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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1 (369/372)

외전-11

달튼은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생뚱맞게도 마음속 한편에선 재우의 기술력에 대한 감탄이 샘솟는 상황.

유전자 복구가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해서요?”

한창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 에머슨 회장이 끼어들었다.

재우라는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표정이 그다지 편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때문에 우리로선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아쉽게도 야콥사의 어설픈 삽질이 진 회장의 독만 잔뜩 오르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걸 탓할 수는 없죠. 어떻게든 그 치료제를 입수하여 파훼법을 찾아내야 계획이 성공할 테니까.”

“누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진현승입니다. 어설프게 건드리기보다는 차라리 끌어들이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죠.”

“하지만 그건 너무 비굴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뭐가 무서워서 진 회장을 끌어들인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그는 유태인도 아니에요.”

에머슨은 답답하다는 표정과 함께 반발했다.

순간 그를 바라보는 윌리엄의 시선은 마치 철없는 아이를 보듯 변해 있었다.

“답답한 심정이야 이해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감히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낸 자와 한편이 된다는 것은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죠.”

“끄응.”

에머슨은 불만 가득한 침음성을 뱉어 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위기의식을 느껴 보지 못한 카자리안들의 오만함에서 나오는 태도.

어쩌면 문제해결에 앞서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먼저 고쳐 주는 것이 우선일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윌리엄의 뇌리를 스쳤다.

“이건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에머슨 회장께선 현재 한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은 나도 압니다만.”

“쯧쯧, 바로 그 점이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발판 삼다 보니 정작 변화에는 둔감하다는 것. 미안하지만 현재 한국은 단순한 지역 강국이 아닙니다.”

“…….”

“이미 오랜 기술개발을 통해 미래 산업의 중심국으로 거듭난 것은 물론, 자원대국들과의 연대와 기술 확보. 그리고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통해 막강한 에너지 및 자원 부국으로 등극했죠. 그런 한국. 아니 진현승을 건드리는 것은 차라리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이 나라의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보다 힘든 일임을 주지하셔야 합니다.”

“…….”

에머슨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말을 만약 다른 이가 한 것이라면 과한 우려라고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건만, 하필 상대는 세상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읽어 내는 윌리엄 머레이 회장이었기에.

그때, 윌리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참고로 야콥사는 단순히 우리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현재 우리 입장에선 진 회장이 그들만을 응징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는 것에 대해 다행으로 여겨야죠.”

“진 회장이 이대로 사태를 마무리 지을 거라 장담할 수는 있고요?”

이번에 대꾸를 한 자는 루크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세계적인 곡물회사인 몬산토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전 세계 곡물시장 분야의 보이지 않는 큰손.

어찌 보면 그야말로 진현승에 대한 윌리엄의 평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건 한때 미국 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던 리암을 돕기 위해 나섰던 진현승의 행보를 지켜봐 왔던 영향이 컸다.

“보복을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지금쯤 여기 있는 몇몇 분들의 회사가 어떤 형식으로든 이미 공격을 받고 있었겠죠. 하니 진현승 역시 사태를 이쯤에서 봉합할 생각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 순간 다양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다행히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대한 안도의 한숨.

그러면서도 무너진 자존심에 대한 분노는 또 내려놓지 못하는 태도.

무리도 아닌 것이 그들 하나하나가 바로 세계사를 써 온 가문의 후손들인 마당에 고작 아시아의 신흥맹주 따위를 상대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 어디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하지만 진 회장이 과연 우리와 협력하겠습니까?”

그때 에머슨의 말이 다시 뱉어졌다.

비록 말은 진현승을 인정하지 않는 듯했어도 정작 그를 두려워하는 모양새.

확실히 힘의 논리 앞에선 가문의 위상과 역사 따위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난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차피 그 역시 이재에 능하고 권력의 맛을 아는 존재니까. 솔직히 수조 달러에 달할 암 관련 사업의 한 축을 내어 준다는데 무작정 거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수조 달러란 윌리엄의 표현은 딱히 무리가 아니었다.

현재도 암 관련 사업은 한 해 수백, 수천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까.

그 상황에서 만약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면.

즉, 야콥사가 개발한 백신이 절대다수의 몸에 주입되어 암 환자를 대량 양산하고, 이후 윌리엄이 개발한 치료제가 보급된다면 솔직히 조 단위가 문제겠는가.

