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김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
다. 그러곤 음식을 입에 담기 시작 했다.
“음식이 좀 싱겁네.”
인천 서구 어딘가에 있는 골드윈의 지하 아지트.
70명가량의 골드윈 멤버들이 각자 손에 무기를 들고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네.”
“그러게. 혜성 길드 그놈들은 언제
들어온대?”
그렇게 한참 길드원들이 편하게 잡 담을 나누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천 천히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40대로 보이는 험악한 인상의 사 내 였다.
얼굴에는 칼자국이 가득해 그가 어 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략적으로 짐 작할 수 있게 해줬다.
그는 골드윈의 길드장, 조원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열심히들 해라.”
조원석은 길드원들에게 간단히 인 사를 하고는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쭉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길드장인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 길드장실이었다.
문을 열자 늘 자신이 앉던 거대한 의자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원석은 본능적으 로 긴장감을 느꼈다.
“김성은 님.”
의자에 앉은 남자 김성은, 아니 백 은성이 조원석에게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대충 주변을 둘러봤는데 체계가 잘 잡혀 있더군요. 훌륭합니다.”
백은성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 했다. 조원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닙니다.”
“혜성 길드를 공격한다고 하니 다른 길드원들은 뭐라고 반응하던가 요?”
“크게 반대하는 반응은 없었습니다. 예전부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 는 만큼 사이도 안 좋아서요.”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나저 나 오늘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 요. 아니, 반드시 잘 풀려야 합니다.
저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거든요.”
자칫 날카로운 백은성의 말에 조원 석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혜성 길드의 움직임은 몰래 심어둔 부하를 통해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 도 됩니다.”
그 말에 백은성은 씨익 웃었다.
“그래요. 오늘 밤 잘 해보죠.”
오늘 일정도 어제와 같았다. 대기 실에서 간식을 먹으며 사건이 터지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별 다른 사건이 터지지 않아 따분한 시 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폭풍전야라는 것일까.
괜히 오늘 밤에 있을 두 범죄 길 드 간의 싸움이 생각나 오히려 걱정 이 되었다.
그나저나 어제 밤새 오늘의 일에 대해 고민했더니 잠을 오래 못 자서 꽤나 피곤하다.
혼자 하품을 하며 책상 위로 몸을
엎드리는데 내 눈앞에 작은 병 하나 가 훅. 하고 나타났다.
“뭐야.”
병에는 ‘특수 피로 해소제’라는 문 구가 적혀 있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최서윤 이 내게 병을 내밀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부터 피곤해 보이시길래 편의 점 다녀오는 길에 샀어요.”
“오……
이건 좀 감동인데.
참고로 난 이런 사소한 챙김에 엄
청나게 약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어? 선배님 표정이 뭔가 감동받은 느낌인데.”
괜히 뜨끔해서 몸을 움찔했다.
티 났나?
“......뭐래.”
“아~ 선배님 이런 거 좋아하시는 구나.”
최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더니 내 팔을 콕콕 찔렀다.
“부끄러워하실 줄도 아시고〜”
나는 괜히 민망해서 피로 해소제를 쭉 마셨다.
특수한 약재로 제작되어서 그런 것 인지 확실히 몸의 피로가 조금은 풀 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따분하게 시간을 축내 고 있는데 강경찰이 우리에게 다가 왔다.
“아참,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오 늘 야간 순찰이 있어요. 미리 알아 두세요.”
뭐? 순간 황당해서 반문했다.
“야간 순찰이요?”
“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 될 예정이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8시부터 10시까지라니. 골드윈과 혜성 길드의 싸움이 9시에 시작된 다.
내 계획을 위해선 그사이에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그거 꼭 해야 하는 건가요?”
“네, 물론이죠. 특무 체험 커리큘럼 에 전부 포함된 내용이에요.”
이걸 어쩌지.
전혀 예상 못 한 변수가 생겼다.
이건 계획에 없던 내용이었다. 그 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특무 체험 때 야간 순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 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 바본가. 그걸 왜 이제야 떠올린 거야.
