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535)

자칫 여유로운 내 말에 한세연이 나를 따라 작은 술잔을 비워냈다.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을이네요.”

한세연이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뭇잎이 아주 미세하 지만,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가을 타나 봐요. 요즘 어릴 적 추 억이 자주 떠오르거든요.”

갑자기 뜬금없는 어릴 적 추억 얘 기를 한다.

“저는 어릴 적부터 부족한 거 없이 자랐어요. 이유는 단순했죠. 원하는 게 생길 때마다 오빠가 전부 해줬거 든요. 아마 남들의 시선엔 다정한 남매로 보였겠죠. ”

나는 한세연을 바라봤다. 대체 무 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이유 를 깨달았어요. 오빠는 저를 세뇌한 거예요. 원하는 건 전부 해줄 테니 까 한성그룹은 넘보지 말라고. 자신 의 것이라고.”

한세연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으로 술잔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 는 욕심이 아주 많아요. 아주 탐욕 적인 사람이죠. 나이를 먹다 보니 점점 갖고 싶은 게 많아지더라고요.

어느 날 큰 정원이 있는 집이 갖고 싶었는데 오빠에게 집을 사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안 된대요.”

한세연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오빠는 내게 모 든 걸 줄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는 사람 이 되려면 한성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녀가 가진 강한 탐욕은 이미 알 고 있었다. 원하는 게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려 한다.

그게 돈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한세연은 한성가의 피를 그 누구보

다 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니까.

“그냥, 갑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너무 뜬금없었죠?”

한세연 살짝 웃으며 빈 술잔을 따 랐다. 이내 다시 내 눈을 바라봤다.

“그쪽은요? 그쪽 어릴 적 이야기도 해줘요.”

한편, 서울 어딘가의 브랜드 커피 점에서 최서윤과 송승아는 함께 이 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원래 토요일이 되면 항상 본가로 내려가 훈련하던 최서윤이었지만, 시험 기간이 가까워지자 집안의 허 락을 받고 이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송승아는 한참 공부에 빠져 있다가 슬쩍 최서윤을 바라봤다.

“근데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뭐가?”

송승아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 읏했다.

“아니, 실기 준비해야 하는데 이론 공부할 때가 맞냐고.”

“……난 실기 자신 있으니까.”

최서윤이 교과서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송승아는 눈을 찌푸렸다.

“뭐야? 계속 같이 공부하자더니 나 만 손해 본 거 아니야.”

최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 많으니까 쉿.”

그 모습에 송승아는 괜히 심술이 들었다.

“아, 모르는 거 있는데 김선우 선 배님한테 물어볼까. 공부 가르쳐 달 라 하면 알려주시려나.”

순간 필기를 하던 최서윤의 손이 멈칫했다.

“김선우 선배님?”

“어, 공부 잘하시잖아.”

“……백프로 무시당할걸.”

그 말을 끝으로 최서윤이 다시 필 기에 집중했다.

“혹시 또 모르지. 아, 아닌가. 하긴 요즘 인기 많더라. 그러고 보니 예 전에 김선우 선배님 스토커 사건도 있었잖아. 이야. 그 사람은 예전부터 김선우 선배님의 진면모를 알고 있 던 거네.”

“……스토커 사건?”

생각났다. 아주 작은 해프닝처럼 지나갔던 김선우의 뒷광고 사건.

인터넷에서 한 유저가 댓글로 김선 우를 광고하다가 걸린 특이한 사건 이었다.

다행히 김선우가 자신의 스마트 계 정을 인증하며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 계정은 그날 이후로 활동을 중지 했다.

학교 내부에서 스토커에 대한 관심 이 커지자 겁을 먹고 활동을 중지했 다는 게 대다수 학생의 의견이었다.

“왜 그 선배한테 스토커가 붙은 건

지 생각을 해봤는데 그럴 만한 이유 가 있었네. 그 사람도 참 대단하다. 결국 안목이 뛰어났다는 거잖아. 그 치?”

“……어, 그러네.”

그렇게 대답하고는 최서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토커 사건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김선우의 실력을 진작 알고 있으면 서 가까이에 지내는 사람.

그러다 며칠 전 학교 공원에서 있 었던 일을 떠올렸다.

김선우와 유아라의 야밤의 밀회 (?).

생각해보면 유아라는 김선우의 실 력을 예전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비밀 같은 것도 공유하는 듯싶었고.

혹시 유아라 선배님이…….

……는 절대 아닐 거다. 이건 100% 확신한다.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이 왜 그런 시간에 만났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다.

