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성무제의 개최식과 친목회는 호텔 3층에 마련된 거대 홀에서 진행된 다.
개최식이 끝나면 곧바로 친목회가 시작되기에 그전에 교복이 아닌 파 티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10대를 중심으로 하는 행사에서 이런 친목회가 굳이 필요한가 싶지 만, 성무제 주최 * ‘경쟁’보다는 ‘교류’를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라 그런 것 같았다.
“……아, 귀찮네.”
나는 거울 앞에서서 내 복장을 점검했다.
너무 꾸민 티를 보이긴 싫어서 대 충 블레이저만 걸쳤는데, 이러고 있 으니 괜히 ‘김진우’가 된 기분이 든 다.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
그럼 가볼까.
나는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 고 친목회와 개최식이 열리는 호텔 3충에 도착했다.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모델처럼 검
은 정장으로 쫙 빼입은 이서준을 발 견했다.
이서준 역시 나를 발견하더니 반갑 게 손을 흔들었다.
“오. 김선우〜 멋진데?”
이서준이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더 니 말했다.
“……멋지긴. 교복이랑 별 차이도 없구만. 아 참, 다른 애들은?”
“먼저 입장하거나 아직 안 왔어.”
“흐음. 그래? 일단 들어가자.”
“웅.”
나와 이서준은 3층의 홀 안으로
입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멋지게 빼입은 수 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성무제 참가 인원을 생각하면 상당 히 많은 수였다.
이것은 주최 측과 교사, 협회, 위 젠 소속 연구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이 모여서 그렇다.
“분위기만 보면 벌써 친목회가 시 작한 것 같네.”
“그러게.”
“근데 다른 애들은 어딨지?”
이서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이현주 있네.”
손가락으로 구석에서 혼자 이것저 것 음식을 삼키고 있는 이현주를 가 리 켰다.
이서준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그러네. 나 그럼 잠깐 현주랑 얘기 좀 하고 올게.”
“어어. 다녀와.”
그렇게 이서준을 보내고 혼자 남게 되었다.
괜히 심심해서 가까운 테이블 위의 과일 하나를 집어삼켰다.
우물우물.
—야. 김선우 맞지?
—어, 김선우 맞네. 방금 옆에 있 던 건 이서준 같던데.
그때 주변에서 나를 향한 속닥이는 여러 언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마법 학교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마치 나를 탐색하려는 듯 눈빛 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과일을 집어삼키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 사이에서 아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 다.
만두 머리를 한 귀여운 외모의 여 성.
중국 마법사관학교 1위인 양잉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양잉은 괜히 내 시 선을 피했다.
마치 너 같은 건 신경 쓴 적 없다 는 듯이.
양잉은 원작에서의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 한 인물이다.
다만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이 조금 독특했기에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창술을 주특기로 사용하는 강화계 마법사인데, 부특기로 말 형태의 영 체를 소환해서 기마전을 한다.
마치 중국 역사 속에 나오는 장수 같은 느낌이라 멋지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김 선우.”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 화려한 금발과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눈에 들어 왔다.
“릴리 로즈.”
릴리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니.
무슨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 할 법 한 대사를 내뱉는다.
“……보고 싶었기는.”
“정말인데? 내가 매일 SNS에 너 관련 사진 올리던 거 못 봤어?”
나는 과일을 다시 입에 집어넣어 넣고는 꿀꺽 삼켰다.
“너, 스토커 짓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구나?”
“어머? 스토커라니. 말이 심하네.”
릴리가 빈정 상한 척 눈웃음을 지 었다.
“매일 SNS에 내 사진 올리는 게 스토커 짓이지 그럼 뭐야?”
“……어음. 팬심?”
그 말에 잠시 황당함을 느꼈다.
릴리 로즈가 팬심이라니.
자존심이 강한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진짜야. 인터넷으로 네 활약 잘 지켜보고 있거든. 저번에 질병의 마 수도 잡았다며? 그것 외에도 폭우
마법이라던가. 아주 활약이 대단하 시던데.”
릴리가 신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더니 스스로 너무 신나 보였다 는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내일 오전 1차 팀 단 체 종목에서도 기대하고 있어. 개인 전에서도 마지막에 붙을 수 있게 끝 까지 잘 살아 남아보라고. 뭐, 너라 면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만?”
“……어, 그래.”
“그럼 가본다.”
그렇게 릴리는 평소와 같은 도도한
모습으로 뒤를 돌더니 어디론가 사 라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성무제의 개최식이 모두 끝이 났 다. 예고했던 대로 아주 가볍게 진 행된 개최식이었다.
