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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3 (371/372)

외전-13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예일대학.

“흠, 달튼 이 친구가 웬일로 전화를 안 받는 걸까?”

노인은 응답이 없는 휴대폰을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두 번 정도야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다 쳐도 벌써 열 번이 넘는 시도에도 통화연결이 안 되는 상황.

최근 들어 그를 괴롭히는 불안감이 한층 증폭되는 느낌이다.

“교수님, 회의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때마침 방에 들어선 여비서는 교수 회의가 임박했음을 알려 왔다.

명색이 인문대학원의 종신교수이자 원로 중 원료인 그가 회의에 늦을 수는 없는 법.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비서가 다급히 다가오며 부축한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시다가 또 지난번처럼 넘어지시면 큰일 납니다. 이제 교수님도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그러게 말일세. 이젠 나도 아흔을 훌쩍 넘겼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영 쉽지 않군. 자네가 없었으면 어찌 살았나 싶어.”

대꾸하는 교수의 얼굴에는 인자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모두가 인정하는, 평생을 박애주의정신으로 살아온 존재.

어쩌면 비서가 무려 10년 넘게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바로 교수의 그런 인품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맙네, 이제부턴 혼자 가도록 하지.”

바쁜 비서의 입장을 고려한 교수는 슬그머니 손을 뿌리치며 복도로 향했다.

곧 안쓰러워하는 비서를 뒤로한 그는 긴 복도를 걷는 동안 스치는 생각의 줄을 붙잡았다.

‘설마 변절이라도 한 건가?’

그건 연락이 두절된 달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평생 동안 그의 수족 노릇을 해온 인물이니만큼 변절 가능성이야 크지 않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그는 배신감에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할 거다.

‘아니, 달튼이 그럴 리가 없지.’

잠시 들었던 의심을 떨쳐내려 혀를 찬 교수의 뇌리엔 옛 기억이 자리 잡아 갔다.

처음 그가 미국 땅을 밟았던 시기.

그리고 달튼가 일원들과의 만남에 얽힌.

아마 당시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 테고, 이처럼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지도 못했을 거다.

어둠 속에서만 호령하는 반쪽짜리 왕이라곤 해도.

‘달튼. 그러고 보면 어린 꼬마가 참으로 똑똑했지.’

사실 똑똑한 걸로 치면 달튼 보다는 그 부친이 한 수 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미국 내에서도 나치 잔당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던 시기.

타고난 수완으로 나치 부역자였던 교수 가족들의 꼬리표를 떼어 준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뚜벅 뚜벅!

달튼가의 대단함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사업 수완마저도 뛰어난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독일을 탈출하며 빼돌린 막대한 금괴를 토대로 미국 경제를 교수 집안의 손아귀에 쥐여 주었을 정도.

이후 달튼가의 똑똑함은 곳곳에서 빛이 났고, 현재 달튼가의 장자인 달튼 시모이의 경우 교수 본인의 손발이 되어 카자리안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유태인들은 참…….’

생각이 그에 미치자 교수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늘 시작만 하면 성공을 해내고야 마는 유태인들의 능력이 그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갔기에.

막말로 미국의 주류를 장악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 겨우 10년에 불과했다면, 그게 신이 주신 재능이라는 저들의 자존감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 않던가.

‘그럼 뭐 할까, 결국엔 그 유태인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나이거늘. 그저 나치 부역자의 후손에 불과한.’

막상 그 생각을 하니 찌푸려졌던 미간이 절로 펴진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뒤이어 찾아온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결국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약점인 게지.’

물론 현재 카자리안 그룹에서의 그의 권위를 생각하면 그의 근본 따위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냐만.

교수 본인에겐 그게 영원히 떨쳐 낼 수 없는 흠이다.

“오셨습니까, 교수님.”

겨우 도착한 회의실에선 많은 수의 인물들이 그를 맞았다.

그가 키워 온 제자들이자 동료 교수들.

우스운 것은 저들 대부분이 카자리안 계열의 유태인들이라는 건데, 이럴 때면 더더욱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무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카자리안 그룹을 불과 수십 년 만에 장악해 버린 자신의 능력을.  

“자네도 이번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해야지?”

교수는 마침 자신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온 제자를 향해 물었다.

세계 최고의 경제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을까, 제자는 잔뜩 흥분한 투로 대꾸한다.

“교수님께서 기조연설자로 참석하시는 마당이면 당연히 저도 가야죠.”

“흠, 그나마 다행이군. 그 먼 길이 그다지 적적하지는 않겠어.”

교수는 제자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내 잠시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핑계로 다시 방을 나선 교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자네의 대부로서가 아닌 토마스의 입장에서 한마디 하지. 난 배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네, 달튼 군.

***

같은 시각 미 국무부.

“엔더슨 농림부 차관이 오늘 오전 입원했다고 합니다.”

