [마나의 핵]을 꺼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으니 ‘미래 관 측’을 시도하려는 모양이다.

마나의 핵에서 강한 빛이 뿜어졌다.

믿기 힘들 만큼의 강력한 마나가

‘자아의 결정체’에 담기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앙——

동시에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원형 형태로 크게 퍼졌다.

마력의 파장이 주변을 휩쓸기 시작 했고, 그것은 어느새 우리를 덮쳤다.

“큭!”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기운이었다.

마치 마력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듯, 실체가 있는 파동의 힘에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다리아는 마력의 파동을 견디지 못 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이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력의 파동에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었다.

나 역시 몸 안에 느껴지는 과부화 된 마력에 고통을 느끼고 숨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배가 부른 상태에서 억지로 음식을 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원작에서의 이서준은 그가 가지고 있는 ‘천재’ 특성을 이용해 이 마나 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성장했지

만, 그런 것이 없는 나는 그저 괴로 운 고통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때 베르트가 서 있던 공간이 일 그러졌다.

“……시작되는 건가?”

그 모습을 보며 관측의 사도의 방 에서 보았던 술식으로 보았던 미래.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렸다.

공간이 뒤틀리며 사라지는 베르트.

그리고 약 10초 뒤 다시 공간이 뒤틀리며 돌아온 그녀는 이렇게 말 한다.

—미래를 보았다.

—‘그분’께서 돌아오셨다.

원작에서의 이서준은 그 말을 들음 과 동시에 몸 안에서 날뛰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 뒤에는 어떤 대화가 진행되었는 지 나도 알지 못한다.

그때 였다.

우우우웅!

베르트의 몸이 원작의 흐름과 같이 공간이 뒤틀리며 사라졌다.

미래를 관측하기 위해 잠시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마력의 파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약 10초가 지나.

내가 본 미래와 같이 베르트가 사 라졌던 공간이 다시 뒤틀렸다.

미래를 관측한 베르트가 다시 돌아 왔다.

스으으...

돌아온 베르트의 머리가 마력의 파 동에 의해 길게 흩날렸다.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 위에 올려 진 결정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자아의 결정체에 금이 생

기며 그대로 깨져버렸다.

결정체의 조각이 허공에 아름답게 흩날렸다.

술식으로 본 미래와는 조금 달랐다.

술식에서의 베르트는 곧바로 자신 이 본 미래의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베르트, 무엇을 봤지?”

나타샤가 물었다.

베르트는 자신의 손 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결정체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자운의 일행 모두가 크게 떴다.

“그 말은……

“그래, ‘그분’께서 성공하셨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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