그렇게 흔자 고민을 하는데 강경찰 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순찰 지역을 정할 건 데 혹시 희망하시는 순찰 지역이 있 으세요?”
골드윈 길드의 습격까지 50분 전 인 오후 8시 10분.
강경찰이 예고했던 대로 야간 순찰 이 시작되었다. 야간 순찰이지만 아 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자, 이제 슬슬 순찰 시작해볼까 요?”
우리가 향한 곳은 사건이 터지는 진원포와 그렇게 멀지 않은 인천 서
구의 해안 북부 지역.
내 강한 의견에 힘입어 우리는 이 곳을 순찰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사건이 터지게 된다 면 자연스럽게 개입할 여지를 만들 기 위해서였다.
계획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큰 문 제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 을 잘 이용한다면 더 좋은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런데 선우 학생은 왜 이곳에 오 고 싶다고 한 거예요?”
갑작스러운 강경찰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했다.
“……예전에 추억이 있던 동네라서 요.”
대충 지어내서 한 말이지만 강경찰 은 과하게 반웅했다.
“정말요? 혹시 이쪽 부근에 살았었 어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 그럼 어릴 때 추억의 동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강경찰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말하기 싫은가 보네. 자 자 사연이 많은 거 같으니까 두 분
도 나중에 따로 캐묻지 말자고요.”
강경찰이 농담하듯 최서윤과 유아 라에게 말했다.
그 둘은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짓다 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 주변 일대를 쭉 순찰했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인천이면 그래도 수도권에 속해서 사람이 꽤 모여 살아야 정상일 텐 데.
그리고 그걸 이상하게 느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최서윤이 강경
찰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동네는 왜 이리 사람이 없어요? 건물들도 대부분 폐건물이 고.”
“아, 이 동네요? 여기도 예전에 사 람이 많았는데 어떤 사건이 있었거 든요.”
“사건이요?”
최서윤이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유아라 역시 의문에 찬 시선으로 강 경찰을 바라봤다.
“네, 한 15년 전쯤이었나? 어떤 미 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서 이곳에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어요.”
“……아.”
최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 니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옆의 유아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나도 뻘쭘하다.
이 동네에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 은 나도 몰랐거든.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곳에 또 여러 가지 안 좋은 사건들이 많았어 요. 전염병이 돌기도 했고, 이유 없 이 사람들도 죽고 그랬죠. 그래서 터가 좋지 않다는 얘기가 돌면서 재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아하.”
“그래서 신기한 거예요. 선우 학생 이 이런 동네에 추억이 있다고 하니 까.”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멍하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아까 한 말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다른 특별 사항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혜성 길드의 밀입국 예정지인 진원 포 어딘가의 폐건물.
백은성은 조원석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 주변 일대에서 순 찰하는 특무팀을 발견했습니다. 그 중에 특무 체험을 하는 마법 학교 학생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요? 아, 뭔지 알겠네. 그 체험 활동하는 거 말하는 거죠?”
백은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근 이서준을 감시하면서 마법 학
교에서 어떤 수업을 하는지 어느 정 도는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 애들은 무시하죠. 괜히 또 어 린 학생들 죽이고 그러면 언론이나 협회에서 난리 칠 게 뻔하니까요. 저는 이번 사건이 그저 두 길드 간 의 전쟁으로 끝나기를 원하거든요.”
아직 모든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지금.
자운의 이름으로 활동해버리면 앞 으로의 일에 많은 제약이 생겨버릴 수도 있었다.
자운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가 됐을 때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습격 현장 에 그 애들이 난입하면 어떻게 하 죠?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결계 로 막아둬요.”
“아, 그럼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조원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디 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남은 백은성의 주머니 에 스마트폰이 전화 알람을 울렸다.
“어. 여보세요?”
—계획은 잘 되고 있어?
젊은 여성의 목소리.
베르트였다.
“그냥 무난한 것 같아. 일단 그놈 들이 한국에 돌아와야 알 수 있지.”
—이번 일 크게 벌이면 안 되는 거 알지?
“웅, 알아.”
—자운의 흔적을 하나라도 남겨선 안 돼. 괜히 우리가 개입된 게 알려 지면 협회에서 크게 조사할 테니까.