“헤리슨 재경부 장관도 상태 이상을 호소하며 방금 병원으로 호송됐다는 보고입니다.”

엘레나 국무장관은 수일 전부터 올라오는 보고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첫 시작은 그녀의 수석 비서에서부터.

이후, 국무부 내 각 부처에서 환자가 속출하더니 불과 이틀 사이에 정부 전 기관에서 환자의 수가 늘어갔다.

“CDC에서는 아직도 사태 파악 중인 건가?”

가장 의심되었던 것은 코로나의 재확산이었다.

감염성 질환이 아니라면 이렇듯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할 이유가 없으니까.

“현재 정밀 검사를 진행 중이긴 한데,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사례는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보고는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고,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다시 제자리걸음이 되었다.

“감염사태가 아니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백악관에선 상황보고를 독촉하는 와중.

명색이 국무장관이라는 존재가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대통령 앞에 설 수는 없지 않던가.

삐!

“장관님. 리암 회장님께서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때, 인터폰이 울리며 비서의 전언이 들려왔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상대가 상대인 터라 결국 면담을 허락한다.

덜컥!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장관.”

“귀하신 분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방에 들어서며 건네는 리암의 인사에 엘레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밝혔다.

한차례 악수가 오고 가고.

자리를 권하는 그녀의 손짓을 따라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던 리암이 대뜸 그녀가 처한 상황을 언급한다.

“요즘 정부 부처 내에서 이상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의 속출로 머리가 아프시겠습니다.”

“그 소식이 벌써 회장님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군요.”

엘레나는 시니컬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순간 강렬한 눈빛을 발한 리암이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 냈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태가 결국은 나로부터 비롯된 마당에.”

“…….”

엘레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리암을 쳐다봤다.

다행히 의미를 이해한 건지 이후 그녀의 입술이 뻐끔거렸고, 리암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정정하죠. 정확히는 내 뒤에 있는 인물이 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해야겠군요.”

“회장님의 뒤에 있는 인물이요?”

이번에는 그녀도 상황파악이 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리암과 같은 존재를 누군가 뒤에서 조종한다는 것이 상상이나 갈 일인가.

상황과는 걸맞지 않게 엘레나의 마음속엔 이제 호기심이 샘솟았다.

“뭐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이 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현재 미국 내의 주요 경제인과 정부 관리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감염병의 확산 따위가 아니라 청소 작업에 의한 결과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인류 역사의 오점들을 대상으로 한.”

“그건 또 무슨…….”

당황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엘레나의 눈은 잔뜩 빛이 났다.

‘청소’라는 짧은 단어.

그게 모든 상황을 정리해 주는 키워드였으니까.

사실 그녀 역시 최근 카자리안과 세르파디들과의 분쟁이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던 터였기에 더더욱 상황정리는 빨랐다.

“저는 지금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하지만 그녀는 끝내 시치미를 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 정부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유태인 그룹 간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으니까.

그건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정부 주요부처의 책임자라면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인데, 한 부서의 장급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연스레 전해지는 조언이기도 하다.

“이해를 못 했다기보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리암은 슬그머니 대화를 회피하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미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양대 권력자 중 하나가 저렇듯 직설적으로 나오면 방법은 없는 터.

결국 엘레나 역시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대화에 임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말했지 않습니까, 청소 작업 중이라고. 지금껏 미국을 좀먹었으며 앞으로는 파멸로 이끌 카자리안들과 그 하수인들을 대상으로 한.”

“맙소사! 그 말씀은, 이제껏 이어져 오던 힘의 균형을 깨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전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엘레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상관하지 않은 채 리암의 말이 이어졌다.

“장관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건국 이래 쭉 미 정부 관리들에게 전해져 오던 규칙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규칙은 지킬 필요 없습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카자리안들이 득세할 일은 없거든요.”

엘레나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죽 미소를 내비친 리암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탁 하고 바닥을 치며 말한다.

“못 믿으시는 모양인데, 이미 카자리안 그룹의 핵심 간부들은 차례로 제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고.”

“…….”

“더군다나 윌리엄 회장과 에머슨 회장같이 핵심 축들이 죽어 나간 상황이면 무슨 힘이 남아 있겠소.”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 그보다는 무슨 방법으로 사람을 손도 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거죠?”

“방법은 나도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방법을 모른다고요?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아쉽지만 그렇소이다. 내 뒷배가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워낙 철저한 인물이라서. 사실 나 역시 그 때문에 이 상황을 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오.”

“…….”

“아! 그리고 이건 여담으로 하는 말인데, 현재 이미 사망했거나 사망할 예정에 있는 정부부처 직원들은 카자리안들의 하수인들이었다는 것을 참고하시기 바라외다.”

마지막 말은 엘레나의 심장을 방망이질 치게 했다.

솔직히 지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카자리안들의 유혹이 없었을까.

