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차비는 벌었고.”
“어디 있지?”
나는 마법구로 어둠을 밝히며 벽을 바라봤다. 하도 벽만 보고 있으니 눈이 침침하다.
“으으음..
분명 소설의 묘사에 의하면 이쯤에 특별한 문양이 있었는데.
“어? 이건가?”
벽에 그려진 동그란 문양을 보며 중얼거렸다.
던전이라면 그냥 지나칠 평범한 문 양이지만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벽에 손을 대자 아주 희미한 마력 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치 이전 던전 수업 때 해제한 결계와 비슷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이거다.”
분명 여기가 맞다.
아무 이유 없이 벽에서 마력이 느 껴질 리가 없으니까.
이 벽 너머에 분명 숨겨진 층으로 향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을 갖고 곧바로 외부자의 혜택을 발동했다.
[고유 특성, ‘외부자의 혜택’이 발 동합니다.]
[마법 수식을 해석합니다.]
특성을 발동하자 내 시야에 마력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는 특수한 마법으로 은폐되어 있는 복잡한 마법 수식이 얽혀있었다.
보통이라면 해석하기 힘들겠지만 나는 특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좋아 좋아.”
벽에 손을 대 마법 수식을 하나씩 변경했다.
벽의 결계가 은폐되어있어 찾는 게 힘들 뿐이지, 마법 수식을 해제하는
과정 자체는 아주 쉬운 편에 속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쿠우우우우웅……
벽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더니 천 천히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결계 해제 전문가’ 업적을 달성했 습니다.]
[보상으로 2,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됐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업적 창을 치 우고 벽 너머를 바라봤다.
벽 너머에는 계단 하나가 있었다.
소설 현대 마법사 외전에서 봤던 내용과 아주 똑같았다.
외전의 내용은 현대 마법사의 엔딩 이후의 스토리를 다룬다.
10년 뒤에 발견될 숨겨진 충이 지 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 올라가 볼까.”
그렇게 계단에 오르려는 순간.
잠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맞다. 오늘 밤에 마인 출현이 있 었는데……
이곳에서 숨겨진 층을 찾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학생 수첩을 이용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20분]
마인 출현이 9시 30분에 시작되니 까.
“3시간 남았네.”
3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직 시간의 여유는 있다.
그럼 올라가 볼까.
나는 계단을 타고 숨겨진 층으로 올랐다.
청춘과 행복이 날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직 겨울의 추위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야밤에 많은 사람이 한강에 모여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건, 다름 아닌 오늘 밤 10시에 있을 한강 불꽃 축 제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서준아, 영준아. 여기로 와봐.”
“웅?”
이현주가 웃으며 이서준과 신영준 을 앞에 세웠다. 그 둘의 뒤에는 화 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거대한다 리가 하나 있었다.
이현주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 니 손에 쥔 스마트 학생 수첩의 카 메라 기능을 켰다.
찰칵.
“아. 뭐야. 왜 찍어?”
평소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신영 준이 이현주에게 다가갔다. 이현주 는 한 발자국 물러서더니 웃었다.
“뭐래. 어울리는구만.”
“어울리는 개뿔. 시끄럽고 학생 수 첩이나 줘봐. 내가 너네 찍어줄게.”
“오. 진짜?”
선심 쓰는 듯한 신영준의 말에 이현주가 반웅했다.
“그래, 빨리 줘봐. 어차피 그러려고 나 부른 거잖아.”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연히 장난이지. 큭큭. 학생 수첩 이나 빨리 줘봐.”
학생 수첩을 건네받은 신영준은 그 둘의 앞에 섰다.
잘생기고 이쁜 두 남녀가 함께 사 이좋게 서 있자 주변의 시선이 그들 에게 쏠렸다. 그들의 시선엔 부러움 과 선망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사진 꼭 찍어야 해?”
“다 기념인데 찍어야지.”
이서준의 말에 이현주가 대꾸하며 옆에 바짝 붙었다. 이서준은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미소로 카메라 를 웅시했다.
