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제약. 뭐, 영약 같은 것도 제공해준다는 데? 신약 개발했다면 서.”
“그래? 그럼 한세연도 만날 수 있 냐? 저번에 실물 보니까 장난 아니 더만.”
“그건 모르지.”
그렇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주머니 속 스마트 학생 수첩에서 알 람이 울렸다.
[이따 방과 후 9시쯤에 시간 돼?]
9시? 누가 보냈나 싶어 발신인을 확인하는데 의외의 인물이 적혀 있었다.
‘유아라’.
나는 시선을 돌려 유아라의 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 1초. 유아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내 유아라는 획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공부에 빠져들었다.
한성 제약 본부장실.
한국 마법사관학교와의 후원 관련 미팅을 마친 정 팀장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한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정 팀장님, 수고하셨어요.”
“하하. 아닙니다. 본부장님이야말로 신약 개발에 바쁘실 텐데. 체력이 참…… 정말 존경합니다.”
정 팀장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품 안에서 서류 하나를 꺼 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이번 마법사관학교 후원 예비 명 단입니다.”
“모든 학년인가요?”
한세연은 명단을 쭉 확인했다.
“네, 맞습니다. 각 학년별 종합 순 위 5위권 학생들을 모았습니다. 그 외 특별 재능인 학생들과 잠재력 있 는 학생들도 따로 추렸습니다.”
“흐음. 우선 여기 최서윤, 이서준, 유아라, 김창현. 이 네 명은 확정이 네요.”
“네, 학교 측에서도 검증된 학생들 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군요. 그리 고 세계에도 이름이 알려진 학생들
인 만큼 후원 홍보 효과도 생각했고 요.”
한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서윤, 이서준, 유아라, 김창현.
전 세계가 칭송할 만큼 뛰어난 천 재성을 가진 이들은 한세연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학생들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학생들을 후원하는 것보다는 더 큰 홍보가 되겠지.
“확실히 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 과는 다르긴 하죠.”
그렇게 서류를 넘기던 한세연의 손 이 잠시 멈추었다.
한 남학생의 사진이 그녀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사진이 작아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 하기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눈이…… 그러니까 자신이 아는 누 군가와 많이 닮았다.
누굴까 싶어서 순위를 확인했다.
“……20위?”
“아, 김선우 학생 말씀하시는 거 죠? 20위라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 습니다.”
“김선우?”
슬쩍 명단의 이름을 바라봤다.
우연일까. 이름도 묘하게 비슷하다.
“네, 요즘 가장 핫한 학생이라고 합니다. 성적 상승 폭이 엄청나다고 학교 측에서 극찬하더군요. 거기다 공부를 정말 잘한다고 합니다. 학교 최초 3연속 이론 만점자라고 하니. 참 대단한 학생이죠.”
한세연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김선 우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정 팀장은 그 모습을 보더니 괜히 불안감에 말을 덧붙였다.
“하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 디까지나 후보니까요. 성적 상승 폭
이 아무리 높아도 웬만하면 5위권 학생들을 후원할 생각이니……
“정 팀장님.”
“네?”
“아직 기간이 좀 남았는데 더 지켜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후원 은 태휘제 때 하는 거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세연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곧 중간시험이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 당장 종합 순위보다 는 이번 시험 결과도 참고하자는 거 죠.”
“아, 그렇긴 하죠. 꾸준함도 중요하 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승자가 누구냐니까요.”
정 팀장의 말에 한세연이 미소를 지었다.
“네, 일단 참고용으로 보류해 놓고 이번 시험 결과 보고 결정하죠.”
모든 수업이 끝난 밤 9시.
나는 발현계 훈련장 앞 공원 벤치 에 앉아 있었다.
시험 기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공 원은 아무도 없어 한적했다.
확실히 가을이 왔는지 공기가 쌀쌀 해지긴 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크게 하품했다.
“선배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복 위에 무릎까지 오는 커다란 후드티를 걸쳐 입은 최서윤이었다. 손에는 무슨 봉지가 들려 있는데 과 자인가?
“와~ 여기서 선배님을 마주치네. 혼자 뭐 하세요?”
최서윤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냥 뭐 좀 기다리고 있어.”
“기다려요?”
최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물어보려는 사이 내가 먼저 입을 열 었다.
“넌 어디 가냐?”
“저는 이제 훈련장 가려고요.”
