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535)

새벽 3시 10분.

유아라는 12층 주변의 ‘정령의 호 수’를 혼자 걷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벤트가 시작되자, 포 인트 1위를 위해 릴리 로즈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릴리 로즈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12층에 있다고 했었는데.

그때 귓가에 탑의 의지가 들려왔다.

[‘레드 플레이어 리더’가 처치되었 습니다!]

[새로운 ‘레드 플레이어 리더’가 탄 생했습니다!]

“......어?”

레드 플레이어 리더가 처치됐다는 것.

릴리 로즈가 누군가에게 패배했다 는 이야기였다.

……대체 누가?

낭패다. 릴리 로즈가 갖고 있던 포

인트는 무려 8450포인트.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이 그 절반인 4225포인트를 획득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누군지도 모르는 새로 운 인물에게 포인트 1위를 빼앗기게 생겼다.

“……큰일이네.”

이벤트 종료까지 3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방법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을 습격하 며 포인트를 벌어내는 수밖에.

그렇게 계획을 다잡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인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체형이었다. 그녀는 누구인 지 한눈에 알아챘다.

“김선우?”

얘는 또 왜 여기 있는 걸까?

혹시 릴리 로즈를 노리고 온 걸 까?

유아라는 혼자 생각하다가 김선우 를 기습 공격해야 하나 고민했다.

“……흠.”

하지만 어째서인지 망설여졌다.

왠지 선공을 하더라도 김선우라면 뭔가 수를 써서 막아내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겁을 먹은 건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포인트를 얻 기 위해서 전력 분석도 안 된 김선 우를 공격하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 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하위권 학생들을 노리 며 포인트를 쌓는다는 더 안전한 방 법이니까.

“……역시 다른 사람을 노리는 게 좋겠지?”

역시 그게 좋겠다. 시간은 많으니

까.

생각을 정리한 유아라는 뒤를 돌아 탑의 포탈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때, 문득 한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방금 있었던 릴리 로즈의 패배.

생각해보니 영국 1위인 그녀를 상 대로 승리할 수 있는 실력자는 이 탑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을 제외하고 생각나는 사람이 라고 해봐야 이서준 정도.

하지만 이서준은 30층을 도전하려 는 것인지 계속해서 이벤트 순위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릴리 로즈에게서 승리 한 인물은 이서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는 이서준만큼이나 뛰 어난 재능을 가진 숨은 천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김선우였다.

유아라의 표정은 자칫 심각해졌다.

방금 보았던 김선우의 모습은 다친 곳 하나 멀쩡해 보였다.

만약 그가 정말로 릴리 로즈에게서 승리한 인물이라면, 다친 곳 하나

없이 그녀를 압도했다는 건데.

……김선우가 아무리 천재라고 한 들, 그게 가능한가?

“휴……

나는 멀리 떠나는 유아라의 뒷모습 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길을 걷는데 갑자기 살기 감 지 특성이 발동돼서 깜짝 놀랐다. 그게 하필 또 유아라라 바짝 쫄았 다.

지금의 나는 릴리 로즈와의 전투로 대자연의 심장을 사용한 직후였다.

체내의 마나가 많이 소진된 지금, 유아라와 겨루게 되었다면 아마 백 이면 백 패배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진 모르 겠지만 나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해 줬으니 목숨을 건졌다. 운이 좋았다 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 숨어야 할 텐데.”

‘최후의 밤’ 이벤트가 시작되고 학 생들은 전부 눈에 불을 켜고 싸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벤트 종료까지는 약 3시간이 남 았다.

릴리 로즈에게서 승리하고 대량의 포인트를 획득했으니 잠시 싸움에 잠시 빠져도 괜찮겠지.

괜히 마나가 부족한 상태에서 누군 가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그게 더 골 치 아프니까.

나는 탑의 포탈로 이동했다.

내가 가려는 곳은 10층의 ‘중간 안 전 구역’.

[‘중간 안전 구역’에 입장하기 위해

선 300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300포인트.

방금 릴리 로즈에게 승리하며 벌어 낸 4225포인트 덕에 7025포인트나 있었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 지불.’