그 둘을 보던 신영준이 말했다.
“자. 찍는다. 하나둘.”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자 이현주 가 자세를 풀었다.
“잘 찍었어?"
“잘 찍기는. 너넨 대충 찍어도 잘 나와.”
“어이구. 말은 잘하네.”
이현주가 피식 웃었다.
“사진 봐봐.”
이현주가 신영준에게 천천히 다가 갔다.
이서준도 이현주 뒤를 따랐다.
“한번 영준이 사진 실력 좀 볼까?” 학생 수첩을 건네받은 이현주가 사 진을 확인했다.
“야. 뒤에 야경이 안 보이잖아.”
“뭐래. 잘만 보이는구만.”
“잘 보이긴. 옆에 다 잘린 거 안
보여?”
“거참 깐깐하네. 다시 찍어줘?”
황당한 얼굴로 말하던 신영준이 그 때 사진 속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야. 잠깐. 이거 뭐야?”
신영준의 말에 이현주와 이서준이 그를 바라봤다.
“왜?”
“여기 봐봐.”
신영준이 사진의 한 곳을 가리켰 다.
그가 가리킨 건 이현주와 이서준 뒤에 멀리서 보이는 검은 중절모의
한 남성이었다.
“이게 왜?”
“잘 봐봐.”
신영준은 남성의 사진을 크게 확대 했다.
검은 중절모의 남성. 그 남성의 얼 굴은 어딘가 피폐해 보였다.
며칠 굶었는지 볼도 홀쭉하게 들어 갔고, 눈 밑의 다크서클도 진한 게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여기 까지만 보면 그저 건강이 안 좋은 남성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
남자의 눈.이었다. 남자의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눈 전체가 검은색이 었다. 이서준은 그것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인?”
눈 전체가 검은 건, 마인의 특징이 었다.
물론 마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특수한 기술이 아니라면 그 정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몸의 상태가 안 좋다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마인은 가 끔 눈가의 변신이 풀리며 저렇게 돌
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보통 저런 이상 증세를 보 이는 마인은 얼마 안 가, 폭주 상태 가 되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 격했다.
이서준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사진 속의 검은 중절모의 남성은 어 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중명의 탑의 숨겨진 층, ‘심상 세계’ 에 입장했습니다.]
[증명의 탑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신비의 마나가 당신을 감쌉니다.]
계단을 오르자 머릿속에서 탑의 의 지가 들렸다.
신비한 힘이 나에게 깃들었다. 몸 속의 마나가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 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바뀌었다.
어둠으로 깜깜했던 이전 층과 달리 이곳은 새하얗게 밝은 곳이었다. 발 밑을 바라보니 내가 올랐던 계단도 사라졌다.
[‘신비의 탐험가’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획득합니
다.]
“……확실히 뭔가 다르네.”
넓은 공간의 바닥엔 형형색색의 꽃 이 가득했다. 천장에는 새집 사이로 작은 새들이 날아다니며 짹짹 소리 를 내었다.
천장은 새하얗지만 고급스러워 보 이는 금색 테두리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소설에서 묘사로만 봤던 공간.
실제로 마주하게 되니 살짝 감동이 차올랐다.
“와. 진짜 이쁘다.”
나는 바닥의 꽃들을 구경하며 천천 히 걷다가 발을 멈추었다. 눈앞에 검을 아래로 쥔 아름다운 여신상 하 나가 있었다.
그때 탑의 의지가 다시 들렸다.
[중명의 탑을 오르는 자여.]
[그대는 중명할 수 있는가.]
여신상의 눈이 빛났다.
강한 마력이 여신상 주변으로 퍼졌다. 그 여파로 바닥의 꽃잎들이 바 람에 흩날리듯 혼들렸다.
잠시 후 여신상의 주변에 5개의 빛나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 킥킥킥킥.
— 키키킥.
빛나는 무언가가 웃었다.
꽃의 요정.
