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제약 32층의 본부장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누군가를 기다 리고 있었다.
그렇게 3분쯤 지났을까, 문이 활짝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아름다운 여 성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한성제약 개발연구본 부장, 한세연입니다.”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기업의 본부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 보이는 20대 초반의 여성.
그녀는 한성그룹 회장의 늦둥이 막 내딸, 한세연이다.
“반갑습니다. 김진우입니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미 소를 지었다.
한세연은 원작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그녀의 오빠가 먼 미래에 마인과 손을 잡으며 빌런으로 성장하는 한 세진인 점도 있지만, 그녀 자체만의 스토리도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뉴스 봤습니다. 축제 장소에서 마인의 폭주를 막으셨더군요. 마법사 님 덕에 피해가 최소화되었다고 들 었습니다.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인데요.”
“아, 자리에 앉으시죠.”
나와 한세연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 고 마주 보았다.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 발이 거슬리는지 손으로 머리를 넘 겼다.
“숨겨진 층에서 특별한 약재를 얻 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신성초와 그 씨앗들 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음. 지금까지 수많은 약초를 보았 지만 이건 처음 보네요. 신성초라고 했나요?”
“네, 맞습니다.”
한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로 운 얼굴로 신성초를 만져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세연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이건 약재가 아닙니다. 약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마나 줄기가 없어요.”
한세연의 말대로 신성초는 정확히 말하자면 약재는 아니었다. 약재의 효능을 올려주는 중폭제일 뿐.
“그런데 특이하네요. 안에서 조용 히 날뛰는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다
른 것과 섞으면 뭔가 반웅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미래에 다섯 손에 꼽히는 천 재 약제사인가?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신성초의 본질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가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본부장이라는 자리에 오른 건 역시 단순히 낙하산이라서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약제사로서의 재능을 타고났다.
“맞습니다. 이 약재는 약의 효능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약의 효능을 증폭시킨다고요?”
“네, 아마 최대 20%까진 중폭시킬 수 있을 겁니다.”
“……설마. 그게 사실이라면 제약 업계에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겠네 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죠? 약 공부를 하셨나요?”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내 신뢰는 완전히 무너지겠지.
“네, 어느 정도 약에 대한 지식은 있습니다.”
“그래요? 음. 하지만 거래를 위해 선 이 약재의 효능이 진짜인지 확인 을 해봐야 합니다. 또 부작용이 있
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가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확인해줬으면 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한세연.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좋아요. 당장 해보죠.”
30분의 시간이 지났다.
신성초의 약재 증폭 실험을 끝낸 한세연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살 짝 상기되어 있었다.
“확인하셨나요?”
“김진우 님 말이 맞네요. 정말로 약의 효능이 증폭됐어요. 다루기가 좀 까다로워서 약의 효능을 확 끌어 올리진 못했지만 이건 시간이 해결 해 주겠죠. 대단한 약재예요.”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런데 증명의 탑 보상으로 얻으 셨다면 어제가 아닌가요? 신성초의
효능을 어떻게 그리 빨리 알아낸 거 죠? 심지어 어제 마인 토벌하시느라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약에 대해 조금 공부를 좀 했습니다.”
내 말에 한세연이 의심스러운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부를 조금 한 수준이 아닌가 보 네요. 이 약재 안에 얽힌 에너지, 꽤 복잡해요. 한성제약의 수석연구 원이라 해도 아마 약재의 효능을 알 아내려면 이틀은 걸렸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나 보네요. 쓸데없는 잡
담은 그만하고 거래 이야기나 할까 요?”
“좋아요. 원하시는 조건이 있나 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성제약 주식 지분의 0.005%, 그리고 한성그룹이 소유한 지하 경 매 VIP 회원권을 원합니다.”
“......네?”
한세연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 다.
“농담이시죠?”
“진담입니다.”
“저기요, 지분 0.005%라니요. 그게 얼만진 알고 하는 소린가요? 그리고 지하 경매권은 무슨. 저희는 그런 불법 경매의 회원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신성초 상용화가 시작되면 주가도 확 상승할 텐데 돈보다는 주식이 낫 죠. 그래야 이곳과 거래한 보람도 클 테고. 대신 한세연 씨에게 필요 한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제게 필요한 정보요?”
한세연이 피식 웃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한성그룹이 모르
는 정보가 없습니다.”
자신감이 찬 목소리.
그녀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 한성그룹 계열사 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정보 길드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제공하려는 정보는 그 런 돈의 흐름이 담긴 정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욕망을 자극하는 정보였다.
