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 결계는 가주님이 만드신
거군요.”
“그래, 내가 설계했지. 내 딸이 그 녀석 덕에 목숨을 건졌거든. 뭐, 그 것 외에도 몇 가지 빚을 지기도 했고.”
“그 녀석이라고 하시면?”
“진천우다.”
이서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러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예상된 대화 흐름이기에 나는 놀라 거나 하지는 않았다. 침착한 얼굴로 이서준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빚을 졌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싫다. 별로 그 녀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은혜수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그 결계는 특별하다. 네가 며칠 보호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지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리고 그 결계에는 신비가 깃들어서 나라 고 해도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서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뭐, 네 재능이라면 은월가에서 10 년. 아니, 5년간 가르침을 받으면 혼자서 그 결계를 통과할 순 있겠
지. 하지만 네가 이곳에서 5년간 가 르침을 받을 그릇이 아니라는 건 이 미 알고 있다.”
이서준이 깊은 고민에 빠지자 은혜 수가 한마디를 더했다.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뭐죠?”
은혜수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시선 을 돌렸다.
“근데 너도 보호 마법을 익히러 왔 나?”
“예.”
“이서준은 빚이 있으니 받아주겠지 만 너는 아닌데.”
“정식 제자가 돼서 보호 마법만 배 우면 되는 게 아닌가요?”
“이런 도둑놈을 봤나? 보호 마법만 배우겠다고?”
내가 말하고도 조금 양심이 없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실력은 뛰어나니 정식 제자가 되 고 싶다면 받아주마. 하지만 보호 마법만 익히고 도망치는 건 안 된 다.”
그때 이서준이 나섰다.
“제 친구입니다. 어떻게 안 될
“안 돼.”
은혜수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월가의 특수 보호 마법은 꼭 학 교 진천우의 결계가 아니더라도 앞 으로의 전개에 있어 꼭 필요하다.
일반적인 보호 마법이라면 나도 그 냥 포인트를 소모해서 얻어버리겠지 만, 은혜수가 말하는 보호 마법은
조금 특별하다.
이른바 은월 가문의 비기라고 할 수 있는 보호 마법이기에 10만 포 인트는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이 방법까진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 데.
“신비 열병의 치료법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뭐? 방금 뭐라 했지?”
은혜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이내 그녀의 감정은 놀라움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짙은 살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차분 하게 말을 이었다.
“손녀분께서 걸린 병을 제가 치료 할 수 있습니다.”
신비 열병.
길들여지지 않은 신비의 힘이 인간 의 몸에 깃들게 되는 병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리면 가끔 신체의 열이 극심하게 오르며 끔찍한 고통에 시 달리게 된다.
그리고 은월가의 외손녀인 은설아 는 이 병을 앓고 있었다.
참고로 그녀의 병이 치료되는 건
내년 특별반 에피소드 때이다.
“설아가 병에 걸렸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머리 색을 보고 알았습니다. 은은 한 신비가 느껴지는 은발은 신비 열 병의 상징이니까요.”
“……그렇군. 오는 길에 설아를 보 았구나.”
은혜수가 납득 했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신비 열병의 치료 방법은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재료를 얻지 못해서 그렇지.”
“재료를 제가 구할 수 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자세한 건비밀입니다.”
은혜수는 입을 꾹 다물다가 내게 말했다.
“……정말로 신비 열병을 치료할 수 있나?”
“네. 신비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저 나름 마법사 관학교 이론 1위예요.”
그녀의 시선이 이서준을 향했다. 이서준은 갑작스럽게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듯 나와 은혜수를 번 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정신을 차리며 은혜수에 게 말했다.
“선우가 하는 말은 믿어도 괜찮아 요.”
“믿기 힘들지만 단번에 신비 열병 을 알아챈 걸 보니 또 믿고 싶어지 는군. 수많은 의원에게 그렇게 속았 는데도 말이야.”