[300포인트를 지불하셨습니다.]

[‘중간 안전 구역’에 입장합니다.]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시야가 다시 바뀌었다.

“오……

중간 안전 구역에 도착하자 다양한 건물들이 보였다.

식당, 여관 등등. 마치 작은 시골 마을의 번화가를 보는 듯했다. 혹시 학생들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들 포인트를 벌어내기 위해 바쁜 모양이다.

“홈.”

하긴, 300포인트나 지불하면서 이

런 곳을 이용할 사람은 없긴 하겠 지.

나는 여관에 들어가기에 앞서 혹시 이용할 만한다른 시설이 없나 찾아 봤다.

중간 안전 구역은 300포인트만 지 불한다면 이곳의 모든 시설이 무료 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한 간판을 보 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온천도 있네?”

그냥 온천도 아니다. 이름 앞에 ‘마나’가 붙여 ‘마나 온천’이다.

이름부터 범상치가 않아 회복이 더

빠를 것 같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으흐흐.”

간만에 힐링이나 해볼까.

시험 종료까지 약 3시간의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이벤트였던 ‘최후의 밤’은 종료되었다. 이벤트의 여파로 포인 트를 잃은 이들은 눈이 돌아간 채 약탈을 시도하며 난장판이 되었다.

나는 중간 안전 구역에서 푹 쉰 뒤 19층으로 이동했다.

새벽에 즐겼던 ‘마나 온천’ 덕에 몸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거기다 예

상치 못한 능력치 상승도 있었다.

[마나 온천의 영향으로 마력이 0.5 상승했습니다.]

바로 마력 스텟 0.5가 상승한 것이다.

그렇게 큰 수치가 상승한 건 아니 지만 뜻밖의 성장이라 상당히 기분 이 좋았다.

“후우.”

그럼 남은 시간 사냥이나 해볼까.

나는 숲이 우거진 몬스터 사냥 구

역으로 이동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가까운 풀숲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포인트를 잃고 눈이 돌아간 레드 플레이어일 수도 있으니 마력을 끌 어올리며 기습에 대비했다.

“어? 선우야!”

“윤하영‘?”

풀숲에서 나타난 건 다름아닌 윤하 영이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양 뺨이 검게 그을리고 상태가 말이 아 니다.

하긴 3일간 야생에서 생활했으니 당연한 건가.

“와! 엄청 반갑다. 여기 와서 아는 애 한 번도 못 마주쳤었는데.”

그렇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윤 하영이 나를 위아래로 홀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뭐야? 너 씻었어? 뭔가 엄청 깨 끗해 보이는데.”

오. 이걸 눈치채다니.

역시 윤하영. 눈썰미가 좋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10층 중간 안전 구역에 다녀왔거

든. 거기에 온천이 있어.”

“와. 정말? 입장비 300포인트던데 거길 다녀왔네. 포인트 많이 벌었나 봐.”

“뭐, 나쁘지 않게 벌긴 했지.”

내 대답에 윤하영이 부러워하는 시 선을 보냈다.

“자신 있게 말하는 거 보니까 선우 너 1등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1등은 절대 아니야.”

“음. 그래? 그럼 1둥은 누가 되려 나? 아라인가? 아까 보니까 이벤트

에서 평균 성적이 가장 높던데. 릴 리 로즈 그 애는 막판에 약탈당했다 고 하고.”

윤하영은 턱에 손을 얹으며 혼자 고민했다. 그런 그녀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1등은 이서준이야.”

“서준이? 맞다. 서준이가 있었지. 순위표에 한 번도 안 보여서 잊고 있었네. 근데 서준이는 왜 순위표에 안 보인 거지?”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었다.

한편, 이서준은 계속해서 탑을 오 르고 있었다.

현재 충수는 29층.

탑의 정상까지 이제 단 한 층만 남았다.

정말 힘들었다. 다양한 함정, 강력 한 몬스터. 머리 아픈 복잡한 패턴.

