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식당 가려고.”
“아하.”
최서윤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봤다. 이른 아침부터 중요한 일이
있는지 옷을 이쁘게 차려입었다.
“넌 어디 가냐?”
“저는 본가에 가야 해서요.”
“아.”
생각해보니 최서윤은 거의 모든 휴 일을 본가에서 보내곤 했다.
아마 혹사당할 만큼 집안의 다양한 교육을 받게 되겠지.
“……고생해라.”
늘 그렇듯 내가 해줄 말은 이것밖 에 없다. 최서윤은 말없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때 문득 한 생각 이 떠올랐다.
“맞다. 너 빨리 정문으로 뛰어가.”
“네? 정문은 갑자기 왜요?”
“이서준 방금 나갔어.”
내 말에 최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이긴. 이서준이랑 단둘 이 있을 좋은 기회잖아.”
“선배님. 요즘 너무 적극적이신데 그러니까 오히려 더 거부감 드는 거 알아요?”
……너무 노골적이었나?
요즘 하도 이서준의 안전에 관한
불안감이 심해서 말이지.
“홈홈.”
의심에 찬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 한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힐끗 올려봤다.
“선배님도 참 필사적이시네요.”
“뭐가.”
“……아니에요.”
뭔데. 엄청 신경쓰이네.
“그런데 선배님은 오늘 뭐 하세 요?”
“그냥 학교에 있을 예정인데. 개인 훈련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야지. 밀
린 과제도 하고.”
“아......
최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 한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검은 슈트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 속 보디가드를 보는 듯했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남자는 최서윤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대충 상황을 보니 최씨가문 의 경호원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최근 그녀 주변에 흉흉한 사건이 많이 터지다 보니 가문에서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나는 남성을 보다가 별생각 없이 ‘인물 간파’를 사용했다.
이름 : 성진혁
나이 : 37
종족 : 인간 상태 : 평온
마력 둥급 : S-
관심도 : 0
잠깐.
성진혁?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최씨가문의 가주인 최재형의 심복. 나는 저자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었다.
바로 최씨가문에 큰 원한을 가진 인물 중 하나라는 것.
그러니까 눈앞의 저 남자는 빌런이 다. 그리고 최근 용병 의뢰에서 마
주쳤던 빌런, 박진수는 저 성진혁이 라는 자의 부하였다.
“아, 여기는 저희 가문에서 10년 넘게 일하셨던 분이세요.”
최서윤이 성진혁을 소개했다. 성진 혁은 나를 보더니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성진혁입니다.”
“김선우입니다.”
“김선우?’
성진혁은 나를 힐끔 보더니 알았다 는 듯 입을 벌렸다.
“최근에 아가씨를 도와주신 분이군
요.”
성진혁이 내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내 성진혁은 최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온화한 시선. 하지만 저 시선이 언 제 칼날이 되어 그녀를 향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가씨 슬슬 가봐야 합니다.”
최서윤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알겠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제가 바빠서 이만 가볼게 요.”
“어어. 그래라.”
그 말을 끝으로 최서윤은 경호원과 함께 정문 방향으로 걸어갔다.
빌런과 단둘이 놔두자니 조금 불안 한 감은 있지만, 성진혁의 목표는 최서윤이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최재형과 그의 가 문인 최씨가문의 몰락.
자신의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서윤을 공격할 일은 없을 거다. 지금 당장은.
“흠.”
나는 정문으로 향하는 최서윤을 바 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정보가 궁금 해져 ‘인물 간파’를 사용했다.
이름 : 최서윤
나이 : 17
종족 : 인간 상태 : 약 피로 마력 등급 : B-관심도 : 1
쭉쭉 내용을 읽는데 상태에 보이는 ‘약 피로’가 눈에 띄었다.
하긴, 기숙사로 돌아온 게 한 3시 쯤이었으니까 잠도 많이 못 잤겠지.
쯧.”
대한민국 어딘가에 숨겨진 마인의 은신처.
어둠 속에서 한 마인이 왕좌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왕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마인 을 내려보았다.
“성진이 죽었다고?”
왕의 말에 마인이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 설마 이서준 이 성진을 죽인 건가?”
“아닙니다.”
무릎을 꿇은 마인은 어제 이서준을 습격한 S등급 마인, 성진의 부하로 성진과 함께 이서준 일행을 습격했 던 마인이었다.