은혜수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좋아. 믿어보지. 만약 네가 신비 열병을 치료한다면, 은월가는 너를 가문의 은인이라 판단하고 앞으로 네 모든 일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
다. 하지만.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은혜수가 섬뜩한 목소리로 내게 말 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일의 시간을 주세요. 그리고 2일간 손녀분을 빌리겠습니다.”
“2일? 좋다. 설아야! 들어와라!”
“네, 네에!”
그때 문 뒤에서 엿듣고 있던 은설 아가 놀란 목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쭈뼛쭈떗 나와 이서준의 눈치를 보 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설아가 낯을 많이 가린다. 양해해 라. 그리고 너희도 봤다시피 가문에 남자가 별로 없거든.”
나와 이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아이귀한 손님이니 방으로 안 내해라.”
“네. 할머니.”
우리는 은설아의 뒤를 따라 긴 복
도를 걸었다.
은설아는 힐끔힐끔 뒤를 돌며 우리 를 바라보았다.
“이서준 님이랑 김선우 님 맞으시 죠?”
은설아가 큰 용기를 낸 듯 우리에 게 말했다.
“네. 맞습니다.”
“인터넷에서 봤어요. 대단한 분들 이시라고……
은설아의 말에 이서준이 머쓱한 미 소를 지었다.
“대단할 것까진 없는데.”
“저도 내년에 마법사관학교에 입학 하거든요. 할머니는 병 때문에 반대 하셨지만 제가 꼭 다니고 싶어서 우 기고 시험을 봤어요.”
“아. 정말요? 후배 되겠네.”
이서준이 웃으며 말하자 은설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에.”
그렇게 대화가 다시 끊기고 우리는 3분가량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아,
그리고 식사는 하셨나요?”
“네, 식사는 이미 했습니다.”
이서준의 말에 은설아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 김선우 님? 근데 정말로 신비 열병을 치료할 수 있나요? 제 어머니도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돌아가셨거든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 요.”
은설아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안에는 이서준과 나만이 남았다. 이서준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뭔가 잘 사는 시골집에 온 거 같 네.”
“그러게. 되게 근사하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뭐 찾아?”
“침대 없나 해서. 침대 없으면 불 편해서 못 자거든.”
“저번 던전에서는 바닥에서 잘만 자더만.”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때 이서준이 생각났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할 말이 있는 데.”
“뭔데?”
내 물음에 이서준이 진지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아까 진천우 이야기가 나왔잖아. 사실 내 출생에는 진천우가 연관되 어 있어.”
“그러냐?”
“반응이 왜 그래? 안 놀라?”
“아니, 네 재능이 워낙 뛰어나니까 나도 납득한거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무 반 웅이 없는데. 아무튼 원래는 말 안 하려 했는데 김선우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거 같아서.”
이서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 그리고 너 정말로 신비 열병인가 뭔가 그거 치료할 수 있어?”
“몰라. 시도해 봐야지. 대신 너도 도와줘야 해.”
“뭐야? 확신도 못 하면서 가능하다 고 한 거야?”
이서준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 봤다. 나는 그런 그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 좀 위험하지만 해볼 만해.”
회귀한 엑스트라가 천재가 됨
168화
이른 아침.
나와 이서준은 방에서 한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단은 한식이었다.
밥과 생선, 채소 등이 어우러진 식 단인데 각 음식의 조화가 잘 어우러 져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그래서 오늘 계획은 어떻게 되냐? 손녀 병 치료할 거라며.”
이서준이 국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내게 물었다.
“일단 신비 열병에 걸리게 된 정확 한 원인부터 알아야겠지.”
“원인? 원인도 알아야 해?”
이서준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어. 설명하려면 꽤 복잡해. 이따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지금 자세히 설명하기는 입 아프니 까.
내 말에 이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더 니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밥공기에 밥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느덧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참 볼 때마다 신기하다.
저렇게 많이 먹으면 덩치도 커질 법도 한데 어떻게 저런 슬림한 근육 을 유지하는 거지?
“진짜 많이 먹네.”
“그래야 힘이 나니까.”