“한세진.”
“네?”
“당신의 오빠인 한세진 부회장의 치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순간 한세연의 눈에 순간 당황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내 한세연이 비틀린 미소 를 지으며 당황을 감췄다.
“농담은 그만하시죠. 제가 그걸 알 아서 뭐하나요? 오빠의 치부라니. 우리 가족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줄..…
“한세연 씨.”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웅시했다.
“한성그룹을 손에 넣고 싶으시죠? 가족을 망가트려도 상관없을 만큼.”
[등장인물 ‘한세연’이 당신을 경계 합니다.]
[보상으로 1,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당황을 감추던 한세연의 표정이 결 국 싸늘하게 굳어졌다.
“……당신 뭐야.”
한성일가의 핏줄에 흐르는 강한 탐 욕.
그것이 한성그룹을 세계 최고의 기 업으로 만들었던 원동력이다.
그리고 한세연.
그녀의 피에는 한성일가의 그 누구 보다 강한 탐욕이 흐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거래하시 겠습니까?”
내 질문에 한세연은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잘 숨겨왔던 자신의 욕망 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들켰으니 꽤나 놀랐을 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이 거 래를 주도할 수 있으니까.
“오빠의 치부가 뭐죠?”
“거래하시 겠습니까?”
“오빠를 무너트릴 수 있는 치부인가요‘?”
“아마 이거 하나로는 무너지진 않 을 겁니다. 한세진이 한성그룹에 가 진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니까요. 하 지만 당신이 한성그룹을 가질 생각 이 있다면 분명 큰 무기가 될 겁니다.”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지금 결정하세요. 이건 약속드리 죠. 듣고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후.”
한세연이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하지만 지분은 안돼요. 돈 이 필요하면 돈으로 드릴게요. 힘이 필요하다면 힘을 빌려주고요. 지분 은 나중에 한성그룹을 내 것으로 만 들기 위해 꼭 필요해요.”
결국,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걸 포 기했는지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냈 다.
이렇게 한성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비틀려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선 가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 었으니까.
“그럼 지분은 포기하고 다른 걸 제
안하겠습니다.”
사실 지분이고 돈이고 나에겐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단지 더 좋은 거 래를 유도하기 위해 대충 던진 말이 었으니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한 성가의 막내딸, 한세연이 가진 힘이 다.
“선금 5억과 지하 경매 VIP 회원 권. 그리고 제가 원하는 포션을 제 작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힘으로 구하기 힘든 몇몇 물건들 도 구해줬으면 하고요. 물론 물건에 대한 값은 제가 치르겠습니다.”
“한성가의 사람을 상대로 심부름꾼 이 되어달라는 건가요? 뭐, 그 정도
는 어렵지 않죠. 대신 심부름꾼이 되어주는 건 딱 한 달만이에요.”
예상보다 쉽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한 달이라는 계약 기간이 조금 신 경 쓰이지만 이건 나중에 다른 추가 정보를 제공해서 늘리면 되겠지.
“좋습니다.”
“아 참, 참고로 지하 경매 회원권 은 거래할 수 없어요. 대신 동반 입 장이 가능하니 그걸로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럼 말해보 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오빠의 치 부에 대해서.”
시간이 흐른 저녁 5시.
한세연은 심각한 얼굴로 오늘 있었
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김진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 은 자신의 야망을 꿰뚫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던 것으로 모자라 한 성그룹의 서열 2위인 한세진의 치부 까지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C급 마법사가 단 하루 만에 까다롭다고 소문난 중명의 탑 숨겨 진 층을 공략하고, 폭주한 마인까지 혼자서 토벌해냈으니까.
거기다 한성가의 사람을 상대로 협 박에 가까운 거래를 진행하는 배짱 까지.
한성가를 적으로 돌리는 게 두렵지 않나?
“흐음. 이상해……
“뭐가 이상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사이, 문 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 다.
“오빠.”
남자는 그녀의 오빠인 한세진이었다. 아직 사실 확인은 하진 않았지 만, 김진우에게서 그에 대한 치부를 들었기 때문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추악하게 느 껴졌다.
“오늘 가족 식사에 참여한다며? 아 버지가 기뻐하시겠어.”
한세진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세연아, 회사는 다닐만해?”
“일도 어렵고 사람들 대하는 것도 피곤해서 힘들어.”
한세연이 힘든 척 울상을 지었다.
