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이 들리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씨익 웃자 한세연이 말을 이었다.
“대신 수염만 좀 밀어요. 머리는 이쁜데 수염은 언제 봐도 별로예 요.”
나는 인조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 했다.
“이건 포기 못 합니다.”
“칫
한세연은 혀를 차더니 손바닥을 펼 쳐 내 입 주변을 가렸다.
그러더니 몇 초간 빤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뭐합니까?”
“아, 아뇨. 수염 가려서 보니까 생각보다 더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서……
한세연이 말 끝을 흐리듯 조용히
중얼거리며 손을 내렸다.
“마법사 세계에서 어려 보이면 얕 보입니다.”
“……네네. 그래요.”
한세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한세연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일찍 왔다뇨. 저번에 한 번 늦은 거 가지고 맨날 늦는 것처 럼 말하기 있어요?”
한세연이 찌릿 나를 사납게 쳐다봤 다. 어째 만날 때마다 그녀의 표정 이 다채로워지는 것 같다.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신뢰가 중요하니까 그러죠. 제가 신뢰에 얼마나 목숨 거는데.”
“당연히 알죠. 한세연 씨의 신뢰.”
원작의 한세연을 떠올리며 진심으 로 한 대답이었지만 한세연은 내가 대충 대답했다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 받아요.”
한세연이 내게 작은 케이스 가방을 내밀었다.
“아, 저번에 말하던 선물?”
“네, 맞아요. 던전 호텔 사업 관련
으로 그쪽한테 신세도 지긴 했으니 까……
우물쭈물 중얼거리며 한세연이 말 했다. 어쩐지 한세연답지 않게 자신 감이 없는 모습이다.
“기대되네. 열어봐도 되죠?”
“네, 근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 에요. 기대하지 마요.”
나는 피식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YKH 여름용 남성 수트(A)]
분류 : 의상
설명 : YKH사의 남성 수트
[지속 효과]
►맞춤형
사용자의 몸에 맞게 변화합니다.
►여름 기능
바람이 잘 통합니다.
외부의 열을 차단합니다.
내구도 : A
“오.”
여름용 정장이었다.
안에 달린 효과를 보아하니 가격도 제법 나갈 것 같다.
옵션이 두 개면 일반 의복이라 할 지라도 억대에 가까워지니까.
“이번 선구자의 밤 때 입으시라고 준비했어요. 저번에 선물한 건 지금 입기에는 덥잖아요.”
“고마워요. 마침 필요했는데.”
진심이었다. 최근 이어지는 폭염에 꽤 힘들었는데 이 옷이라면 분명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웃으며 품에서 수정 목걸이를 내밀었다.
“자, 받으세요.”
“이건 뭐예요?”
한세연이 수정 목걸이를 보며 중얼 거렸다.
“선물이에요.”
이건 악몽의 안개 던전에서 얻은 ‘수정 골렘의 결정’을 이용해 만든 목걸이였다.
손재주를 상승시켜주는 효과가 있 는데, 손재주는 포션 제조에도 중요
한 능력치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한세연이 사용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넘겼다.
한세연은 목걸이를 보더니 놀란 표 정을 지었다.
“왜요?”
“아, 아뇨. 그쪽한테 악세사리를 선 물 받아보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 해서.”
한세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착용해보세요. 손재주 상승에 도 움 될 거예요. 그렇게 큰 변화는 없 겠지만요.”
내 말에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이더 니 목걸이를 착용했다.
푸른 빛으로 빛나는 수정이 제법 어울렸다. 물론 한세연에게 어울리 지 않을 장신구가 있겠냐만은.
유심히 목걸이를 살펴보던 한세연 이 물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던전 보상으로 얻은 수정을 제가 목걸이 형태로 직접 만든 거예요.”
“아. 그래서 마감이……
“마감이 좀 삐뚤삐뚤하죠? 제가 손 재주가 그렇게 좋지 못해서.”
한세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 개를 저었다.
“아뇨.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이제는 제법 마법사 태가 나는구 나.”
서울 마법사 협회 최상층에 있는 마법 대련실.
김진철이 맞은편에서 숨을 헐떡이 며 서 있는 이서준에게 말했다.
“허억…… 할아버지는 어째 나이
가…… 드실수록 더 강해지시는 것 같아요……
“쯧. 내가 강해지는 게 아니라, 네 실력이 늘수록 조금씩 본 실력을 더 보여주는 거다.”
김진철의 말에 이서준이 허탈한 표 정을 지었다.
