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이서준과의 전투라니.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과연 어떻게 공격해올까.
그렇게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서준 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서준이 나를 향해 씨익 웃더니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어? 어, 엉? 뭐해?”
주르륵. 이서준의 가슴에 피가 흘 렀다. 이내 피를 쿨럭이더니 이서준
은 그대로 쓰러졌다.
“.…”엥?”
어둠은 사라졌다.
나를 감싸던 안개 역시 사라졌다. 빗소리가 들리며 방금 있었던 공간 으로 돌아왔다.
내 옆에는 바닥에 쓰러진 채 공포 에 괴로워하는 최서윤의 얼굴이 보 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상황 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투도 하지 않고 악몽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원작의 다른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악몽을 생각했을 때 황당할 정도로 쉬운 결과였다.
“......뭐지.”
불현듯 안개가 나에게 보여주려 했 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바로 이서준의 죽음.
“와씨.”
순간 온몸에 섬뜩함이 올라오며 소 름이 돋았다.
깜깜한 어둠 속.
증오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에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 리였다.
아버지를 향한 증오. 그리고 그 자 식을 향한 분노.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강한 중 오와 한을 품고 아버지를 공격해왔 던 사람들이니까.
최서윤은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 을 떠올리면 이런 기억들밖에 떠오 르지 않았다.
함께 길을 걷다가 누군가에게 기습 을 당하고. 또 모르는 누군가에게 강한 비난을 당하기도 하면서, 언제 생길지 모르는 공격과 비난의 불안 감 속에 살아왔다.
하지만 최서윤은 최씨가문을 향해 공격해오는 자들에게 분노라던가 적 개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항상 슬픔과 괴로움 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평생 증오하며 살겠다.
—살려내!
최서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사람이 좀비 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차 기괴하게 변해갔다. 공포를 느낀 그녀는 패닉 상태에서 마법을 구현했다.
평소에 구현하던 선명도 높은 얼음 의 창이 아닌, 투박한 형태의 얼음 덩어리였다.
이 마법은 그녀의 심리상태를 대변
해 주었다.
구현에 필요한 상상력과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최서윤은 손을 뻗어 마법을 방출했다.
슈우우웅! 퍼어억!
한 사람이 마법에 맞으며 쓰러졌다. 창과 같은 날카로움이 없었기에 타박상에 그쳤다.
그때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살이 붙으며 점 차 하나의 형태로 변했다.
한 몸에 뭉친 여러 개의 얼굴과 여러 개의 팔과 다리.
그 끔찍한 모습에 최서윤은 공포에 떨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최서윤!
그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머리에 대고 말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하지만 최서윤은 패닉 속에서 빠져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형태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야! 정신 차려!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 환영 이야. 악몽이라고!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고 최서윤은 패닉 속에서 약간의 정 신을 되찾았다.
환영.
눈앞의 보이는 것들은 환영이다. 마력 재해인 ‘악몽의 안개’가 보여 주는 자신의 공포심을 구현한 것이
다.
최서윤은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떨리던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 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안정을 되찾았 다. 그녀의 눈빛에 아까와 같은 공 포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새로운 마법이 구현되었다.
차갑게 얼어붙는 공기, 강력한 마력 에너지, 날카로운 창끝.
평상시의 그녀가 구현했었던 마법 의 형태로 돌아왔다.
제대로 한 방 먹여!
최서윤은 손을 뻗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대로 방출했다.
솨아아아아아...
사나운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 작했다.
“ 괜찮아?”
눈을 뜨자 비에 젖은 익숙한 얼굴 의 남성이 보였다.
최근 절친인 송승아만큼이나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악몽 속에서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
는 이 사람의 목소리겠지.
최서윤은 목이 메여 떨리는 목소리 로 대답했다.
“……네, 네. 저, 저는 괜찮아요.”
그 말에 김선우는 옅은 미소를 지 었다.
“잘 이겨냈네. 잘했어.”
김선우는 평소와 다른 자상한 목소 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 모 습에 낯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꼼지락 젖은 머리를 만지다 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다리의 힘이 풀리며 금방 주저앉았 다.
