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4 (372/372)

외전-14

[회장님의 살생부에서 저를 지워 주십시오.]

첫 소개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단도직입적인 태도는 대화 내내 이어졌다. 

한동안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곤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뭔가를 눈치채신 것 같은데, 꽤 운이 좋은 편이군요.]

[…….]

[사실 내일쯤 박사님의 죽음이 시작될 예정이었거든요.]

무심히 던진 말에 달튼의 낯빛이 하얘졌다.

곧 쏟아질 질문을 예상하는 상태인 터라 난 즉시 미국 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유명 인사들의 사망 소식을 떠들어 대고 있는 TV를 손짓했다.

[에릭 프라우드, 48세. 카자리안 그룹 내 서열 138위의 인물이죠. 예정대로 그는 어제 아침 발병했고 아마 이틀 후면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죽을 겁니다.]

[…….]

[저자는 필립 모리슨. 나이는 50이고 카자리안 그룹 내 서열은 385위 정도? 역시 예정대로 어제 발병했고, 이변이 없다면 비슷한 시간대에 죽음에 이를 겁니다.]

[맙소사! 하면 정말로 발병 시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다는 겁니까?]

뉴스에 올라온 인물들을 차례로 읊어 가는 와중 달튼이 끼어들었다.

하긴, 그로선 충격이 크겠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걸 눈치챘기에 이렇듯 달려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MMS는 단지 세포에 자살 명령을 내릴 뿐, 그 작용시간을 특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MMS를 거론하는 것으로 봐선 우리가 그 기술 데이터를 빼돌렸다는 사실쯤은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뭐 그게 아니면 저들의 죽음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린 그걸 단순히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한 효소와의 반응을 조절하는 수준에 이른 상태다.

[우린 윌리엄 머레이가 만든 MMS를 보다 진보시킨 상태요. 해서 특정 조건이 주어질 때만 세포자살 명령이 작용하게끔 하는 것이 가능하죠. 쉽게 말해서 그건 이제 멍텅구리 폭탄이 아니라 작동스위치가 달린 스마트 폭탄이나 다름없죠.]

[허어…….]

달튼은 기함을 토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는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그럼 PPS가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이유는…… 혹시 그걸 무력화하는 기술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윌리엄의 죽음을 통해 그건 증명되었을 텐데요?]

웃으며 대꾸했다.

한창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달튼은 마른침을 삼키며 묻는다.

[대체 윌리엄의 몸에 언제 그걸…… 나를 비롯한 카자리안들은 또 어떻게 MMS에 노출된 겁니까.]

[글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요?]

달튼은 눈에 띄게 입술을 떨고 있었다.

얼핏 ‘하지만……’ 하는 탄식석인 말이 들려왔지만 상관하지 않은 채 다시 말을 꺼냈다.

[주지하셔야 할 점은 이미 당신들 모두는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단지 시간상의 문제일 뿐.]

[그럼 왜 한 번에 처리하지 않는 겁니까.]

대꾸하는 달튼의 목소리는 한층 톤이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의 노리개가 된 스스로의 모습에 분노가 치솟은 듯.

그동안 스스로를 세상의 지배자 중 하나로 여기며 살아왔을 그로서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당연할 거다.

[기왕이면 나도 한 번에 쓸어 버리는 것이 편하기는 합니다만 그랬다간 어떤 핑계로도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난 그런 혼란은 바라지 않습니다.]

[해서 굳이 하나씩 처리를 하는 중이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까. 말했듯, 어차피 당신들 모두는 이미 죽은 목숨인 마당에.]

순간 나를 쳐다보는 달튼의 눈빛은 꼭 악마를 쳐다보는 듯했다.

솔직히 악마에 견준다면 그건 당신들이 더하지 않을까?

헛웃음과 함께 그를 재촉했다.

[자, 궁금증을 풀어 주는 것은 여기까지. 리암에게 듣자 하니 당신이 카자리안 그룹의 리더인 토마스라는 자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던데, 혹시 그게 당신을 살려 줘야 할 조건입니까?]

[그렇소이다.]

주제가 제 목숨으로 변하자 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졌다.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와중, 전해 오는 뉴스가 다시 귀를 때렸다.