“이 시간에? 여태 뭐 했는데?”
“과제 했어요. 희귀 몬스터 생태 관련해서…… 아, 혹시 혹산 괴물 곰이 어디서 자는지 아세요? 다른 건 다 조사했는데 이걸 모르겠어
서.”
“절벽 강가의 300m 안 바위 동 굴.”
“오. 역시! 아 진작 물어볼걸. 검색 해도 안 나오던데 어떻게 아시는 거 예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최서윤은 배시시 웃다가 내게 무언 가를 입가에 내밀었다. 길쭉한 빼떼 로 모양의 과자였다.
“이건 보답.”
“야. 나 과자 안 좋아해.”
“아, 그냥 먹어요. 왜 이리 까다로
워. 아〜 해요.”
괜히 민망함이 느껴져서 주변 눈치 를 살피다가 입에 물었다.
최서윤은 나를 보더니 혼자 쿡쿡 옷는다. 난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얘 요즘 왜 이리 친근하게 굴 지.
그렇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사이.
“미안 좀 늦었네.”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나와 최서윤의 시선이 그쪽 으로 돌아갔다.
얕은 바람에 홀날리는 혹발.
내 약속 상대인 유아라가 서 있었다.
최서윤은 유아라를 보더니 잠시 몸 을 멈칫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
유아라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 아줬다.
최서윤은 나와 유아라를 번갈아 바 라보더니 말했다.
“기다리신다는 게 유아라 선배님이
셨구나.”
“어, 맞아.”
“음……
표정이 묘하게 어둡다. 공원 조명 이 어두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왜?”
“아, 아뇨. 전혀 예상 못해가지 고…… 아!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세 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어어.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최서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아라는 묘한 눈으로 최 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 3초간 지 긋이 나를 본다.
“……능력도 좋네.”
“뭔 능력?”
내 물음에 유아라는 대답하지 않았 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이번 중간시험. 나 꼭 이기고 싶 어.”
평소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건 다들 그러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 이서준한테 제대로 이기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터벅터벅 내 옆에 앉았다. 섬유 향인지 아니면 체력 단련 후 씻은 것인지 좋은 향이 코 를 찔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결연한 눈 빛이었다.
“이서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이서준을 어떻게 생각하냐라.
“대단한 애지.”
단순하고 짧은 대답이었지만 이것 말고는 그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유아라 역시 그걸 알고 있는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맞아. 대단한 애지. 그리고 걔한테 항상 지기도 했고.”
나는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봤다. 유아라가 이서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고 있었다.
“이번엔 이기고 싶어. 그리고 기회 라고 생각해. 1등 할 기회.”
밤하늘을 올려보던 유아라의 시선 이 다시 나를 향했다.
“김선우. 네가 대장해.”
나는 유아라를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다.
아니, 아예 생각하지 않았냐고 하 면 그건 또 아니지만.
“내가 대장 하는 것보다는 공격조 에서 최대한 상대 숫자를 줄이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내 말에 유아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왜‘?”
“……대장, 믿고 맡길 사람이 너 밖에 생각 안 난단 말이야.”
얘가 뭐라는 거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너무 감정적인 선택 아니야?”
“아니야. 계획은 있어.”
유아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계획이라. 그게 뭘까.
“어떤 계획인데?”
유아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창한 건 아니야. 진짜 단순하거
든. 너랑 나니까 가능한 무식한 전 략.”
유아라는 내게 자신이 구상한 전략 을 설명했다.
유아라의 말대로 진짜 단순하고 무 식한 전략이기는 했다. 오히려 너무 무식해서 상대 팀도 예상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렇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 었다. 다름 아닌 나와 유아라니까.
말 그대로 나와 유아라니까 가능한 전략.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 였다.
“알았어. 내가 대장 할게. 해보지 뭐.”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지만 유아라 가 이서준을 이기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 이서준을 이겨보고 싶은 마음 이 있다.
무엇보다 나도 급한 상황이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무슨 수를 써 서라도 5위 안에 들어야 하니까.
“네 말대로 한 번 이겨보자. 이서준.”
유아라가 피식 웃었다.
“타도 이서준.”
타도 이서준이라. 재밌네.
“그래, 타도 이서준.”
시간이 또다시 빠르게 흘러 토요일 이 되었다.