각 학교 3학년 대표가 단상 위에 올라와서 함께 선서하는 것과, 성무 제 주최측의 연설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녁 9시.
본격적인 친목회가 시작되었다.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르고, 마력으 로 작동하는 조명이 주변을 은은하 게 비춰주고 있었다.
개최식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학교 간의 묘한 신경전 역시 언제 그랬냐 는 듯 사라졌다.
끼이 익一
그리고, 나는 친목 현장에서 벗어 나 야외 테라스로 나왔다.
시끄럽고 후끈했던 실내에서 나오 자 심적으로 편안함이 느껴졌다.
“......좋네.”
나는 3층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대 위젠의 야경을 감상했다.
특이한 외형의 연구 시설들이 조명 에 빛나고 있어 미래 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미리 챙겨둔 과일 접시와 주 스를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딸기 하나를 쥐어 한입 베어 물자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우물우물…….
그렇게 밤 풍경을 안주 삼아 감상 에 젖고 있던 때였다.
끼이이익一
테라스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 찾았다. 여기 있으셨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이쁘게 올려 묶은 최서윤이었다.
“여기서 혼자 뭐해요?”
나는 딸기를 입에 넣고는 최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개최식 때도 보았지만, 의상 이라던가 화장이라던가. 평소와는 스타일이 달라서 그런 건지 오늘따 라 얼굴이 유독 빛이 난다.
괜히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도
들고.
“시끄럽고 더워서 바람 좀 쐬려 고.”
“어? 저도 마침 시끄럽고 덥던 참 이었는데.”
속 보이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서윤도 나를 따라 작게 웃으 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근데 뭐 드세요?”
“과일. 너도 먹어봐. 이거 엄청 달 아.”
딸기 하나를 집어서 그녀에게 내밀 었다.
최서윤은 손으로 받지 않고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딸기를 앙 물었다.
그 행동에 살짝 당황했다.
입으로 받아먹을 줄은 몰랐으니까.
“우움…… 와. 이거 진짜로 엄청 다네요?”
최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둣 딸기 맛의 감상을 말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자연 스럽게 딸기 꼭지를 조용히 접시 위 에 올려놨다.
“엄청 달지?”
“네, 이거 개량된 건가?”
“맞아. 아까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연구로 개량한 위젠 특산품이라 하 더라고.”
“아하. 역시 뭔가 맛이 다르더라.”
최서윤이 배시시 읏었다.
나까지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웃음 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니 괜히 술이 땡긴 다. 특히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 달 게 느껴지는 게 술이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내게 허락된 건 오렌지 주스뿐.
괜히 마음 속으로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데, 그때 최서윤이 눈을 가늘게 떳다.
“저 선배님 방금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무슨 생각 했는데?”
“방금 술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 죠?”
순간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최서윤한테 독심술 특성이 있었던 가?
“……응? 아닌데? 갑자기 무슨 소 리냐?”
괜히 목이 타서 주스를 홀짝였다.
최서윤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술 맛있어요?”
“마시지 않아봐서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선배님, 내년이면 성인이구나.”
내년에 성인이라. 시간이 벌써 그 렇게 됐나.
최서윤이 난간에 몸을 걸친 채 하 늘을 올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왜 그래?”
“아뇨. 학교에서 마주치는 것도 올 해가 마지막이구나 싶어서.”
“그러네. 나 졸업하면 자주 못 보 겠네.”
다시 주스를 홀짝였다.
단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가끔 쓴 술보다는 이런 단 주스도 괜찮은 것 같다.
최서윤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고 개만 내 쪽으로 돌렸다.
“선배님, 저번에 특무팀에 관심 있 다고 했었죠?”
“어, 맞아. 근데 그건 왜?”
“저도 그쪽으로 목표를 잡아볼까 해서요.”
최서윤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진로를 어디로 선택해야 할 지 잘 몰랐는데 요즘 특무팀에 마음 이 기울어서 공부하고 있어요. 돈 벌려면 대형 길드 취업이 최고이기 는 한데 제가 돈 욕심은 별로 없거 든요. 그런 것보다는 사람을 구하는 보람찬 일을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서.”
나는 피식 웃었다.
“너라면 뭐든 잘하겠지.”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그럴까요?”
최서윤이 다시 웃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테라스 아래, 호 텔 앞 공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우연 찮게 익숙한 얼굴을 발 견할 수 있었다.
도도한 얼굴과 갈색 머리의 여성.
다리아 타란이었다.
친목회가 시작되고 자취를 감추더 니, 아예 행사장 밖으로 나간 모양 이었다.