-미국 정부는 최근 발생하고 있는 정, 재계 인물들의 죽음을 코로나에 의한 후유증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CDC 역시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며 향후 더 많은 수의 후유증 환자들이 속출할 것을 경고 중입니다.

[코로나 후유증? 미친…….]

순간 달튼의 입에서 불만스러운 투의 말이 쏟아졌다.

하긴, 질병학자를 이해시키기에는 턱없는 핑계이긴 하지.

고작 감기바이러스 따위가 장기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어디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대중들은 정부와 CDC의 발표를 신뢰할 테고, 혹여 있을지 모를 반대론에 대해선 철저한 통제에 들어갈 테니까.

[얄궂지 않습니까? 당신들이 써먹던 수법을 내가 써먹고 있다는 사실.]

넌지시 한 말에 달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할 말은 많지만 당장 자신이 처한 현실을 떠올린 듯 이내 표정을 풀며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를 살려 주셔야만 토마스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되실 겁니다. 물론 진 회장님이라면 단지 시간이 좀 걸릴 뿐, 그걸 알아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

[하지만 그 경우 토마스에게는 시간을 벌어 주는 꼴이 될 겁니다. 비록 수족이 잘려 나갔다곤 해도 토마스라면 그 기회를 철저하게 이용할 테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완벽한 정리는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목표의 머리를 잘라 내는 것이 필수.

자칫 그 기회를 놓치면 반격의 시간을 줄 가능성이 크지 않던가.

물론 이미 판이 기운 상황에선 결과를 뒤집진 못한다.

하지만 카자리안은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조직.

시간을 주어서 얻어질 이익은 없다.

[살려 드리죠.]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도의 표정을 지은 달튼은 잠시 주변을 확인하곤 속삭이듯 말했다.

[토마스의 진짜 이름은…….]

***

휘이잉!

“요즘 같은 시기에 직접 움직이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 편.

동행 중인 강 소령에 넌지시 우려의 말을 전했다.

이미 이번 사태가 나로 인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다 알고 있는 상태.

때문에 사실상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모험에 가깝기는 하다.

“위험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마지막 뿌리를 뽑아내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 것을.”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에 가능한 출장이었다. 

완벽한 대공방어능력을 갖춘 전용기.

그리고 나를 보호 중인 PMC들의 능력.

다 떠나서 지금 내게 위해를 가할 만한 존재는 사실상 없다는 것.

뭐 있다면 토마스 하나뿐인데, 이미 정체를 안 상태에선 걱정거리가 아니다.

‘이미 놈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를 위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긴급속보입니다. 현지시각 어제 오후9시, 영국에 있는 군수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공장을 시찰 중이던 회사 간부들 서너 명과 함께 아리온 회장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분함을 달래려 틀어 놓은 뉴스에선 우리의 목표 중 하나가 제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카자리안 중 하나.

애초 이번 사태는 그들의 협잡질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거고, 그런 의미에서 난 저들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카를로스가 이번엔 좀 과격한 방법을 썼군요.”

강 소령은 또다시 우려의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건 유럽 내 카자리안들에게만큼은 편한 죽음을 선사하고 싶지 않다는 내 의지에서 나온 결과.

옅은 미소로 대꾸하곤 눈을 붙였다.

-토마스의 최종 목적은 세계경제를 리셋하는 겁니다.

막 잠이 들려 할 무렵 달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토마스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했었던.

나로선 분개할 만한 일이었던 터라 절로 잠이 달아났다.

-진 회장님께선 달러가 언제까지 힘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펜데믹을 거치며 풀린 달러가 무려 수십조에 달하고, 미국 정부가 그동안 진 빚은 경 단위에 이르는 상황에서. 때문에 토마스는 그 대책으로 전 세계 경제의 리셋을 유도하는 중입니다. 그래야만 달러의 몰락 및 세계경제의 몰락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래서, 리셋을 통해 세계경제를 초기화하자?’

어찌 보면 참 편리한 수단이지 싶었다.

전 세계 국가들이 지고 있는 빚은 펜데믹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이젠 각국의 숨통을 조를 정도.

하니 그걸 리셋해 버리면 골치 아픈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던가.

‘마치 회귀 전 아베가 일본 정부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망언을 했었던 것처럼.’