“어어. 걱정 안 해도 돼. 언론엔
범죄 길드끼리의 싸움이 터진 거로 알려질 거야.”
—음, 그래. 그럼 일 끝나면 다시 연락해.
“알았어.”
뚝
전화가 끊겼다.
백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8시 47분.
창가로 걸어가 먼바다를 응시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한 척의 배가 육 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풍경올 바라보며 백은성은 거대 한 창, ‘방천화극’을 손에 쥐었다.
사건이 일어나는 오후 9시.
진원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작은 동네에서 우리는 순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소란스러워질 때가 됐는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분 명 사건은 오늘 9시에 터진다고 했 었는데.
“선배님, 좀 천천히 걸어요.”
불안감에 발걸음이 빨라지자 최서
윤이 내게 말했다.
“아, 미안.”
“……아뇨. 미안할 것까지는 없는 데.”
내 쿨한 사과에 최서윤이 뻘쭘한 듯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홈.”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9시 2분. 시간은 예상된 시간을 살짝 초과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슬 슬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 시 나비효과로 다른 변수가 생긴 게
아닐까 싶어서.
그렇게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거대한 마력의 진동이 느 껴지기 시작했다.
“방금 뭐지?”
“마력 폭발?”
강경찰은 무언가 수상함을 느낀 둣 우리에게 말했다.
“모두 따라와요!”
우리는 강경찰을 따라 마력이 느껴 지는 장소로 뛰었다.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마력의 기운은 점차 강해졌다.
장소에 가까이 가자 다수의 마력 폭발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두 길드 간의 싸움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당장 지원 요청해요!”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강 경찰에게 소리쳤다.
강경찰은 내 외침에 번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알았어요. 아아, 지원 요청 바람. 진원포 부근에서 다수의 마력 폭발 발생!”
강경찰은 무전기를 집고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지원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생명의 잔을 획득하는 데 도움 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건 안전 장치였다.
만약 일이 안 좋게 꼬이더라도 탈 출할 수 있는 비상구가 있어야 하니 까.
그렇게 마력의 폭발이 일어나는 장 소를 향해 계속 뛰어가는데 이번엔 강력한 마법의 장막이 우리를 막아 섰다.
“뭐야. 결계잖아!”
강경찰이 눈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
섰다. 나는 강경찰의 앞으로 나서 결계 앞으로 다가갔다.
“어? 김선우 학생?”
나는 손바닥으로 마법진에 손을 대 었다. 그리고 결계를 이루고 있는 마법 수식을 하나씩 수정했다.
결계는 빛을 내더니 서서히 형태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내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한 10초의 시간이 지나자 결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죠.”
슬쩍 뒤를 돌아보니 강경찰을 포함 한 유아라, 최서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내가 결계 해 제하는 걸 처음 보겠구나.
“와. 이서준 선배님 말이 사실이었 네. 진짜 무슨 결계를 이렇게 빨 리……
“감탄할 때 아니야.”
나는 앞장서서 뛰어갔다.
“김선우 학생! 앞서가면 안 돼요!”
강경찰의 외침에도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쭉 달렸다.
계속 달리다 보니 멀리서 전투 중 인 수많은 마법사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 람이 모여 있었다.
강경찰이 그 장면을 보더니 눈을 찌푸렸다.
“골드윈?”
“추가 지원 요청해요.”
“네? 아, 알았어요.”
강경찰은 서둘러 무전기를 집고 다 시 외치기 시작했다. 무전을 끝낸 강경찰이 우리에게 말했다.
“일단 뒤에 추가 인원이 없나 상황 좀 살피고 올게요. 위험하니까 어디 숨어 계세요.”
“저희도 도울게요.”
최서윤과 유아라가 굳은 얼굴로 앞 으로 나섰다. 강경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금만 기다려요. 적어도 본부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만.”
강경찰은 그 말을 끝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최서 윤과 유아라에게 말했다.
“나도 상황 좀 보고 올게. 자리 지 키고 있어.”
“네? 서, 선배님! 어디 가요?!”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 고는 쭉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