“ 흐음......

최서윤의 표정이 자칫 심각해지자 송승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최서윤의 시선 끝 창가에 한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크를 쓴 갈색 머리의 한 남성이었다. 그 옆에는 마스크와 선글라 스를 쓴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여 성이 함께 있었다. 무슨 연예인 커 플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묘하게 남성의 모습이 익숙 했다. 멀리서 봐서 그런 걸까.

……착각이겠지.

최서윤은 신경을 끄고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집으로 돌아온 한세연은 샤워를 마 치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멍하니 눈을 감다가 오늘 있었던 김진우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쪽 어릴 적 이야기도 해줘요.

잠시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기던 김진우.

그리고 무겁게 열린 입에서 나온 말.

—평범했어요. 평범한 가정, 평범한 환경.

입으로는 평범하다고 말하고 있지 만 그 목소리에는 묘한 떨림이 느껴 졌다. 마치 그리운 과거를 추억하듯 쓸쓸한 눈빛이었다.

마치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그래요? 취미 같은 거는요?

-책을 좋아했어요. 소설을 많이 읽었죠. 그것 때문에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 음. 네, 그랬죠.

김진우의 과거는 예전에도 조사해 봐서 알고 있었지만 나오는 것이 하 나도 없었다.

나온 거라고는 고작해야 이름과 같 은 아주 기본적인 정보뿐.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아하니 과거 가 없는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가족은요?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두 분. 끝이에요.

한세연은 소파 앞 테이블의 서류를 집었다.

마법사관학교 학생들의 명단이 적 힌 서류였다.

사르륵. 종이를 넘기다가 한 학생 의 이름을 찾았다.

[김선우]

사진 속 눈이 참 닮았다. 혹시 김

진우와 뭔가 관련이 있는 건 아닐 까. 숨겨진 동생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김진우가 자신에게 했던 말.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술기운에 나오는 진심 어린 추억 얘기였다.

집안 자체도 평범했던 것 같고.

한세연은 서류를 다시 테이블에 내 려놨다.

김선우가 김진우와 관련이 없다면 이제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상위권 학생들에게 집중하자.

……일단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기숙사가 아닌 나의 집. 서울의 아 파트.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기분이 좋아 서 한세연과 신나게 마셔버렸다.

그 과정 중에 쓸데없는 말을 해버 린 것 같기는 한데, 김선우도 아니 고 김진우의 신분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득 기숙사에 혼자 있을 그레텔이 생각났다.

혹시 내가 안 들어와서 외로워하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술을 많이 마셔버려서 만약 학생과 마주 치게 된다면 술 냄새를 감지하고는 큰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최근 나에게 친한 척하는 녀석들도 많아져서 더 위험하기도 하고.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 가 침대에 누웠다.

다음 주부터 1차 중간시험이 시작 된다. 1학기 때와는 마음가짐이 다 르다.

1학기 때는 그저 성적만 올리자는 생각만 했다면, 지금은 높아진 성적 덕에 하나의 가능성이 생기며 뚜렷 한 목표가 생겼다.

올해 안에 종합 5위 안에 드는 것.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메인 시험인 대장전에서 이서준을 꺾어야 한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이서준은 원작에서 단 한 번도 시

험의 1등을 내준 적이 없는 녀석이 다.

물론 가끔 수행 평가에서 2등이나 3등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시험에서는 항상 1등을 유지했다.

그런 이서준을 꺾어야 한다.

나는 외부자의 혜택을 발동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능력치를 확인했다.

[능력치] 체력 : 70.8

근력 : 59.6

마력 : 49.5 속도 : 37.9 순발력 : 57.1 손재주 : 29

“와. 나 많이 성장했구나.”

마력이 어느덧 49를 넘어섰다.

내 초창기 마력이 21이었는데. 2배 가 넘는 수치였다.

체력은 무려 70이나 된다. 이러다

언젠간 100도 넘어버리겠는데.

그만큼 열심히 한 것도 있겠지. 훈 련도 안 쉬고 빌런들까지 처치하며 열심히 해왔으니까.

다음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보유 포인트 : 95,000]

“9만 5천 포인트라.”

포인트도 제법 많이 쌓였다.

룬의 결계를 구매하고 포인트가 바 닥난 지 겨우 두 달쯤 된 것 같은 데 빨리 쌓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엄청 나게 눈에 띄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이제 슬슬 포인트를 이용해 무언가 를 구매할 때가 되었다.

중간시험을 대비해 특성이든 스킬 이든 뭐든 구매하는 게 좋겠지.