그때는 그걸 단순히 무식한 자의 망상쯤으로 치부했었는데, 아마 그것도 리셋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누구 좋으라고.’

생각의 끝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실행되는 경우 득을 보는 것은 결국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정부부채가 과도한 국가들.

우리가 굳이 저들의 이익에 동조할 이유는 없지 않던가.

“저 그런데…… 달튼 박사는 정말로 살려 두시는 겁니까?”

“왜요, 내 결정이 마음에 안 듭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회장님 같은 분이 그런 자를 살려 둔다는 것이 의외였을 뿐입니다. 예전 아프리카에 백신을 뿌려서 에이즈가 창궐하게 만든 것이 바로 달튼 박사라는 정보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사실일 겁니다. 그 백신이 사용된 이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창궐했으니까. 결과만 보면 불필요한 인구의 감축이 목표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인구감축이요?”

“생각해 보세요. 저들에게는 아프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의 국민들은 전 세계에 부담만 주는 존재들입니다. 하니 최대한 그 부담을 줄이고 싶었겠죠. 더불어 치료제를 통해 골수마저도 빨아먹을 수 있고.”

“미친!”

강 소령은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달튼을 요절내고 싶기라도 한 듯.

그러고 보니 아마 지금쯤이면 그도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타 있을 거다.

“한데 미안하지만, 난 살려는 준다고만 했었지 그게 언제까지라고는 말 안 했습니다.”

“…….”

***

[앞으로 세계경제는 점점 일원화되어 갈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경제포럼에는 각국의 수많은 경제인과 정치인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명색이 세계 경제의 미래를 대비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니만큼 참석자들 하나하나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들.

한국에서는 나를 제외하고도 꽤 많은 수의 정재계 인물들이 참석하는 중이다.

[오랜만입니다, 다니엘 교수님.]

난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포럼의 주최자인 다니엘 교수를 찾았다.

세계경제포럼의 의장이라는 직함 덕분에 이미 수년 전부터 나와는 안면이 있던.

그렇다고 해서 딱히 중요한 인물로 여겼던 존재는 아니었는데, 나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인문학자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고, 굳이 친하게 지낼 만큼의 이점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주된 원인이었다.

[오! 오랜만입니다. 진현승 회장님. 덕분에 포럼이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달튼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바로 토마스였으니까.

당황스러운 것은 그가 유태인도 아니라는 점인데, 어떻게 비유태인계가 카자리안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과한 말씀이시군요. 저야 일개 기업의 대표일 뿐인걸요.]

[무슨 그런 말씀을.]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그는 나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마치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

혹여 달튼의 변절을 눈치챈 건가?

해서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헤라도 끼칠까 싶어서?

[전 그럼 기조연설을 위해 올라가 보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는 그의 눈빛에선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눈치챈 느낌.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조금 후, 연단에 올라선 다니엘이 좌중을 둘러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에 의도가 숨겨져 있음이 드러난다.

4차 산업의 활성화를 통한 디지털 아이디 구축.

향후 또 발생할 수 있을 펜데믹 상황하에서 모든 국가가 WHO의 정책을 의무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까지.

이건 한마디로 대놓고 통제정책을 시행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해서 우린…….]

한창 연설을 진행 중이던 다니엘 교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곤 나를 노려봤다.

수상쩍은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고, 이후 그의 코에선 한 줄기 핏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교수님!]

놀란 경호원들과 행사 관계자들이 그를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걸까, 힘없이 주저앉은 그는 결국 경호원의 등에 업혀 나간다.

‘차지환이 제법 일을 잘 수행했군. 하긴, 사람은 뭐든 마셔야 사는 법이니까.’

짧은 기간에 용케 결과를 이끌어 낸 차지환을 속으로 칭찬하며 돌아섰다.

확실히 난 연기는 무리인 건가.

애써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힘에 부친다.

‘아흔이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 아니,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았으면 욕심은 좀 내려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인류가 가진 숙명인 마당에.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욕심이 바로 인류의 가장 큰 적이 아닐까 싶다.

“우린 이만 가죠.”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강 소령을 향해 철수를 명령했다.

순간 사방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죄다 나를 경호 중인 인물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이자 시선이 집중된다.

“어디로 모실까요?”

현관을 빠져나오자 강 소령이 넌지시 물었다.

