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535)

“……전화 안 받아도 돼요?”

“조용히 해봐요.”

한세연의 단호한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전화는 잠시 뒤 꺼졌다.

“음. 이게 잘 안 떨어지네. 먼지가 아니라 무슨 가루 같은데.”

웅성웅성.

이번에는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 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문 쪽

으로 시선을 돌리려 하는데 한세연 이 내 머리를 잡았다.

“기다려봐요. 아직 안 떨어졌다니 까요?”

끼이 익...

그때였다. 나와 한세연이 있는 본 부장실의 문이 열렸다.

나와 한세연은 그 자세 그대로 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휠체어를 탄 나이 든 남성과 그 뒤로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어?”

그리고 한세연은 그들을 보더니 놀 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 니까.

그리고 남자는 의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버지?”

남자의 정체는 한성가의 주인.

한대현 회장이었다.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

173 화

호화로운 고급 한식 요리가 테이블 위로 가득 올라왔다.

올라온 접시 수만 해도 무려 13개.

세 명이 먹기에는 상당히 많은 양 이었다.

이곳은 서울 어딘가에 있는 고급 한식당.

지금 내 맞은편에는 김진철 회장 다음으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졌 다고 알려진 남자, 한대현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불편한 얼굴의 한세연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는지는 아직 도 모르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대현이 먼 저 입을 열었다.

“김진우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마법사라고 했지? 세연이와 만난 지는 얼마나 됐나?”

“콜록콜록!”

물을 마시던 한세연이 사례가 걸린

듯 기침을 했다.

“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시치미 떼기는. 다정하게 딱 달라 붙어 있던 걸 다 봤는데 어디서 발 땜이 냐?”

“그건 진우 씨 머리에……

한대현은 한세연의 말을 자르고 다 시 말했다.

“다시 질문하지. 세연이와 만난 지 는 얼마나 됐나?”

한세연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 얼 굴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한세연 씨와 교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 정중한 말에 한대현이 눈을 찌 푸렸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교제도 안 하 는데 그렇게 딱 달라붙나?”

“아버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진우 씨 머리에 이상한 게 묻어서 떼준 거예요.”

한세연이 다시 나서서 말했다.

그 필사적인 외침에 한대현도 진심 을 느꼈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 아직 교제 중은 아니고 그 전 단계인가 보군. 요즘 말로 썸이라고 하던가?”

한대현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뭐,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자네 를 한 번쯤 만나보고 싶기는 했네.”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고?

내가 의문에 찬 눈으로 바라보자 한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연이한테 들었거든. 자네가 던 전 사업과 선구자의 밤 행사 진행을

말렸다지?"

아, 역시 그걸 알고 있었구나.

“어디까지나 조언만 해줬을 뿐입니다. 직접 움직인 건 한세연 씨죠.”

“조언이라. 조언하기에는 당시에 근거가 너무 빈약하지 않았나? 거의 도박 수준이었던 거 같은데.”

“그건......

“아버지. 근데 어쩐 일로 오신 거 예요?”

그때 한세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끔 대화 흐름을 바꾸려는 모양이었다.

“잠깐 본사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녀왔다. 오는 김에 딸 얼굴도 볼 겸 들린 거고.”

“본사 일은 뭔데요?”

“넌 몰라도 된다.”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시지.”

“ 연락했다.”

“ 언제요?”

한세연이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네 사무실에 전화 한 통 보냈었다. 다만 네가 전화를 안 받았을 뿐

이야.”

전화? 한세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생각난 둣 입을 벌렸다.

“설마 올라오시기 1분 전에 온 전 화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아니, 그건 1분 전이잖아요. 적어 도 10분 전에는 전화해주셔야죠.”

“왜 이리 소란스럽게 굴어? 나 몰 래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냐?”

“아뇨. 그건 아닌데……

한세연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부녀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

봤다.

평소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던 한세 연에게는 볼 수 없는 쩔쩔매는 모습 이라 신선하고 재밌었다.

그때 한대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 다.

“근데 아까 내 질문에 답을 못 들 었는데. 세연이에게 했던 조언.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던 건가?”

한대현의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 물었다.

그가 말하는 조언이란 던전 사업과

선구자의 밤 행사를 말린 것을 말하 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물론 그럴싸하게 지어내서 말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던전이 생성되는 주기를 보고 예상했다던가, 선구자 의 밤 행사에 전시되는 진천우의 검, ‘혹천’은 자운이 충분히 노릴 수 있는 물건이라던가.

아마 이런 대답을 한다면 한대현도 별 의심 없이 넘어갈 테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럴싸한 대답으로 이 상황을 흘려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좀 특별한 대답으로 한대 현 회장의 흥미를 끌어보는 게 좋을 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고민을 마치고 대답했다.

“제가 감이 좋습니다.”

“ 감?”

한대현이 눈을 찌푸렸다.

한세연 역시 살짝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제가 예전부터 감이 좋았습니

다. 웬만해서 틀리진 않죠.”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한대현이 굳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병들어서 거의 다 죽어가는 양 반이라더니 눈빛 한번 살벌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 택이 었다.

한성가는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 고, 막대한 자본을 이용해 수많은 ‘신비’를 수집하고 있다.