왜 50년간 단 한 명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이서준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포기를 모르고 살아온 그 역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로 포기할 정신이었으면 30 층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서준은 도전하려는 정신이 있었 고, 또 그만큼의 능력과 재능이 있었다.

물론 탑의 수많은 이벤트와 포인트 를 포기하고 30층을 도전하는 것이 기 때문에 실패한다면 큰 낭패이긴 했다.

운이 나쁘면 100위 안에도 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우. 힘드네.”

3일 내내 계속 혼자 있었더니 조 금 외로움이 느껴졌다.

사람의 그림자라도 보였으면 좋겠 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내 나약한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 음 스테이지의 문을 열었다.

[히든 스테이지 ‘관리자의 땅’에 입 장했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탑에 히든 스테이지도 있던가?

그때 이서준이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완전한 어둠.

마치 우주 속에 홀로 떠다니는 착 각을 들게 했다.

이서준은 목적지 없는 길을 계속 걸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석판 하 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자의 기록소]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남긴 글은 이곳에서 영원히 남습니

다.]

“……기록소?”

뭔지 알 것 같았다.

탑의 정상에 오른 자만이 남길 수 있는 일종의 기념 메시지였다.

설마 시험용 인공 탑에 이런 시스 템이 구현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서준은 마력을 이용해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 이서준. 탑의 정상에 오르다.

“……너무 대충썼나?”

이서준은 머쓱한 얼굴로 석판을 바 라봤다. 석판에 마력이 흩어지며 적 힌 글귀가 사라졌다.

[메시지가 저장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 습니다.]

[확인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기록? 이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확인을 눌렀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의 스승, 그리고 내 소중한 사람 들에게 이 영광을 바친다.

2004-7-3

“뭐야.”

아무래도 이 메시지를 남긴 사람은 유일하게 탑 30충에 올랐다던 그 사람이 남긴 메시지인 것 같았다.

인간의 한계. 나의 스승,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

의외로 낭만이 있던 사람이었구나.

대체 누구였을까.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건. 뭔가 이유가 있 을 거 같은데.

[설마 여기에 인간이 찾아오다니.

28년 만인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육성은 아니었다. 방금 전에 들 었던 탑의 의지와 상당히 홉사했다.

이서준은 주변을 두리번대며 말했다.

“누구시죠?”

[나는 탑이 가진 자아, 인간의 표 현을 빌리자면 ‘탑의 의지’라고 한다.]

그 말에 이서준은 살짝 놀랐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탑의 의지였 다고?

[그나저나 재밌구나. 너는 내가 아 는 누군가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자 가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는 착각이 들 만큼.]

탑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탑이 아는 누군가와 비슷하다니.

“ 아.”

아무래도 이전에 탑 정상에 유일하

게 올랐다던 그 사람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 어떻게 가진 기운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지?]

탑은 계속 신기하다는 듯 같은 말 을 반복했다.

이서준은 의문을 느꼈다.

대체 누구길래 그자가 자신과 비슷 하다고 하는 걸까.

“혹시 그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누구라…… 그자의 이름이 분 명…….]

잠시 고민하던 탑의 의지가 생각났 다는 듯 말했다.

[진천우. 맞아. 분명 진천우라는 이 름이 었다.]

“..I”

순간 이서준은 깜짝 놀랐다.

진천우.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이 세상에 진천우의 이름을 모르는 사 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과거,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 던 역대 최악의 마법사.

자운의 리더이자 신(神).

[놀란 반응을 보이는군. 알고 있는 자인가?]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그런가. 하긴 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던 인간이면 이름이 알려질 수밖에 없겠지.]

이서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탑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왜 저를 진천우와 비슷하다고 한 건지 자세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비슷한 이유라…… 나는 인간에게

서 뿜어지는 기운과 마력을 감지하 고 그것을 기억해 구분한다.]

“기운과 마력?”

[그렇다. 내가 너를 진천우와 비슷 하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네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마력은 진 천우와 상당히 흡사하다.]

탑의 말에 이서준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진천우와 기운과 마력이 비슷

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버렸다.

“그럼 제가 진천우와 비슷한 기운 과 마력이 느껴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

탑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말끝을 흐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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