[포인트 상점에 입장합니다.]

그럼 오랜만에 쇼핑이나 해볼까.

외부자의 혜택으로 구매할 만한 건 크게 두 가지다.

특성, 아니면 스킬.

하지만 다음 주가 중간시험인 만큼 대량의 포인트를 획득할 여지가 있 기에 너무 비싼 특성은 사지 않으려 한다.

포인트를 아껴서 더 좋은 특성을 구매하는 게 좋을 테니까.

생각해둔 등급은 B등급.

A등급은 포인트 부담이 좀 심하 고, 역시 B등급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분류에 ‘B등급’을 추가합니다.]

수많은 특성과 스킬 목록이 눈앞에 나열되었다.

무엇을 볼까 쭉 둘러보다가 스킬 하나를 선택했다.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스킬이었다.

[순간 가속(B)]

설명 : 육체의 움직임이 순간 폭발 적으로 빨라집니다.

[사용 효과]

►순간 가속

마력을 사용하여 2초간 순간 가속 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3분

가격 : 30,000

순간 가속.

말 그대로 육체의 움직임을 순간 가속해주는 스킬이다.

2초라는 짧은 지속 시간과 3분이 라는 재사용 대기시간을 갖고 있지 만, B등급 특성인 걸 생각하면 나름 나쁘지 않았다.

위기상황에서 도망치기도 좋고, 추 격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쫓기도 좋다.

또 순간적으로 빨라진 움직임을 보 일 수 있으니 결정적인 상황에 강한 유효타를 먹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대장전에서의 내 역할은 ‘대장’이다. 남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닌 생존 하는 것이 목표인 만큼 이 스킬은 이서준 같은 강자를 상대 로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역시 이게 좋겠네.”

다른 스킬이나 특성도 둘러봤지만, 이 가격대에서 생존에 쓸만한 건 딱 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순간 가속(B)’을 구매했습니다.]

환한 빛이 떠오르더니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본능적으로 특성의 사 용법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됐다.”

당장 나가서 실험해보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나는 포인트 상점의 ‘기본 스텟 상 점’에 들어갔다.

[기본 스텟 상점]

►체력 o.l - 100포인트

►근력 0.1 - 100포인트

►마력 0.1 - 100포인트

이제 슬슬 스텟을 구매해볼 때가 됐다.

지금까지 내가 기본 스텟을 구매하 지 않은 건, 처음 구매할 때 효율이 상당히 좋기 때문이다.

마력이 쌓이고 성장의 한계가 와도 고정 수치의 마력을 얻을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성장의 한계가 생길 때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마력은 49.5다.

슬슬 성장세가 느려질 시기가 왔다 는 이야기다.

“흠.”

0.1 당 100포인트.

10회 구매마다 10포인트씩 상승하 니까, 1만 포인트면 얼마나 얻을 수 있지?

머릿속으로 혼자 계산하다가 답이 나왔다.

“8이네. 1만 800포인트로.”

가성비 자체는 역시 상당히 뛰어나

다.

나중에 성장이 막힐 때 또 사용해 야 하니까 일단은 1만 800포인트 정도만 구매해볼까.

[마력을 구매했습니다.]

[마력이 상승합니다.]

[기본 스텟 상점의 ‘마력’이 0.1 당

180포인트가 되었습니다.]

[‘1 만 포인트 이상 스텟 구매’ 업 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

다.]

다시 한번 환한 빛이 눈앞에 떠오 르더니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마력의 활력이 느껴졌다.

굳이 능력창을 확인하지 않아도 마력이 상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력치]

체력 : 70.8

근력 : 59.6

마력 : 57.5 속도 : 37.9 순발력 : 57.1 손재주 : 29

“제대로 됐네.”

마력이 49.5에서 57.5로 상승했다.

이 정도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최상 위권 수준이다.

물론 이서준이나 유아라 같은 괴물

과는 아직 비교할 순 없겠지만 나는 어차피 마력의 체급으로 승부 보는 타입도 아니니까.

“흐흐.”

나는 조용히 웃다가 다시 문을 열 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향한 곳은 아파트 2충의 마법사 전용 훈련장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주말 오전

이라 그런지 학생들과 따로 마주치 거나 하지는 않았다.

“김선우?”

그렇게 기숙사 방향으로 쭉 걷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트레이닝 복에 모자를 눌러쓴 유아라가 서 있었다.

호흡이 거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침부터 운동한 모양이다. 주말 아 침부터 참 부지런하다.

“뭐야? 너 이제 오는 거야?”

“어…… 뭐, 그렇지.”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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