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535)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8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저 멀리 가로등 밑에서 모자를 눌러 쓴 한 여성이 불만 가 득한 자세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웬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나 수상 한 사람이에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다.

“안녕하세요.”

“…… 지각인 거 아시죠?”

한세연이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괜히 어색한 웃음을 홀렸다.

“죄송합니다.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혀서요.”

“저 되게 바쁜 사람이에요.”

“알죠. 한세연 씨 바쁜 거 누가 모 릅니까.”

“……아무튼, 이거 받으세요.”

한세연이 검은 케이스 가방을 내밀 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사람 이 이런 걸 내미니, 마치 영화 속 불법 거래 현장에 온 기분이 든다.

“부탁하신 포션이에요. 개수는 총 10개. 신성초를 섞어서 만들었어 요.”

“흐흐.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직접 제조했으니 효과는 기 대하셔도 좋아요. 다만 신성초를 섞 었기 때문에 효과가 중폭된 만큼 부 작용 또한 증폭됐으니 알아두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열자 스펀지 사이에 끼어 있는 10개의 푸른 빛의 물약이 보 였다.

[증폭된 마나 엘릭서®)]

분류 : 포션

설명 : 복용 시, 5분간 마나 회복 속도가 500% 증가합니다. 지속 시 간이 끝나면 30분간 마력 탈진 현 상에 빠집니다.

“ 오.”

효과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

무려 5분간 마나 회복 속도를 500%나 중가시켜 준다. 대신 지속

시간이 끝나면 30분간 마력 탈진에 빠진다는 강한 부작용이 있지만 포 션의 효과가 뛰어난 만큼 부작용은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겠지.

“상태가 좋네요. 효과도 확실하고.”

“마셔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요?”

“딱 보면 알죠.”

“아, 약 공부 좀 하셨다고 하셨지.”

한세연이 생각났다는 듯 조용히 중 얼거렸다.

“그런데 이건 어디다 쓰게요? 당신 정도 되는 마법사가 이런 걸 필요로 하진 않을 텐데.”

한세연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 정도 되는 마법사라.’

왠지 그 표현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언론에 잡힌 내 모습을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 만 지금의 나는 사실 그렇게 대단하 지 않았다.

“다 쓸데가 있습니다.”

“그래요? 요즘 이런 포션은 잘 사 용 안 하는데.”

한세연은 아직도 의구심을 못 버렸 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뭐,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도 당연하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기 실력에 맞는 수준의 마나를 지니고 있는 게 일반 적이기 때문이다.

포션을 이용해 억지로 마나 회복을 늘린다고 해서 마법을 더 잘 다루거 나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그때 한세연이 선글라스를 살짝 내 리더니 맨눈으로 나를 홀어봤다.

“그런데 그 꼴로 갈건 아니죠?”

“내 꼴이 어때서요?”

“꼴이 어떻긴요. 자, 이거 받으세 요.”

한세연이 핸드백에서 선글라스와 모자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지하 투기장, 그거 엄연히 불법이 에요. 최근 마인 토벌로 얼굴도 팔 리신 분이 그러고 가게요?”

오. 준비성도 뛰어나셔라.

나는 그녀에게 선글라스와 모자를 받았다.

“혹시 돈 받는 건 아니죠?”

“……저를 뭐로 보고. 말 안 하려 했는데 저번에 대리 판매 맡기신 적

룡의 혼, 그거 판매 수수료, 세금 포함해서 150만 원 넘게 나왔는데 그냥 3500 넣어준 거예요. 알아요?”

“뒤에 생색만 안 부리셨으면 되게 멋졌을 텐데.”

“……아무튼, 그렇다고요.”

“네, 잘 쓰겠습니다. 오. 근데 이거 둘 다 명품이네.”

그렇게 말하고 선글라스를 얼굴에 꼈다. 선글라스의 생명은 무게라던 데 명품답게 엄청 가볍다.

“어울려요?”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 를 저었다.

“아뇨. 눈 때문에 그나마 어려 보 였는데 지금은 완전 아저씨 같아 요.”

“수염 미는 게 어때요? 괜히 나이 만 들어 보이는데.”

“홈홈. 죄송하지만 수염 밀 생각은 없습니다.”

내 대답에 한세연이 어깨를 으쓱이 며 ‘그러시던가.’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고 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나저나 준비성은 좋으셨는데 사

실 이런 건 거기서 필요가 없어요.”

“네‘?”