“아무튼 진현승이 우리와 한편이 된다면 앞으로 우리와 갈등을 일으킬 만한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세파르디들은 이미 퇴물들이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마지막 말을 뱉어 내는 윌리엄의 얼굴엔 한껏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비록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곧장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비록 정통성이 문제긴 해도 그와 손을 잡는다면 앞으로 ‘우리만의 영원한 그림자 정부’를 구축한다는 꿈도 무리는 아니죠.”

웃으며 뱉어진 에머슨의 말은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보였기 때문일까, 조금 후 그들의 고민은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치료제의 단가를 병당 최소 삼만 달러 이상을 책정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개발 국가들이 그 정도 가격을 감당할 수는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아프리카 같은 극빈층의 국가들은 힘들겠죠. 하지만 우리의 고객들은 신흥국과 선진국들이고 그들에겐 의료보험이라는 훌륭한 체계가 있습니다.”

윌리엄은 넌지시 뱉어진 에머슨의 염려에 웃으며 대꾸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거품을 물고 분노했을 대화들.

하지만 저들에겐 그 반인륜적인 대화들이 그저 일상에 불과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노릴 것은 쥐뿔도 없는 인간들의 주머니 속 쌈짓돈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들의 창고죠.”

“네, 그 때문에 내가 오래전부터 각국의 의료보험 체계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꾸도록 유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각국의 암 관련 의료보장은 그 어느 때보다 후한 상황이 되었죠.”

“그러고 보면 윌리엄 회장의 공로가 참으로 큽니다, 그려.”

닥친 문제와 달리 분위기는 점점 유해져 갔다.

윌리엄의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

한차례 숨을 몰아쉰 그가 넌지시 숨겨 왔던 욕망을 드러낸다.

“아무튼, 여러분들이 믿어 주신다면 진현승 회장과의 협상은 제가 꼭 성공시키도록 하죠.”

“오오! 우리야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솔직히 그와 한자리에 앉는다는 게 영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 터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앞으로 윌리엄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무엇인지쯤은 다들 짐작하고 있다는 의미.

부담감은 심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부하기도 뭣했던 터라 결국 다들 수긍하고 만다.

“말씀해 보시죠.”

“첫째, 만약 제가 이번 협상을 성공시킨다면 공의회 부의장 자리를 제게 주십시오.”

공의회 부의장 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그가 단숨에 카자리안 그룹의 서열을 2위로 치고 올라가겠다는 뜻이었다.

예상보다 큰 요구에 다들 당황할 무렵 에머슨이 넌지시 말한다.

“난 찬성입니다. 윌리엄 회장이 비록 가문의 후광은 없다지만 이제껏 우리를 위해 애써 온 공로는 인정해야죠.”

윌리엄의 얼굴엔 순간적으로 어색한 표정이 스쳤다.

겉으로 보면 칭찬하는 말이 분명하지만, 그건 내심 그가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임을 드러내는 거니까.

하지만 윌리엄은 에머슨의 말이 딱히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단지 귀족가문 출신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오만함이 드러나는 것일 뿐.

“에머슨 회장께서 동의하신다면야…….”

사람들은 결국 윌리엄의 요구를 수긍했다.

한데 그것만이 아니었던 걸까, 이후 윌리엄의 두 번째 요구가 이어졌다.

“앞으로 실행될 식량위기를 좀 더 심화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해서 제가 근래 매입했던 농지들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을 소각할 예정인데, 다들 그 부분에 동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당신이 최근까지 사들인 농지는 카길사가 보유한 농지 규모와 맞먹습니다. 그 많은 식량들을 소각해 버린다고요? 그렇게 되면 미국 내에서의 식량 위기도 예상보다 심각해질 텐데요?”

달튼 박사는 윌리엄의 주장에 대뜸 반발했다.

힐끗 그를 쳐다본 윌리엄이 무심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그로 인해 미리 식량을 확보한 우리의 수익은 더 확대될 겁니다.”

“그러다가 폭동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어차피 폭동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위해서 지금껏 미국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던 것 아닙니까?”

“…….”

“더군다나 대중들도 잦은 폭동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포기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확고한 통제사회 구축은 결국 시민들의 포기를 유도해야 가능한데, 잦은 폭동에도 정부가 굴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결과는 포기로 이어질 것 아닙니까.”

달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록 그 역시 카자리안의 일원이었지만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저들의 악마성에 지친 탓.

하지만 단지 한숨짓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어차피 그는 자의와는 상관없이 이 진흙탕에서 태어났고 길들여져 왔으니까.

그의 가문은 선조부터 대를 이어 온 카자리안의 일원이었기에.