마인은 그곳에서 혼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성진의 전투 와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 들었던 대 화를 그대로 왕에게 전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군.”
왕은 놀랐다. 설마 성진이 죽었다 니.
어떤 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S등급 의 마인인 성진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성진은 세계에 몇 없는 s등급의 마인. 그가 죽었다는 건 마인 전체 전력의 큰 손실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가까운 미래.
웅크리던 몸을 피고 인간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날에도 그의 죽음은 분명 큰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예상외의 복병이야. 설마 이서준 의 뒤에 그런 강자들이 숨어있었다 니.”
왕은 왕좌에 등을 기댔다.
“……게다가 멸마의 아이가 다른 녀석일 가능성이 높다라.”
잘못짚은 건가.
왕은 허망함을 느꼈다. 계획에 실 패한 것도 모자라 한순간에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성진을 잃었다. 그 렇다고 멸마의 아이를 찾아낸 것 역
시 아니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손해.
“일이 꼬이는군.”
왕은 혼자 중얼거렸다.
“천해.”
“부르셨습니까.”
왕의 부름에 마인, 천해가 어둠 속 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A둥급의 마인이지만 그는 십 마회 내부에서 뛰어난 임무 수행 능 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왕 역시 그런 그를 높게 평가했다.
“마법사관학교에 네 부하 중 하나
가 잠입했다고 들었다.”
“네, 맞습니다.”
천해가 고개를 숙였다. 왕은 그를 찬찬히 내려보았다.
“임무를 주겠다.”
늦은 밤.
좁은 골목길의 벽에 붉은 피가 촤 악! 하며 튀었다. 날카로운 검에 숨 통이 끊어진 한 인간이 그대로 바닥 에 쓰러졌다.
검은 쥔 여성이 인간의 몸에 손을 대었다. 동시에 인간의 몸에서 피가 떠오르더니 여성의 손에 흡수되었다. 인간은 미라처럼 말라갔다.
여성은 흡수한 피에서 느껴지는 소 량의 마력을 느꼈다. 이내 마력을 자신의 몸으로 홉수했다. 미약하지 만 신체의 마력이 강해진 것이 느껴 졌다.
부우웅.
그때 여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 를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네, 천해 님.”
—장예. 임무다.
“ 임무요?”
임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인 걸까.
—그래, 그것도 왕께서 직접 내리 신 임무다.
……왕께서 직접?
장예는 의아함을 느끼면서 천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일에 성공하면 왕께서 큰 포상을 내리실 거다. 아마 네가 원 하는 김진우에 대한 조사도 진척이 생기겠지.
천해의 말에 장예의 손이 살짝 떨 렸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아버지 인 장한의 죽음을 잊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김진
우의 기사를 보며 이를 갈고 있었으 니까.
이건 기회였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초석을 쌓을 기회.
“……임무가 뭐죠?”
—중간시험 때 마의 대결계 안에 있던 18세의 인간에 대해서는 전부 조사하고 알아내라. 소문이든 뭐든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장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유로 그 당시의 18세 인간
을 찾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왕이 직접 내린 임무라면 아 마 멸마의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만 조사하면 되나요?”
-아니, 하나 더 있다.
“뭐죠?”
-이서준을 죽여라.
서울 중심부에 소재한 거대한 빌 딩. 강한 마도구와 마법 결계로 만 들어진 이곳은 허락되지 않은 자들 은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장 소이다.
이곳은 바로 ‘마법사 협회’의 본부 청사.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고 마 법을 이용한 범죄나 분쟁을 방지하 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법사 협회 본부의 최상충 은 마법사 협회장, 김진철이 사용하 는 공간이었다.
“회장님, 이서준 님이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최상층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이서준이 걸어왔다.
이서준은 눈앞의 백발노인을 바라 봤다. 새하얀 머리와 수염. 100세에 가까운 노인이지만 정정하다는 말로 도 부족할 만큼 건강한 육신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 다 멀쩡하구나.”
백발의 노인, 김진철이 이서준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내가 너를 부르는데 다른 이유라 도 필요한 거냐?”
“아니요. 그건 아니죠.”
이서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해서 불렀다. 듣자 하니 별 이상한 일을 다 겪었더구나.”
“네, 하마터면 죽을뻔했습니다.”
“쯧…… 엄살은.”
혀를 차던 김진철은 의자에 앉았 다. 이서준도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일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시 는 것 같은데, 이야기해드릴까요?”