다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청각을 강화하자 목소리 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 제대로 진행되고 있어.
—뭐? 장난해?
—……알았어.
누구와 통화 중인 건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성무제 에피소드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다리아를 뒤에서 조종하 는 빌런이겠지.
나는 주스를 홀짝이며 원작에서 있
었던, 이번 성무제의 에피소드를 천 천히 되짚었다.
원작에 따르면 다리아는 위젠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빌런에게 협박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가족, 어린 남동생을 인질로 삼아서.
빌런이 다리아를 노린 이유는 단순 하다.
성무제에 참가하는 5명의 에이스 중, 가장 약점을 쥐기 쉬웠기 때문 이다.
이서준과 릴리는 외동이었고, 루크 와 양잉은 세계적인 명문 마법사가
문에서 자라왔다.
하지만 다리아에게는 그런 뒷배경 이 없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에 부모를 잃었고 남은 가족이라 해 봤자 남동생 하나뿐이었기 때문이 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동생은 빌런에 게 납치를 당했다.
동생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이 들려 오자 다리아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따르는 것.
결국 그녀는 이번 성무제 에피소드
에서 빌런의 요구에 따라 꼭두각시 처럼 움직이게 될 예정이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비운이 많은 캐릭 터이니까.
끼이익-
그때 테라스 문이 열리더니 한 여 학생이 안으로 들어섰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가끔 마 주쳤던 얼굴이었다.
아마 최서윤의 친구였던 거로 기억 한다.
“어? 아, 찾았다. 서윤아. 여기 있 었어? 찾느라 고생했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이희영 선생님이 너 찾아”
“……어, 그래?”
최서윤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얼른 가봐.”
“네, 이따 다시 봬요!”
최서윤이 웃으며 대답했다.
위젠 호텔 앞 공원.
다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 고 있었다.
[아무튼, 잘해보자고. 너도 딸리 귀 여운 동생 얼굴 보고 싶을 거 아니 야?]
“……그 입 닥쳐.”
[흐흐. 알았어. 아 맞다. 이야기 들 었어. 너네 지금 무슨 친목회 한다 며? 재밌게 즐기고 와.]
뚝
다리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왈칵 눈물이 쏟 아질 것 같았다.
“하아......
다리아는 터벅터벅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스마트 학생 수첩을 켜자 동생의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첩에 들어가 영상을 틀었다.
예전에 찍은 해맑게 웃고 있는 동 생의 모습이 나왔다.
그것을 보자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보고 싶은 감정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된 미안한 감정이 가 장 컸다.
그때 였다.
다리아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 개를 들어 올렸다.
호텔 테라스 3층에, 한 남성이 난 간에 몸을 걸친 채 여유롭게 잔을 홀짝이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다리아는 한 눈에 그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김선우?’
개인적으로 이서준과 함께 이번 성 무제에서 주의해야 할 경쟁자, 1, 2 순위로 꼽던 김선우였다.
대체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거 지? 혹시 통화 내용도 들었나?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으로 가 득찼다.
그때 김선우가 말했다.
“그거 사진, 동생이냐? 귀엽네.”
3층 높이임에도 스마트 학생 수첩 에 떠오른 동생의 사진이 또렷하게 보인 모양이다.
보통 마력 제어 능력으로는 불가능
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어렴풋이 김 선우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잠시, 다리아는 김선우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체 뭘까? 혼자 고민하다가 이상 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김선우가 러시아 말로 말한 것이었다.
그것도 현지인과 다름없는 정확한 발음으로.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자신의 물음에 김선우가 별거 아니 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안 됐어. 애인한테 차인 사 람인 것처럼 심각해 보여서 잠깐 구 경했을 뿐이야.”
그러더니 낮게 깔린, 진지한 목소 리로 다시 말했다.
“다리아.”
그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홈 칫 몸을 떨었다.
“너 무슨 고민 있지?”
“……고민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 슨 소리야?”
“표정이 그래 보이잖아. 아까 오전 에 봤을 때도 우울해 보였고.”
……통화 내용을 들은 건가?
김선우는 그녀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고민 있는 거 맞네.”
“……고민이 있으면 네가 어쩔 건 데?”
그 질문에 김선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고민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털어 놓는 것도 방법이야.”
“누구한테?”
“ 나.”
다리아가 눈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오늘, 너 나랑 처음 만난 거 몰라?”
“혹시 모르지. 네 고민을 내가 해 결해 줄 수 있을지.”
김선우가 한마디를 더 했다.
“……뭐, 생각해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김선우는 호텔 안 으로 들어갔다.
다리아는 멍하니 김선우가 서 있었 던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