철컥!

달튼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음식을 실은 웨건이 들어섰다.

워낙 이른 시간의 모임이었던 터라 아침도 굶고 왔을 손님들을 위한 윌리엄의 배려.

이후 각각의 앞에 식사가 배정되는 것을 지켜보던 윌리엄은 짝 하고 손뼉을 마주쳐 주위를 환기시켰고, 곧 물 잔을 들며 자리에 없는 인물을 언급했다.

“이 자리에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의장님을 위해 건배하죠.”

챙!

사람들은 서로 물 잔을 부딪치며 윌리엄의 말에 호응했다.

그들과는 달리 내내 표정이 어둡던 달튼 박사는 뭣 때문인지 한참 동안 물 잔을 쳐다만 봤다.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은 의아하다는 표정과 함께 달튼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시선을 물 잔에서 떼지 않던 달튼이 가늘어진 눈매를 하며 말한다.

“방금 읽어본 보고서에 따르면 엑슨사가 개발 중인 그 ‘암세포’ 자살 명령물질이 경구용으로도 개발 중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이미 경구용으로도 개발이 완료된 상태죠. 한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럼 ‘정상세포’의 자살을 유도하는 물질도 당연히 경구용으로 개발이 가능하겠군요.”

“그야 당연하죠.”

윌리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대꾸했다.

이후 한참 동안 달튼을 쳐다봤지만 정작 달튼은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제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꽤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정상세포자살 명령이 가능한 효소의 구체적인 제조법이 누군가에게 유출된다면? 해서 누군가 고의로 우리가 마시는 물과 음료에까지 그게 섞여 들게 만들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윌리엄은 그 말에 헛웃음을 뱉었다.

설마 천하의 ‘윌리엄 머레이’가 그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은 눈빛으로.

이후 그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달튼에게 말했다.

“우리 연구소의 보안은 그리 허술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 그게 유출된다 해도 세포자살 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는 ‘열쇠’의 개발 역시 끝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달튼은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응수하곤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왜일까.

내내 마음을 파고드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고 보니 그 부분도 문제군. 만약 세포자살 명령을 무효화하는 효소를 윌리엄 혼자만 독점한다면?’

아마 그땐 윌리엄의 말이 곧 저들에게는 법이 될 텐데, 그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후우, 그거야 토마스 의장이 알아서 하겠지.’

달튼은 그 부분에서 안식을 되찾았다.

아무리 윌리엄의 욕망이 크다곤 해도.

해서 방금 전 들었던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온다 해도 토마스 같은 인물이 어수룩하게 당할 리는 없을 것이기에.

진정한 세계의 왕은 그런 존재니까.

***

“지금요?”

며칠 후, 달튼은 이른 아침부터 백악관의 요청을 받고 차에 올랐다.

백악관 질병정책 자문으로서 차후 다시 벌어질 수 있는 펜데믹 사태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하자는 요구로 인해서.

한데 대략 10여 분쯤 후면 도착을 앞두고 있던 와중 비서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온다.

“무슨 일이지?”

-박사님, 윌리엄 머레이 회장이 새벽녘에 응급상황으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해서 지금 공의회 회원들의 비서진들이 죄다 병원에 집결 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며칠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무슨 사고라도 난 거야?”

-사고는 아니고 영문 모를 출혈과 피로감을 호소하며 입원하셨다는데, 병원 측에선 아직까지 정확한 병명을 밝혀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병명이 밝혀지지 않아?”

-그렇습니다. 한데 담당의사의 말에 따르면 온몸의 세포가 급격하게 파괴되고 있다는…….

“…….”

순간 달튼의 뇌리를 스친 것은 이전 모임에서 가졌던 윌리엄과의 대화였다.

그가 개발 중인 치료제는 경우에 따라 정상세포에게도 자살을 유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설마, 그걸 윌리엄에게? 대체 누가?”

-네?

비서는 달튼의 혼잣말에 반응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달튼은 때마침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에 되물었다.

“혹시 윌리엄이 자신의 전담주치의를 불러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나?”

그건 윌리엄이 보유 중이라는 ‘열쇠’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포자살 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효소의 존재.

정말로 윌리엄이 자신이 만든 것에 당한 상황이라 해도 그게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던가.

-아! 안 그래도 2시간 전 전담주치의가 다급하게 병원을 찾아오기는 했습니다. 이후 뭔가를 윌리엄 회장의 몸에 주사하기는 했는데, 그 역시 아무런 효과가 없는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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