“다리에 힘이……
“좀 쉬고 있어. 안개의 공포에 몸 이 놀란 거니까.”
김선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말에 불안한 상황에서도 최서윤은 심적인 안정감을 얻었다.
김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 변을 경계했다. 아마 몬스터의 습격 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함인 둣 보였다. 최서윤은 멍하니 그를 올려 보 다가 말했다.
“……선배님도 봤어요?”
“뭐가.”
“악몽이요.”
“봤어.”
김선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직도 심장이 떨리는 자신과 다르게 태연 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궁금중이 생겼다. 그는 무 엇을 봤을까. 저 태연한 모습을 보 아하니 그가 본 악몽은 별 게 아니 었던 걸까.
“선배님은 뭐가 나왔어요?”
김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몰라도 돼.”
예상했던 답변이 들려왔다.
항상 느끼는 건데 저 선배님은 비 밀이 참 많다. 그래도 말하지 못하 는 걸 보면 그 나름대로 끔찍했던 환영을 본 게 아닐까.
“근데 이건 뭐지?”
최서윤이 자신의 손등 위로 빛나는 어떤 동그란 문양을 발견했다. 김선 우는 그것을 빤히 보더니 그녀를 따 라 손등을 내밀었다.
“나도 있어.”
“어? 정말이네요? 이게 뭘까요?”
“필드 던전의 입장 자격 같은 게 아닐까.”
“네?”
김선우의 뜬금없는 말에 최서윤이 의문을 표했다.
“가끔 있다고 하잖아. 일반적인 던 전과 다른 몇 가지 조건을 달성해야 입장할 수 있는 필드 던전.”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럼 이 표식이 그 자격인가?”
“그럴 수 있다는 거지. 악몽의 안 개는 사실 이 섬에 숨겨진 필드 던 전의 입장 조건인 것이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아니, 듣고 보니 김선우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추리력. 역시 이론 만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 나.
“그럼 이곳 어딘가에 던전이 있다 는 거죠?”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신기하네.”
최서윤이 손등의 문양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김선우가 말 했다.
“이렇게 된 거 던전이나 공략할 래?”
“던전을요? 둘이서요?”
“웅. 못할 건 없지.”
김선우의 자신감 있는 말에 최서윤 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던전 공략이라.
정확한 난이도를 모른 채 던전에 입장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선우의 능력이라면 던전 의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애초에 가능성 없는 일을 그가 제안 할 것 같지도 않고.
“근데 제가 지금 다리가 안 움직여 서.”
“괜찮아. 꼭 지금 공략할 필요는 없으니까. 기다렸다가 몸 좀 나아지 면 그때 시도하는 거지."
“……좋아요. 대신 던전 난이도가 높다 싶으면 바로 빠지는 거로?”
“그래.”
휘이이잉.
그때 찬 바람이 다시 그녀의 몸을 스쳤다.
비에 젖은 옷이 그녀의 체온을 뻬 앗았다.
거대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모든 비 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서윤은 추위에 몸을 살짝 떨었다.
“춥냐?”
“……당장은 참을 만해요. 내일 감 기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 말에 김선우가 고민하는가 싶더 니 말했다.
“안 되겠다. 일단 장소를 옮기자. 여기에 죽치고 있으면 나까지 감기 걸리겠다. 몬스터 습격에 취약하기 도 하고.”
“근데 제가 지금 다리가
“업혀.”
“네?”
나는 최서윤을 등에 업은 채 안개 속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비를 맞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다.
바닥이 비에 젖어 퍽퍽하고 바람은 점차 거세져 위험했지만, 신체 단련
은 꾸준히 해왔기에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저 안 무거워요?”
한창 달리고 있는데 최서윤이 뒤에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겁나 무거워.”
“아씨. 내려줘요.”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짜증 섞인 내 말에 최서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 요?”
“비를 피할 곳.”
그렇게 한 3분쯤 뛰었을까. 나는 산 중턱에서 작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동굴 안에 들어가 그녀를 조 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여기서 좀 쉬자.”