만약 그 유혹에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 역시도 같은 꼴을 당했을 테고, 오늘 같은 대화의 자리는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맞아요, 옳은 선택이었죠. 해서 내가 굳이 장관을 선택한 것이고.”

생각이 깊어지던 와중 리암이 마치 속을 읽은 듯한 말을 뱉어 냈다.

절로 넘어가는 마른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차, 리암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내가 당장 장관께 부탁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과 현재 죽음의 문턱을 밟고 있는 자들. 그리고 앞으로 죽어 나갈 자들에 대한 정부조사결과를 코로나 후유증에 의한 사망으로 조작해 달라는 것.”

“그건 왜…….”

반문하던 엘레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라면 사망자의 숫자는 수천에 달할 터.

갑작스러운 다수의 죽음에 대해. 그것도 대부분이 사회지도층인 마당이면 당연히 사망 원인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될 것이 아닌가.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정부부처의 입을 주시할 터, 지금 리암은 정부가 나서서 그 의구심을 잠재워 달라는 거다.

씨익.

엘레나는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은 리암을 쳐다봤다.

조금 후, 그녀는 가뜩이나 각진 턱에 잔뜩 힘을 주며 말한다.

“그럼 저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뭐죠? 아무리 힘의 균형이 깨졌다지만 상대는 카자리안입니다. 최악의 경우 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겠죠. 해서 당신의 안전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장할 거요. 그리고 이변이 없는 한은 당신이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테고.”

엘레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났다.

그도 잠시, 또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넌지시 리암의 눈치를 살핀다.

“그 말씀은, 현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한다는 건데, 그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

“현 대통령이야 어차피 유대그룹 문제에 있어서는 중립적인 인물인데 굳이 대상에 포함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아무리 꼭두각시라 해도 대통령이 변을 당하는 상황은 우리로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고. 문제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몇몇 장관과 정부 내 사조직들인데, 그들은 피해 가지 못할 겁니다.”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치고는 꽤 담백한 투였다.

그것도 미 정부의 권력자들을 상대로.

덕분에 긴장감이 더 극에 달한 엘레나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어쩌시려고요? 그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달튼 박사가 나를 찾아왔더군요. 소문에 의하면 그가 토마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데, 아마 조만간 그의 입이 열릴 거요.”

그게 사실이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카자리안들의 수뇌부는 궤멸적이라 할 정도로 제거되고 있는 상황이고 정부 내 동조자들도 그건 마찬가지.

남은 것은 머리를 자르는 것과 군의 동요를 막는 것뿐인데, 어차피 곧 머리는 사라질 운명일 것 같지 않던가.

“참고로 군은 염려할 것 없습니다. 지금의 주요 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군이 개인의 욕심 때문에 희생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니까. 군이 카자리안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나섰던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순간 그녀의 결심을 굳힐 더없이 확실한 말이 들려왔다.

사실이라면 기회를 놓치는 것이 외려 바보 같은 짓.

언제 그랬냐는 듯 엘레나의 손이 내밀어진다.

“저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군요.”

“내게 감사할 이유는 없소이다. 그저 당신이 스스로의 주제를 잘 알고 있는 것이 다행인 것이지.”

리암은 짧은 대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후 그가 방을 나서는 내내 엘레나의 표정은 희열에 들떠 있었다.

***

햇살이 눈을 자극했다.

늦은 봄의 향기가 절정에 달한 시기.

오늘따라 왠지 바람이 쐬고 싶다는 생각에 새로이 공장이 들어서는 중이던 파주로 향했다.

부르르!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에 의아함을 느낀 듯 김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오전 일정을 뒤로 미루라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암 회장님으로부터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손님 한 분이 곧 회장님과의 면담을 위해 본사를 찾으실 거라고 합니다.

“손님?”

-누군지는 밝히시지 않았는데, 회장님께서 꼭 만나 봐야 할 인물이라고 하시네요.

난 그 말에 즉시 차량을 되돌렸다.

굳이 리암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전에 언질을 주었던 상태였기에.

상황이 이러면 마음먹고 봄 향기를 느끼겠다는 내 계획은 물 건너간 듯하다.

띵동!

“오셨습니까, 회장님. 안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비서진들이 득달같이 다가오며 소식을 알려 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보안 수준을 높일 것을 지시.

이내 문을 열자 백발이 잘 어울리는 외국인 한 명이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다가온다.

[달튼 시모이라고 합니다. 존스홉킨스 대학 내분비학과의 학장이자 백악관 질병관리 자문역을 담당하고 있죠. 뭐 진 회장님께는 그런 허울 좋은 직함보다는 카자리안 그룹의 서열 2위인 존재라고 소개해 드리는 것이 더 편하려나요?]

그의 자기소개는 단도직입적이었다.

하긴 목적이 목적인 만큼.

난 잠시 지었던 비즈니스적인 표정을 버리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현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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