회사 경영에 욕심이 없는 척, 한세 진에게 경쟁자로 느껴지지 않게 보 이기 위해서였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으로 회사 지분을 넘기셨 는지 모르겠네. 잘 키웠다가 지분 포함해서 오빠한테 넘겨. 아직 경험 도 없는데 회사를 운영하는 건 너한
텐 아직 버겁잖니. 그래도 세연이가 똑똑하니 오빠가 회장 되면 너 부회 장 자리에 앉혀줄게. 흐흐.”
한세연의 속마음을 모르는 한세진 이 뻔뻔하게 웃었다.
한세연은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지랄.’
“계산 완료됐습니다.”
간식이 담긴 검은 봉다리를 들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깜깜한 밤 으로 주변의 가로등 불빛만이 빛나 고 있었다.
주말 이틀간 많은 일이 있었다. 탑 을 공략하고, 마인을 토벌하고, 한세 연과 거래 관계를 맺고.
회귀 전의 삶을 생각하면 정말 상 상도 못 할 일들이었다.
“후우.”
저 멀리서 마법사관학교의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나는 입가의 수염을 떼고 머리를 평소처럼 앞으로 내렸다. 안경도 벗
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옷도 평소 기숙사에서 입던 사복으 로 갈아입었다.
적룡의 혼 역시 한세연에게 대리 판매를 맡겼기에 이제는 누군가의 눈에 띌 일은 없었다.
이제야 원래의 나인 ‘김선우’로 되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어? 김선우 선배님!”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최서윤이 반가워 하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디 갔다 오시는 거 예요?”
“그냥 서울에 잠깐 볼일이 있어 서.”
“서울요? 무슨 일인데요?”
“그건 몰라도 돼.”
“쳇.”
최서윤이 흥이 깨졌다는 표정을 지 었다.
“너는 뭐하다 이제 들어가냐.”
“저는…… 아, 선배도 말 안 했으 니 저도 말 안 할래요.”
최서윤이 장난스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본가에 다녀온 것 같다.
최서윤은 국내 5대 마법 명문가 중 하나인 최 씨 가문 무남독녀이 다.
마법 명문가 출신답게 집안의 영향 력이 강해 집안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이처럼 마법사관학교 내에는 마법 명문가 출신이 최서윤 말고도 몇 명 이 더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아라가 있는데 그녀
의 가문에 관해선 여러 가지 에피소 드가 있었다.
“근데 선배님, 봉지에 그건 뭐예 요‘?”
“이거? 그냥 간식거리야.”
“간식이요? 과자 같은 거예요?”
“웅. 맞아.”
최서윤이 호기심에 깃든 얼굴로 나 에게 다가왔다.
“뭐 샀는데요?”
그 말과 동시에 최서윤이 봉지에 손을 집어넣었다.
“야야. 너 뭐해?”
순간 놀라서 봉지를 든 손을 뒤로 쭉 땠다. 최서윤의 손이 곧바로 봉 지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봉지 안에 있던 작은 캔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선배님, 이거 뭐에요?”
최서윤이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바 라봤다.
“……어, 이거 탄산음료인데. 사이 다 같은 거.”
“설마 그 말을 제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거 맥주잖아요.”
아, 들켰다.
이걸 어쩌지?
남은 주말 오랜만에 시원하게 맥주 나 마시며 힐링하려 했는데.
“일단 줘봐.”
내가 손을 내밀자 최서윤이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
“선배님, 이거 학교에 걸리면 최소 경고에요. 알아요?”
“알아. 그리고 지금 너 때문에 걸 릴 거 같거든? 그러니까 빨리 줘 봐.”
“……와 무섭네. 선배님 이런 사람
이었어요?”
이런 사람은 무슨.
다 큰 성인이 맥주 마시는 게 어 때서?
물론 지금 육체적으로는 성인이 아 니지만 겨우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고.
그렇게 최서윤과 실랑이를 하던 사 이 가까운 어딘가에서 학생들의 목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대로라면 저 학생들에게 내 소중한 맥주캔을 들키게 생겼다.
나는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다. 그리고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맥
주캔을 낚아챘다.
“꺅!”
재빠른 내 행동에 놀랐는지 최서윤 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주 변 학생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했다.
나는 학생들이 보지 못하게 빠른 속도로 맥주캔을 봉다리에 넣어 숨 겼다.
다행히 학생들은 맥주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휴.”
안도감에 한숨이 나왔다.
슬쩍 최서윤을 바라보니 그녀가 경 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김선우 선배님 몰랐는데 진짜 위험한 사람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