“……할 말이 없네요.”
“됐다. 너도 한계인 거 같으니 대 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넵.”
이서준은 바닥에 앉아 10초가량 숨을 가다듬었다. 이내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철은 이서준을 힐끔 보더니 말 했다.
“특별반 수업인가 뭔가 그거는 재 있었냐?”
김진철의 물음에 이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태풍이 불어서 잠깐 특별 한 상황이 생겼었는데 그 이후에 바 다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재밌게 보 냈어요.”
“그러냐. 잘 됐구나.”
김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여기 데려오려다가 실
패한 그 친구 놈도 특별반 수업에 나왔냐?”
김진철의 물음에 이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데려오려다가 실패한 친구?
“아. 선우요? 네, 걔도 나왔어요.”
“허허. 내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거절하더니 그런 건 나와?”
김진철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S등급의 마법사라 해도 줄을 설 것이 분명한데, 일개 학생에게 거절당한 것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놈은 아니구나.”
“……뭐, 그렇죠. 선우가 특이하긴 해요.”
“서준이 네가 경쟁자라고 느낀다길 래 뭐 하는 놈인지 보려 했건만. 쯧. 아쉽군.”
“어쩔 수 없죠.”
이서준이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머리의 땀을 닦았다.
“그럼 훈련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 요.”
“그래라.”
이서준은 김진철에게 고개를 숙이 며 인사한 뒤 대련실에서 나왔다.
이서준은 복도를 쭉 걸었다. 엘리 베이터를 타고 마법사 협회 내부 24충에 있는 ‘기록 보관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특수한 마법 장치 로 이루어진 결계가 그의 입장을 막 았다.
이서준은 품 안의 협회원 인증 마 도구 카드를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서준’님 확인되었습니다.]
결계가 사라졌다.
이서준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동그란 원형 공간. 벽에는 복잡한 마법 수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앙의 구슬에 마력을 주입하자 벽 에 그려진 수많은 마법 수식이 강한 빛을 뿜어냈다.
[‘아카이브’를 활성화합니다.]
[원하시는 문서의 이름을 말씀하십 시오.]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이서준은 잠 시 입을 다물었다.
며칠간 그의 머릿속을 심란하게 만 들었던 그 이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진천우.”
[‘진천우’ 문서 등급은 ‘극비’입니다.]
[이서준 님의 협회 등급이 낮아 열 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열람 가능한 문서만 공개합니다.]
“쳇.”
이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극비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 만 직접 들으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진천우. 대체 뭐 하는 인물이길래 이렇게 감춰져 있는 걸까.
[진천우, 남성. 범죄 마법 조직 자 운의 리데
“……나오는 게 없네.”
이 정도면 인터넷에 검색하는 것보 다 정보가 부족하다.
“홈.”
역시 할아버지에게 물어야 하는 걸 까. 하지만 그는 이서준에게 단 한 번도 진천우의 이름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협회 내부에서도 김진철 회 장에게 진천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서준은 김진철에게 진 천우의 이야기를 섯불리 할 수가 없었다.
“……활성화 종료.”
[‘아카이브’ 활성화를 종료합니다.]
정보가 제한되어있는 만큼 이곳에 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김진철의 마법사 협회 카드를 홈친 다면 모를까.
하지만 김진철의 물건을 홈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서준은 스마트 학생 수첩을 꺼내 인터넷에 ‘진천우’를 검색했다.
늘 보았던 평범한 기록들.
그때 맨 위에 떠 오른 기사가 하 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운의 전 리더 진천우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8월 10일 사교 행 사 ‘선구자의 밤’에 전시]
같은 시각, 여명의 칼날 본부.
문이 벌컥 열리며 잘생긴 청년, 정 재원이 들어왔다.
“누나! 선구자의 밤 초대장 구했
어!”
정재원의 말에 유아연이 고개를 들 었다.
“잘했어. 몇 장 구했어?’’
“총 4장. 누나 이름 말하니까 행사 주최 측에서도 그냥 쉽게 주더라. 불의 마녀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면 서.”
유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원 은 그녀를 딴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자운 놈들이 올까?”
“오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천 우의 물건을 전시한다고 하는데.”
“음, 그렇다 해도 녀석들은 무슨 수로 찾게? 분명 분장 마도구로 얼 굴을 바꾸고 나타날 텐데.”
“알잖아. 방법 없는 거.”
유아연의 뻔뻔한 말에 정재원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게 뭐야 진짜. 장난해?”