평소와 같이 빌런 퇴치를 하며 소 소한 포인트 벌이와 인과율을 쌓았 다. 이런 삶도 계속 반복되다 보니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임에도 아무 렇지 않게 되었다.
익숙해지는 건 좋지만 관성이 되면
안 되는데.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친 나는 서울 의 고급 한식당을 찾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갈색 스웨터를 입은 한세연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자 리에서 일어났다.
“진우 씨.”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어서 앉 아요.”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음식을 주문했다.
직원이 방 밖으로 나가자 한세연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예약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아서 2주 전에 빈 시간대 로 예약했어요.”
“그래요?”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드디어 얻어먹네요. 그 쪽한테 언제 얻어먹나 기다렸는데.”
한세연이 들떠 보이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 말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 으켰다.
한세연이라는 사람과 단둘이 식사 할 기회는 정말 혼하지 않다. 아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그것 을 꿈꾸겠지.
그게 개인적인 사심이든, 비즈니스 쪽이든 간에 말이다.
“최근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요. 큰돈을 빌리기도 했고. 뭐, 여러 가 지로 고마운 게 많아요.”
“그래도 금방 갚으셨네요?”
“네, 뭐. 일이 잘 풀렸습니다.”
땅을 사고 여기저기 투자했던 일들 도 잘 풀려서 돈을 빨리 모았다. 내 목표는 이미 달성했기에 빠르게 돈
을 갚을 수 있었다.
“근데 사실 고마운 건 저예요. 그 쪽이 준, 일월약학서. 저한테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역시. 내 예상대로 최근 뉴스에서 신약 개발이 언급되는 건 일월약학 서의 영향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뉴스에서 신약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같이 언급되는 이야기를 떠올 렸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한대현 회장님 건강 상태는 어떻 습니까?”
“……아버지요?”
내 질문을 예상 못 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사실 뉴스 내용처럼 딱히 좋 아지거나 하진 않았어요. 근데 좋아 질 가능성은 아주 조금이나마 커지 는 것 같아요. 약을 연구하면서 점 점 힌트를 얻고 있거든요. 제 하기 나름이겠죠.”
뉴스에 전해지는 소식에 비해 큰 진척은 없는 모양이다. 혹시 한대현 의 병이 치료되나 싶었는데 그건 아
니었나.
한대현 회장의 수명이 얼마 안 남 았을 텐데 괜히 일월약학서 때문에 희망을 준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들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예의상 그렇게 말하자 한세연이 말 했다.
“아무튼 요즘 이래저래 바빠요. 아 버지 건강에, 신약 개발에 사업도 해야 하고 마법사관학교 후원 일정 도 있고.”
마법사관학교 후원 일정.
나름 원작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지
는 내용이다.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후원이라 하시면?”
“아, 한성 제약 고객층 절반 이상 이 마법사잖아요. 그래서 학교에 후 원도 하고, 유망한 학생들도 따로 추려서 추가 지원 같은 걸 하려는 거에요. 말이 후원이지 사실 홍보 효과를 노리는 거고요.”
“후원이라. 좋죠. 이미지 형성에도 좋고.”
나는 물을 홀짝 마시다가 물었다.
“관심 있는 학생은 있습니까?”
“네, 음. 이서준 학생은 알죠?”
“당연히 알죠.”
이 세계에서 이서준을 모르는 사람 은 없을 만큼 유명하니까.
“일단 그 학생은 확정됐어요.”
원작과 동일한 흐름…… 이라고 하 기에는 그냥 당연한 거겠지.
유망한 학생들을 후원하겠다는데 이서준을 후원하지 않으면 누굴 후 원할까.
“그리고 다른 상위권 학생들 위주 로 뽑을 예정이긴 해요. 일단 곧 중 간시험이라고 하니 그때를 지켜봐야 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다시 문이 열리며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음식들.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한세연은 또 언제 술을 시켰는지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어째 나만큼이나 술을 좋아 하는 것 같다.
술잔을 바라보다가 한세연에게 시 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묘하다.
마치 나를 관찰하는 것 같다고 해 야 할까?
“근데 학생 중에 이상하게 제 눈에 띄는 학생이 있어요. 단순한 착각인 건지 그걸 모르겠네요.”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달달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나도 눈치가 있다. 저건 ‘김선우’를 말하는 거다.
아마 ‘김선우’와 ‘김진우’가 연관 관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겠 지.
“어떤 학생인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