그 개수는 아마 몇백 개에 달할 정도.

한성가가 가진 강한 힘.

그 힘은 한대현이 죽은 후에도 유 지된다.

바로 그의 아들인 ‘한세진’에 의해 서.

만약 그 악의 뿌리가 자라기 전에 미리 뽑아내거나 약화할 수 있다면 그 기회는 한대현이 살아있는 지금 뿐이다.

“진심입니다.”

“농담이 지나치군.”

한대현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눈빛에 실망감이 느껴진 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 어린 그의 눈빛이 나 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믿으시는 건 자유입니다. 안 믿으 셔도 상관없고요.”

굳이 지금 설득할 필요가 없다. 여 기서 쓸데없는 말을 늘리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다.

아주 약간의 관심만 끌게 했으면 됐다.

“그럼 그 촉. 시험해도 되나?”

“점쟁이가 아니라서 시험한다고 뭔

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만. 한 번 회 장님의 고민을 감으로 맞춰보겠습니다.”

내 말에 한대현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내 고민이 뭔가?’’

“혹시 과거의 일로 후회를 하고 계 시진 않으신지요?”

그 순간, 한대현의 표정이 급속도 로 굳었다.

잘 빠진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어두운 터널을 지나 앞으로 나아간 다.

한세진은 차 뒷좌석에 앉은 채 초 조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세연이와 식사하고 있다 고요?”

[네, 그렇습니다.]

“아프셔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 시는 분이 왜?”

뭔가 중요한 대화라도 할 게 있는 건가?

한세진은 순간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을 빼놓고 대화를 나누다니.

한성가의 주인이 되는 게 목표인 그에겐 지금 이 상황은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행자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동행자? 그게 누구죠?”

[김진우 마법사입니다.]

“김진우? 아.”

한세진은 김진우의 이름을 떠올렸다.

과거 레스토랑에서 한세연과 함께 식사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저번 사

교 행사에도 한세연을 따라 참가하 기도 했었다.

“그 남자가 거기 왜 있어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세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진우…….

그 남자가 왜 거기 있는 걸까.

설마 아버지한테 애인 소개라도 하 려는 걸까?

애인이라.

생각해보면 그 둘의 관계는 단순한 비즈니스로 보이진 않았다.

사교 행사에도 데리고 다니던 걸 생각해보면 아마 생각 이상으로 가 까운 사이겠지.

저번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더니 역 시 그런 사이였나?

“세연이도 다 컸네.”

애인이 끼어있다는 건 가벼운 자리 라는 것.

아무래도 두 사람의 만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알았어요. 혹시 특이한 점 생기면 바로 연락해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한세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밝혀주던 불빛들이 사라지 며 산과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 래다.

“부회장님, 약 10분 뒤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한세진의 전화기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평소 사용하는 것이

아닌, 비밀스러운 일을 할 때 사용 하는 전화기였다.

[오늘 40분 정도 늦에

엘린의 메시지였다.

아틀란티스에서의 자운 토벌에 실 패한 이후, 앞으로의 계획과 일정으 로 인해 용병단을 소집했다.

현재 한세진이 가는 강원도 별장 방향이 바로 그 소집 장소였다.

[사유가 뭐죠?]

[별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조사하

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조사하다가 늦었네. 미안.]

개인적인 일에 40분이나 기다리게 된다니. 상당히 기분이 안 좋다.

아무래도 오늘 시간 약속과 관련해 서 규칙 하나를 추가해야겠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근데 누구를 조사했습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겨 질문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20초 내로 빠르게 답장 이 왔었는데.

그렇게 메시지창을 끄려는 때였다. 엘린에게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김진우라는 마법사인데 혹시 알 아?]

“......어?”

예상치 못한 이름이 둥장했다.

김진우.

또 김진우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한세진은 멍한 눈으로 김진우라는 이름을 계속 바라봤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이 사람과는 앞으로도 계속 엮이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대현은 본가로 복귀했다. 오랜만

의 외출이 조금 무리였던 걸까. 돌 아오자마자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 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 후우......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오늘 무리 하셨습니다.”

“괜찮다. 곧 죽을 사람 취급하지 마라.”

비서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 들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방 밖으 로 나가라는 제스처였다.

비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한대현은 지그

시 눈을 감았다.

오늘 만난 김진우.

생각 이상으로 특이한 사내였다.

딸이 왜 그와 가까이 지내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그와 했던 대화가 계속 머 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과거의 일로 후회를 하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뭐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얼굴에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데 세상 모든 걸 가진

회장님의 고민은 몇 개 없죠. 병, 불안한 미래, 아니면 되돌릴 수 없는 과거. 뭐 이런 예상되는 것 중에서 감으로 하나 골랐습니다.

—감이 좋긴 한가 보군. 돗자리라 도 피지 그래?

—혹시 남들에게 말 못 하는 사정 이 있다면, 제가 회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한대현은 문득 과거의 기억을 떠올 렸다.

그의 혈육이었던 친형.

자신의 피에 흐르는 탐욕이 저지른

배신.

그는 아주 오래전 한성가를 차지하 기 위해 자신의 친형을 배신하고 짓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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