글쎄, 이젠 뭘 해야 할까.

잠시 고민 끝에 말했다.

“미국으로 가야겠죠. 그동안 저들로 인해 무너졌던 상식을 재건할 차례니까.”

***

2023년 3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미국은 이제 진정한 민주국가다운 면모를 갖춰 가고 있었다.

비록 전과 같이 로비가 횡행하고 정치싸움은 격하지만 온갖 음모가 판을 치던 전의 모습은 사라진,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미국으로.

덕분에 우리와의 관계 역시 전보다 강력한 끈으로 연결되었고, 이젠 모든 국제문제에 있어서 수시로 정부 핵심인물들이 오고 가는 상황이다. 

[펜데믹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코로나로 인한 펜데믹을 극복한 것이 불과 수년 전.

이번엔 또 다른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펜데믹을 선포할 상황에 처했으니까.

[혹시 이번에도 인위적으로 발생된 바이러스는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조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에 유행 중인 카론 바이러스는 유전자조작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중국은 이제 그럴 만한 힘도 이유도 없고요. 혹시라도 다른 국가들에서 의도한 것일까 싶어 조사해 봤지만 특정할 만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넌지시 뱉어 낸 내 말에 엘레나 국무장관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미국이 이미 그 부분에 대한 조사를 끝마쳤다면 의심은 버려도 좋을 터.

문제는 이번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파력과 더불어 치명률까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인데, 덕분에 개량을 진행 중인 우리의 신약에 거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큰 상황이었다.

[치료제의 개발 성공가능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최대한 백신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논쟁의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창궐하는 전염병을 오로지 치료제 하나에만 의존하기는 무리라는.

아쉬운 것은 백신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이럴 때면 메르칸 같은 존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삐이!

생각이 깊어질 무렵 회의장의 인터폰이 울렸다.

중요한 회의 중엔 좀처럼 없던 일인 터라 총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고, 곧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 회장님을 찾는데요?”

***

두두두.

연락을 받고 달려온 곳은 재우제약 연구소였다.

백신 개발 문제에 있어서 한 줄기 빛이 비추었다는 소식으로 인해서.

오는 동안 전달받은 사실에 따르면 최근 재우제약연구소에 영입된 젊은 연구원의 제안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나로선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도착하신 겁니까?]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은 시간 만에 도착한 나를 보며 메르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손가락으로 원을 뱅뱅 그려 보인 난 재차 확인사살에 나섰다.

[요즘은 헬기에 적응을 잘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백신 개발이 가능하겠습니까?]

[1차 임상 지표상으로는 최대의 기대수치가 나왔습니다. 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2차 및 3차 임상을 실행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문제는 시간단축인데, 3상이 시작될 시점에 회장님께서 정부에 긴급 사용승인을 제안해 주셔야 합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대체 누굽니까,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는 연구원이.]

[아 그게, 얼마 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친구입니다.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우리 연구소로 찾아와 합류를 요구했었죠.]

[박사님께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보통 실력은 아니겠군요.]

메르칸은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많지만 당장은 그걸 다 풀어내기가 힘에 부치는 듯한 얼굴.

이미 그 표정만으로도 대답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저기 오네요.]

그때, 복도 한편에서 누군가 우릴 향해 달려왔다.

내가 찾는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오는 듯.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물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명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자 퍼뜩 놀란 표정을 지은 그는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이며 손을 맞잡는다.

“응?”

그때, 사내의 손목에 있는 문신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문신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한, 마치 반도체 칩과도 비슷한 문양을 하고 있는.

내 팔목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형태다.

‘뭐지?’

당황한 마음에 한지명의 손을 끌어당겼다.

놀란 그가 움찔했지만 단지 그뿐.

이후 다시 마주한 한지명의 눈은 얼핏 내 손목을 향했고, 곧 그의 얼굴에선 묘한 미소가 스쳤다.

마치 진리를 깨달은 수도승의 그것처럼.

“그랬군요. 역시나 회장님은…….”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한지명 씨.”

다급히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이후 여전히 들뜬 표정의 그를 뒤로하고 돌아선 난 내심 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웃어 보였다.

‘하필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나로선 환영할 만한 상황인가? 고맙군, 한지명, 아니 차인호 씨.’

-<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외전 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