“됐다. 마인이든 자운이든 그런 피 라미 녀석들 이야기는 궁금하지도 않다. 어디 학교 이야기나 풀어봐 라.”
이서준은 쓰게 웃었다. 마인과 자 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 상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하지 만 김진철은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듯 신경 쓰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재미없으실 텐데.”
“친구는 좀 사귀었냐?”
“네, 저 사교성 좋은 거 아시잖아 요.”
“그래? 네 친구 중에 제일 강한 놈이 누구냐?”
김진철의 질문에 이서준은 잠시 말 을 멈칫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저도 헷갈 려서.”
“헷갈리기는…… 하긴, 오만해서 자기 외에는 경쟁자로 느끼는 녀석 도 없을 테지.”
“그건 아니에요. 최근에 한 명 생
겼어요.”
“그래? 그게 누구냐? 그때 네가 말한 유씨가문의 그 애냐?”
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른 애예요.”
“걔보다 더 대단한 놈이 또 있어? 유씨가문 꼬맹이도 재능은 뛰어나다 들었는데.”
“저도 사실 정확히는 몰라요. 실력 이 꽤 대단할 거라고 짐작만 하는 거라.”
“본인도 잘 모르면서 무슨 경쟁자 로 느껴? 그 애는 순위가 어떻게 되나?”
“72위요.”
이서준의 대답에 김진철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홈…… 그래, 순위가 전부는 아니 니까.”
“아 참.”
문득 궁금한 게 생긴 이서준은 김 진철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혹시 멸마의 힘에 대해 아세요?”
멸마의 힘.
어제 자신을 공격했던 마인이 찾고 있는 힘의 이름이었다.
마인은 중간시험 당시, 결계를 해 제한 자에게 멸마의 힘을 갖고 있을 거라 언급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당시 결계를 해제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김선우였다.
이서준의 질문에 김진철이 묘한 시 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멸마의 힘? 갑자기 그건 왜 궁금 한 거냐. 어제 널 습격한 마인이 멸 마의 힘이 어쩌구 말하든?”
“아뇨.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멸마의 힘이라……
김진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거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 특별한 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 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처럼 전해지 는 힘이었기에 김진철조차 아는 것 이 별로 없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과거에 전 해지던 특별한 힘이니까.”
“과거요?”
“그래, 300년 전 한 인간이 멸마의 힘이라 불리는 마인의 천적과도 같 은 힘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지.”
이서준은 생각에 잠겼다.
마인의 천적과도 같은 힘……. 그렇다면 그때 나를 구한 의문의
마법의 주인은 역시 김선우인가?
늦은 저녁.
오늘도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체력 훈련과 마법 훈련을 하고, 또 밀린 과제를 몰아서 하는 등 시간을 보냈다.
“흐음.”
모든 일정을 끝낸 지금.
나는 내 손가락에 걸린 ‘형태 없는 정령의 유산’을 보고 있었다.
“슬슬 속성을 선택해야 하는데.”
지금 반지의 색깔은 파란색. 물 속 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물 속성 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선호되는 속 성이 아니었다.
강한 파괴력을 가진 속성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파괴력이 약한 속 성도 존재하는 등, 모든 속성은 평 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가 좋을까.”
당장 생각나는 속성은 4가지가 있 다.
불, 얼음, 빛, 전기.
파괴력 측면만 보자면 전기 속성이 가장 강하다.
그리고 전기 고문과 같은 끔찍한 적웅 훈련을 거쳐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다루는 사람도 몇 없다는 유 니크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기 속성이 가장 좋은가? 그건 또 아니다.
속성에도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빙 속성 같은 경우는 파괴력이 살 짝 떨어지지만, 마나를 고체화할 수 있기 때문에 무기처럼 다룰 수 있거 나 지형을 바꾸는 둥 유틸적인 부분 에서 뛰어나고, 불 속성 같은 경우 는 다수의 적을 상대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또, 빛 속성 같은 경우는 악마나 마인 같은 상대에게 강한 힘을 발휘 하기 때문에 특정 상황에서는 전기 속성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고 할 수 있었다.
“……빛 속성이 제일 괜찮을 거 같 긴 한데.”
앞으로 마인과 자주 엮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마인들의 관심이 이서준에게 쏠린 것도 있고, 스토리의 변화로 가장 예측하기 힘든 집단도 마인이었으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