이쁜 이름과 달리 인간이 보이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는 포악한 몬
스터였다.
꽃의 요정의 몬스터 등급은 c급.
사실 꽃의 요정은 그렇게 강한 몬 스터는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작은 몸체는 마법으로 맞추기 힘들어 B 급 이상의 마법사들도 상대하기 까 다로워했다.
이제 숨겨진 층의 시험이 시작되는 건가.
나는 손 위로 두 개의 마법을 구 현했다.
꽃의 요정은 몸이 날래고 작아서 맞추기 힘들 뿐 공격력과 방어력 자 체는 높지 않다.
최대한 가볍게 구현한 뒤, 방출을 빠르게 해서 명중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핫!”
나는 그대로 작게 구현된 마법을 꽃의 요정들에게 방출했다.
마력을 적게 담은 만큼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속도로 방출했다. 하지만 마법 구체의 크기를 작게 구 현한 탓에 꽃의 요정에게 아슬아슬 하게 닿지 못했다.
“ 쳇.”
—킥킥킥.
—키키키키.
다시 한번!
방금과 같이 구현과 방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한두 개의 마법만 방출하지 않았다.
한발만 맞으라는 심정으로 여러 개 의 마법을 계속해서 방출했다.
꽃의 요정은 열심히 몸을 흔들며 마법 구체를 하나둘씩 피해냈다. 하 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법 구체
를 전부 피할 순 없었다.
-까아아악!
하나씩 쓰러지는 꽃의 요정들.
그렇게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을 방출하자 어느덧 모든 꽃의 요정이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후우. 겨우 성공했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숨 을 내쉬었다.
다소 무식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보유한 마력이 부족한 나머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구현의 크기를 더 키우자니 못 맞 췄을시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 다.
그래도 마나가 부족해지기 전에 성 공해서 다행이다.
“이제 기다리면 되는 건가?”
소설의 내용에 의하면 꽃의 요정을 모두 무찌르는 순간 숨겨진 층의 특 별 보상이 떨어진다.
방금 모든 꽃의 요정을 해치웠으니 이제 보상이 떨어질 것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보상이 떨 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여신상의 눈이 다시 빛났다.
[증명에 실패했다.]
“뭐?”
순간 황당함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증명에 실패했다고?
아니, 이건 원작에는 없는 내용인
데?
[증명의 탑을 오르는 자여.]
[그대는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방금 증명했잖아! 꽃의 요 정 다 잡았잖아!”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여신상 주변에 강한 마력이 다시 퍼졌다.
화르륵!
어디선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 렸다.
“......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름답던 꽃밭이 한순간에 불바다 가 되었다. 천장에서 평화롭게 날아 다니던 새들은 질식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콜록! 콜록! 뭐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타오르는 연기에 숨이 막혔다. 나 는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나가야 하나?’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
없다.
나를 숨겨진 충으로 인도했던 계단 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했다.
그 순간. 방금 들었던 탑의 의지가 떠올랐다.
‘그대는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
증명에 실패한 이유…….
이제야 생각났다.
증명의 탑이 말하는 증명이 어떤 증명을 말하는 것인지.
증명의 탑에서 말하는 증명이란, 바로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기나 재능을 말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없는 나만의 개 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꽃의 요정을 상대할 때 나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설 속 내용과 달리, 무식하게 마 법을 퍼붓는 방법으로 해결했기 때
문이다.
이건 나의 개성이 아니었다.
중명의 탑은 그걸 알고 중명에 실 패했다고 한 것이었다.
탑의 난이도를 구분하는 건 보통 둥장하는 몬스터의 등급과 설치된 함정에 따라 결정된다.
방금 몬스터를 이용한 증명에 실패 했으니, 다음은 함정을 이용한 시험 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불바다는 진짜가 아 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함정이다. 이걸 해제해 나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고유 특성, ‘외부자의 혜택’을 발 동합니다.]
[마법 수식을 해석합니다.]
외부자의 혜택을 사용하자 이 공간 에 설치된 특수한 마법이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