내 말을 이해 못 한 한세연이 되 물었다. 나는 품 안에서 가면 하나 를 꺼냈다.

“지하 투기장은 가면 착용이 필수 거든요.”

지하 투기장은 서울 외곽의 작은 도시에서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나는 한세연이 끌고 온 고급 차에

타 함께 이동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운전하던 한세연이 슬쩍 내게 말했다.

“뭡니까?”

“오빠의 치부는 어떻게 안 거예요? 제가 한성그룹을 원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요?”

한세연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할 말이 없어서 대충 말했다.

“한성제약 주식 지분 5% 주면 알

려주겠습니다.”

“……그냥 알려주기 싫다고 말해 요.”

한세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웃다가 창문 밖 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창문 밖에 수상해 보이는 검 은 차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는 방향도 같은 걸 보아하니 저들도 아마 지하 투기장을 관람하 러 온 자들이겠지.

지하 투기장은 원작에서 둥장하는 몇몇 빌런들도 이용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저 차 안에 내가 아는 빌런

이 타 있을지도 모른다.

“아참, 그런데 경호원 없이 이렇게 움직여도 되나요?”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그녀에 게 물었다.

한세연은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마법 능력 자체는 상당히 낮았다. 그녀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마법이 아닌 약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 가 경호원 없이 이런 위험한 장소에 왔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여기 오는 것도 비밀로 하고 온 건데 어떻게 데리고 가요.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동반 입장은

최대 한 명까지 밖에 안돼요.”

“아, 그러네.”

단번에 납득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 우리는 여러 대의 고급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작은 폐건물에 도착했다.

“도착했어요.”

“수고했어요. 자, 가면 써요.”

나는 그녀에게 가면을 건넸다.

그녀는 가면을 빤히 바라보더니 얼 굴에 착용했다.

“가면 디자인은 본인 취향이에 요?.”

가면을 착용한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나와 그녀가 착용한 가면은 하얀색 토끼 가면이었다.

솔직히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고른 건 아니었다. 그냥 가장 먼저 눈에 보여서 골랐다.

“그냥 별생각 없이 고른 겁니다. 준비도 끝난 거 같은데 슬슬 가보 죠.”

“……그래요.”

나와 한세연은 차에서 내려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엔 말끔하게 차려입은 흰 가면 의 남성이 서 있었다.

“회원권을 확인하겠습니다.”

남성의 말에 한세연은 회원권을 내 밀었다.

남자는 회원권을 확인하더니 한세 연을 바라봤다.

“본인이십니까?”

“네.”

“확인 좀 하겠습니다. 잠시 가면을 벗어주시죠.”

한세연이 살짝 가면을 위로 올렸다. 남성은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됐습니다. 옆에는 동행입니 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 팔찌를 착용 해주시죠.”

남성이 보라색으로 빛나는 팔찌를 건넸다.

“VIP 회원 전용 팔찌입니다. 이것 으로 안에 있는 모든 시설올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한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 찌를 착용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남성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지만, 지하 투 기장으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로 내려가자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이 안에는 많은 빌 런이 숨어있지만 다들 가면을 쓰고 있어 그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 았다.

“생각보다 넓네요.”

한세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 렸다.

지하 투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형태로 되어있다. 동그란 원 형 경기장. 그리고 경기장을 둘러싼 계단식 관중석까지.

그렇게 경기장을 바라보며 걷고 있 는데 그 순간 지나가던 누군가와 어 깨를 부딪쳤다.

누군진 몰라도 몸이 엄청 단단했다. 마치 마력으로 몸을 강화한 장 안철과 부딪힌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붉은 색 악마 가면을 쓴 자가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중저음 남성의 목소리.

붉은색 악마 가면을 쓴 자가 나에 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이 남자……

내가 아는 자였다. 그리고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저 불길한 기운 은 내가 생각한 그 남자가 맞다는

확실한 중거였다.

원작의 지하 투기장 에피소드에서 도 저런 붉은색 악마 가면을 착용한 사람이 등장했었으니까.

‘하령.’

무려 s등급의 마인이자 원작에서도 꽤 높은 비중올 가지고 있는 최상위 빌런.

이곳에서 몇몇 빌런을 마주치게 될 거라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하령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괜찮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메인 빌런과의 갑작스러운 마주침

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답했다.

괜히 수상한 모습을 보이다가 그의 눈에 밟히면 좋을 게 없었다. 지금 당장은.

하령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입니다.”

하령의 시선이 슬쩍 내 손목을 향 했다.