정재원의 말에 유아연은 어깨를 으 쓱였다.
“그런데 혹시 녀석들이 진천우의 물건을 노리고 행사장에서 깽판 치 는 건 아니겠지?”
“그건 모르지. 그래도 모든 가능성
은 열어둬야 해.”
이번 ‘선구자의 밤’은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된다.
유명 기업 등의 상류층 인사뿐만이 아니라, 유명 마법 길드의 인사들도 참석한다. 아마 그중에는 A등급의 마법사들도 꽤나 있을 것이다.
최근 움직임이 한층 조심스러워진 자운 녀석들이 굳이 그런 위험한 짓 을 벌일 확률은 낮았지만, 그들의 신과도 같은 진천우가 엮인 일이라 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녀석들이라면 분명 참가는 할 거야.”
자운에게 ‘진천우’라는 인물이 갖 는 의미는 단순히 단체의 리더가 아 니었다.
신앙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진천우를 섬기는 작은 종교 단체나 마찬가지인 그들이기에 진천우의 물 건들이 전시된다면 분명 그것을 보 기 위해 찾아갈 것이었다.
“초대장 4개라고 했지?”
“웅.”
“회의하게 애들 모아. 행사에 참가 할 사람부터 정하자.”
서울 어딘가의 거대한 저택.
주변은 온통 피로 가득했다.
그 옆에는 끔찍한 형태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네.”
“그러게. 단순 기업인인 줄 알았는 데 마법을 꽤 다루네.”
진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비릿한 향이 그의 코끝을 찔렀지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것으로 마지막 초대장을 구한
거지?”
나타샤가 황금 문양의 카드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응, 맞아. 아. 그리고 얼굴 스캔 잘 떠 놔. 얼굴 위조할 때 필요하니 까.”
“어어, 알았어.”
그때 문이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리 며 베르트가 들어왔다.
“진! 일은 다 끝냈어?”
“응. 완벽해.”
“그래? 수고했어. 아참. 지하 경매 때 쓸 돈은?”
“그것도 다 준비했지. 현금 2000 억. 아주 넉넉해.”
진의 대답에 베르트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다행이고. 만약 경매에서 지 게 된다면 다 죽이고 깽판 쳐야 하 는데 그럼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기 잖아.”
“알아. 그리고 이 정도 돈이면 경 매에서 질 일은 없어. 2천억인데.”
사교 행사인 선구자의 밤과 동시에 진행되는 지하 경매.
이번 경매 물품으로 성유물, ‘마나 의 핵’이 올라오게 된다.
무한한 마나를 품고 있는 이 성유 물은 자운의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바로 자운이 보유하고 있는 성유물 이자 고대 마법 병기, ‘대마도정화 기기’의 유일한 에너지 원료가 되기 때문이다.
자운은 이 고대 마법 병기를 이용 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 모두 주목해.”
베르트의 말에 저택 안에 총 9명 이 모였다.
그중에는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테리사, 헤더, 애런, 이청.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주말에 있을 우리의 우선순위 첫 번째는 ‘마나의 핵’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그분이 사응하던 물건을 회수하는 일이지. 마나의 핵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일은 꽤 위험한 일이 될 거야.”
자운의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실수가 있어선 안 돼.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철저히 계획대 로 움직여야 해.”
시간이 홀러 ‘선구자의 밤’ 행사 당일이 되었다.
장소는 서울 중심지에 있는 거대한 고급 호텔 ‘발할라’. 한성그룹 계열 호텔의 핵심 브랜드 중 하나였다.
나는 이틀 전 한세연에게 받은 정 장을 빼입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행사장의 풍경은 형 형색색의 조명과 화려한 동상들로 가득해 한세진이 이번 행사에 공을
들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번에 참가한 선구자의 밤도 확실 히 대단했지만, 오늘 열리는 선구자 의 밤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웅장함이 느껴졌다.
“초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저번과 같이 입구의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품 안에서 초대장을 내밀었다. 직원은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고 개를 숙였다.
“확인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 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멀 리서 듣기 좋은 클래식 음악을 연주 하는 오케스트라가 보였다.
행사 참가자들은 각자 술잔을 기울 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흠.”
물론 나는 이곳에서 친목 도모를 할 생각이 없었기에 사람들을 무시 하고 길을 쭉 걸었다.
그나저나 한세연은 어디 있을까. 이미 도착했다고 들었는데.
지하 행사까지 아직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으니 여유롭게 둘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