나는 마법 구체를 구현해 동굴 안 을 밝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장작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그것들을 그녀 앞에 내려놓고 태풍 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온 성냥 하나
를 꺼내 불을 지폈다.
“성냥은 또 언제 챙기셨대.”
화르륵.
모닥불이 피어오르자 따뜻함이 느 껴졌다. 나는 상의 일부를 돌돌 말 아 물을 짜내었다.
최서윤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몸을 돌려 나를 따라 옷의 물기를 짜내었다.
나는 동굴 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 았다.
비는 꽤 긴 시간 내릴 것이다. 최
소 삼일.
특별반 훈련은 1박 2일이지만 태 풍의 영향으로 배를 띄울 수 없으니 삼일 이상 이곳 안개의 섬에 갇히게 되겠지.
그러니 시간 여유는 충분하다.
내 목표는 악몽의 안개 던전을 공 략하는 거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멍하 니 방금 획득한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악몽의 안개 극복’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등장인물 ‘최서윤’에게 당신에 대 한 관심도가 상승합니다.]
[등장인물 ‘최서윤’의 당신에 대한 관심도 Lv : 3]
[보상으로 3,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뭐야.
업적을 달성하며 5천 포인트를 획 득한 건 그렇다 쳐도 최서윤의 관심
도 레벨이 또다시 상승했다.
« Q »
어떤 이유에서 관심도가 상승한 것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인트를 벌 었으니 좋게 생각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혹시……
그때 최서윤이 침묵을 깨며 내게 말했다.
“비는 언제 그칠까요?”
“비? 한 3일 뒤에.”
“3 일이나요?”
“웅. 날씨가 이래서 별장으로 돌아 가도 출항하지 못 할 거야.”
“무슨 태풍이 예고도 없이……
최서윤이 자신의 다리를 두들기며 울상을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와 최서윤은 안개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던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 만, 안개 깊은 곳에 계속 들어가다 보면 안개가 알아서 우리를 던전으 로 안내할 것이다.
—크으으으으
안개 속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계 속 들려왔다.
최서윤은 홈칫 떨었지만 이내 각오 에 다진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아 갔다.
어느덧 안개가 너무 짙어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몽의 안개’에 입장했습니다.]
[‘필드 던전 입장’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드디어 도착했다.”
이 필드 던전의 공략 방식은 단순 하다. 방향 위치 목적지. 전부 필요 없다. 그저 안개 속을 걸으며 몬스 터를 처치하다 보면 어느 순간 던전 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조심해. 언제 몬스터가 기습해올
지 모르니까.”
“네.”
- 카아아악!
그때 안개 속에서 거대한 괴물 곰 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앞발을 내게 휘둘렀다.
후우웅!
가까스로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반격을 준비하려는 찰나, 내 등 뒤 에서 강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거대한 얼음의 창 하나가 쏘아지며 곰의 등을 꿰뚫었다.
— 커어어엉!
괴물 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오.”
깔끔한 일격이었다.
평소 그녀가 다루는 마법 능력보다 더 뛰어났다. 최서윤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손 위로 마력을 구현하며 중 얼거렸다.
“이상하다. 뭔가 오늘따라 마법 구 현이 잘 되는 거 같은데.”
“안개랑 비 때문에 아니야? 안개 지형이랑 빙속성이랑 잘 맞잖아.”
마법의 속성은 지형을 탄다. 빙하 지대에서는 빙속성 마법의 효력이 강해지고, 비가 오면 수속성 마법이 강해진다.
물론 꼭 빙하지대가 아니더라도 물 과 얼음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 그런가 보네요. 왠지 구현이 잘 되더라.”
최서윤이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
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안개 속을 걸 었다.
계속되는 몬스터의 습격.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환영 마법과 함 정을 처리하며 나아갔다.
“다른 분들은 뭐 하고 있을까요?”
최서윤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글쎄. 대부분 별장에 돌아오지 않 았을까.”
“그럴까요?”
문득 이서준이 생각났다. 이서준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원래라면 내 자리에 이서준이 있었어야 했는 데.
혹시 이번 일로 또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도 들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