그렇게 이서준에게 관심을 끄고 다 시 식사에 집중하려는 때였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문 쪽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들려 왔다. 고개를 돌리니 은설아가 희미
한 미소로 서 있었다.
어제는 낯을 가려서 어찌할 줄 모 르는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좀 나아 졌는지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아니, 양쪽 귀가 살짝 상기된 걸 보니 억지로 자연스러운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네. 맛있어서 벌써 거의 다 먹었 네요.”
이서준이 거의 빈 밥공기를 보이며 대답하자 은설아가 작게 웃었다.
“입에 맞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아 참, 어제 제 소개를 안 드렸는데 저는 은설아라고 해요.”
은설아가 꾸벅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했다.
은혜수의 엄격한 예절 교육 때문인 지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품이 느 껴졌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에 이서준은 그녀를 따라 인사했다.
“이서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힐끔 나를 바라봤 다. 마치 넌 인사 안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은 설아에게 인사했다.
“……김선우입니다.”
내 인사에 은설아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 놓으셔도 돼요. 어차피 내년에 두 분 모두 제 선배님이 되 실 텐데.”
“에이, 그래도 아직 입학도 안 했 는데.”
“정말 괜찮아요.”
은설아의 말에 이서준이 고민하더 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사양 않고 편하게 말할 게.”
“네! 그러세요.”
은설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할머니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세요. 식사 마치시면 들리라고 하 시네요.”
“가주님이?”
“네. 제 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 고 싶다고 하셔서……
“음. 그럼 식사 끝내고 간다고 전 해드려. 괜찮지?”
이서준이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던가.”
내 말에 은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전할게요. 그럼 마저 식사하세요.”
은설아는 우리에게 다시 꾸벅 인사 를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내려놨던 젓가락을 집었다.
“마저 먹자.”
“그래.”
시간이 지나 식사를 마친 나와 이서준은 곧바로 가주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 은혜수와 은설아의
모습이 보였다.
은혜수는 오늘도 침상에 반쯤 누워 편한 자세로 있었고, 은설아는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은혜수와 대 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혜수의 얼굴이 워낙 젊다 보니 할머니와 손주의 관계라기보다는 사 이 좋은 모녀처럼 보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은설아는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혜수는 나와 이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식사가 입에 맞았다고 들었다. 그 외 다른 불편한 건 없었나?”
“네, 아주 편하게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
은혜수가 반쯤 누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다름 아니라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렇다.”
“심경의 변화요?”
“그래, 어제는 손녀의 병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감정적으로 대했다. 아 직 성년도 되지 못한 애송이의 말에 홀려서 말이야.”
은혜수가 내 눈을 똑바로 웅시하며 말했다. 그 눈빛에서 강한 불신의
감정이 느껴졌다.
“……인제 와서 못 믿겠다는 겁니 까?”
“그래,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차분 해지니 생각이 바뀌었다. 근거도 없는 놈한테 병을 고쳐주겠다는 이유 로 손녀를 빌려 달라는 걸 수락하다 니. 나도 참 우습지.”
뭔가 상황이 안 좋게 홀러간다.
확실히 어제는 내 예상보다 일이 술술 풀려가서 조금 불안한 감이 있 었는데 역시는 역시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럴싸한 말로 설득시키는 수밖에.
“손녀분께 어제 특이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은혜수가 의문 에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옆의 은설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야기?”
“손녀분의 어머니가 ‘신비 열병’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요.”
은혜수가 입을 꾹 다물더니 내게 말했다.
“그래, 내 딸은 신비 열병에 죽었다. 그래서?”
“병이 유전으로 이어지는 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신비 열병’은 아 니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나도 모른다.
그냥 그럴싸하게 지어내서 말하는 거니까.
“신비 열병은 인간의 피에 ‘신비’ 가 닿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또 신비 열병은 전염되지 않죠. 유전으로 이어지지도 않고요. 지금 까지 그런 사례가 없으니까요.”
“……그래. 그것 역시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