그는 이 지하 투기장의 주최자다. 아마 고객의 회원 등급을 확인하려 는 그의 습관이겠지.

“오랜만의 VIP 회원이시군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하령은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는 하령의 뒷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와씨.”

“왜 그래요?”

다소 긴장한 내 모습에 한세연이 물었다. 나와 달리 그녀는 평소와 같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 투기장 안에서 하령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 다. 그녀의 저런 반웅도 당연한 건 가.

“아닙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서.”

“……웬 한기요?”

황당해하는 그녀를 보다가 시계를 보았다.

“이런, 시간이 늦었네요. 빨리 이동 하죠. 배팅에 늦겠어요.”

“네? 아직 배팅 마감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요?”

“판을 키우려면 미끼를 미리 풀어 야 하니까요.”

지하 투기장의 3층 관계자실.

투기장의 모든 광경이 한눈에 보이 는 그곳에서 하령은 의자에 앉아 휴 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관계자실의 문이 열리며 횐 가면을 쓴 남성이 들어왔다.

“사장님, 지금 배팅 마감 30분 전 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별다른 이상은 없 습니까?”

“있었습니다.”

“네, 없었군…… 네?”

하령이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물었

다.

“특이한 배팅을 한 고객분이 계셨 습니다.”

횐 가면의 남자가 하령에게 다가와 서류를 건넸다.

하령은 서류를 쭉 내리읽다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이 사람 뭐죠?”

오늘 있을 3번째 경기.

3년째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양홍주’의 경기가 있었다.

양홍주는 지하 투기장에서 가장 인 기가 많은 선수였다. 그의 전투 실

력만 놓고 보자면 A등급 마법사를 상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 까.

하지만 그 압도적인 강함 때문인지 양홍주의 경기는 인기와 달리 배팅 액수 자체는 크지 않았다.

모두가 양홍주에게 배팅하니 그가 이겨도 큰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이 다.

“이 사람, 양홍주의 상대에게 5억 3천을 배팅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 배팅도 열 리자마자 바로 해버려서 지금 고객 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졌습니

다.”

“그래서 다들 양홍주에게 돈을 걸 고 있군요. 저 돈을 따려고.”

“그렇습니다.”

“……양홍주의 오늘 상대, 신인이 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오늘이 첫 데뷔전입니다.”

첫 데뷔전인 신인에게 5억 3천을 걸었다고?

“양흥주의 상대, 정확히 어떤 사람 이죠?”

“이름은 량량, 중국 빈민촌 출신

23살입니다. 능력은 발현계인데 정 식으로 마법을 배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으음. 그런데 5억을 걸었다고?”

역배팅을 하는 사람이야 어느 도박 장에나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양홍 주는 무려 3년간 무패를 기록한 챔 피언이다.

오늘 첫 데뷔하는 어린 신인이 그 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억이 넘어가는 고액을 배 팅하다니. 대체 무슨 깡으로 저런 배팅을 한 걸까. 돈이 썩어 넘치는

게 아니고서야……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직원 말로는 토끼 가면을 쓴 사람 이라고 합니다.”

“토끼 가면? 아.”

하령은 아까 전 1층에서 부딪힌 한 남자를 떠올렸다.

분명 가면을 썼음에도 자신을 보며 크게 긴장을 느끼던 예민한 감각의 사내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VIP였는 데……

그래서 이런 배팅을 할 수 있는

건가?

지하 행사의 VIP 자격은 수천억의 자산가에게만 쥐어지니까. 5억의 배 팅은 그에게 푼돈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거군.’

하령은 이제야 궁금증이 해소됐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팅 시간이 끝나고 나와 한세연은 관중석에 앉아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따분한 시간. 이곳에 있는 빌런들 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겠지만 다들 가면을 쓰고 있어 그들 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저나 한세연의 표정이 아까부 터 영 좋지 않다. 중간중간 불만 가 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게 상당 히 거슬린다.

“뭐 불만 있습니까?”

“......아뇨.”

말끝을 흐리는 한세연.

딱 보니 뭔가 불만이 있구만.

“ 뭔데요.”

“……그쪽이 베팅한 돈이요. 지금 은 그쪽 돈이지만 며칠 전에는 우리 회사 돈이었잖아요. 그 돈을 이렇게 홀라당 날려버린다는 게 안타까워서 요.”

“거참, 걱정하지 마요. 전 돈 안 잃습니다.”

“..쯔 ”

人、-

혀를 차던 한세연이 슬쩍 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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