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0
2022년 5월 영국 런던.
-미래의 선도자가 되겠습니다.
런던에 소재한 엑슨 소프트 연구소에 걸려 있는 문구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것이었다.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것이야말로 기업들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꿈.
때문에 늘 그 문구를 마주하는 이들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흠.”
하지만 정작 연구소 책임 연구원인 피터에게는 그 문구가 단순한 캐치프레이즈에 지나지만은 않는다.
그가 지금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는 연구물들은 실제 미래를 주도하게 될 것들이니까.
“자네, 오늘따라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그래 보입니까? 아무래도 이틀간의 꿀 같은 휴식 덕분인 모양입니다.”
피터는 출근길에 마주친 상사의 안부 인사에 웃으며 대꾸했다.
이후 무빙워크에 올라 한참이나 이동한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바이오 연구센터.
애초 컴퓨터 운영체제로 돈을 벌어 왔던 기업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부서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팀장님. 안 그래도 방금 미국 본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료들의 보안 상태를 보고하라는 독촉이 말도 못 합니다.”
몇 번의 절차를 거쳐 랩 안으로 들어서자 부하연구원의 한숨 섞인 투정이 들려왔다.
한때는 그와 함께 미국의 빅 파마에서 핵심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함께 이곳 엑슨 소프트로 터전을 옮긴 인물.
능력과 성실함 면에서는 백 점을 줄 만한데, 간혹 보이는, 저런 식의 과도한 투정이 문제인 친구다.
“내가 이틀이나 자리를 비운 터라 보안 상태가 염려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뭘 그래. 일단 자료스캔 작업 끝내고 전화한다고 해.”
“그럼 팀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 안 그래도 지금 효소반응 테스트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어차피 금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팀장님뿐이니 기왕이면 직접 통화도 해 주시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피터는 애원하는 부하의 태도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구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금고로 향했다.
핵심자료의 경우 서류방식을 고집하다 보니 매일 이렇듯 자료 상태를 손으로 확인하는 상황.
뭐 보안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이럴 때면 짜증이 치솟는다.
“보안도 좋지만 영 불편한 일 아닙니까? 매번 핵심 자료들을 찾으려면 팀장님을 통해야 한다는 거. 아니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해킹이 염려되어 이런 구시대적인 방식을 쓰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그사이 이어진 부하의 불만은 방금까지 그가 가졌던 불만이었다.
지금이 20세기도 아니고 자료들을 고작 종이로 보관하고 있는 이 현실.
물론 자료마다 고유 인식 칩이 내장되어 있음은 물론, 훼손 및 복사 그리고 유출방지용 도트가 촘촘하게 내장된 특수종이를 사용한다지만.
어차피 내부자가 마음만 먹으면 사진 같은 것을 통한 유출만큼은 막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던가.
‘하긴, 출입과정에서 전자기기의 소지를 금지당하는 것은 물론 거의 24시간을 감시당하는 연구원들이 그 짓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기는 하지.’
그는 혀를 차며 금고의 보안을 해제하는 절차를 시행했다.
이후 막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차에 뒤편에서 부하의 투정이 다시 들려온다.
“전 솔직히 윌리엄 회장이 무슨 생각에서 바이오 분야에 투자를 하고 있는지도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막말로 운영체제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엑슨 소프트가 뭐가 아쉬워서 바이오 분야를 건드리는 건지 원.”
사실 그 부분은 한때 피터도 가졌던 의문이었다.
막말로 엑슨 소프트는 애플과 함께 전 세계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 체제를 양분하고 있는 회사.
때문에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 갈 미래 먹거리의 방향성을 정하자면 최소한 연관성이 어느 정도는 있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은.
“자넨 스스로의 연구물에 대해서 지나치게 모르는군. 앞으로 그게 얼마나 돈이 되는 분야가 될지에 대해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 단순히 벗어난 것만 아니라 이젠 윌리엄 머레이 회장의 천재성을 경탄할 정도.
솔직히 인체의 세포를 컴퓨터 운영체제처럼 프로그래밍한다는 발상은 윌리엄 머레이 회장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상상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게 정말 컴퓨터 언어를 통해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컥!
문을 닫고 금고 안으로 들어선 피터는 금고 벽에 있던 버튼을 눌렀다.
순간 벽 사방에서 뿌려져 나온 레이저 같은 빛 무리가 자료들에 내장된 칩을 스캔.
결과는 곧바로 본사에 전송될 테고, 특이사항이 없다면 자료의 안전을 확인하는 작업은 그것으로 끝이다.
“원시적인 방법이라고는 해도 또 이럴 땐 편리하단 말이야.”
확인을 끝낸 피터는 다시 벽에 있던 버튼을 눌러 스캐너를 해제했다.
이후 다시 금고를 빠져나가려 문에 지문인식을 시도하려는 순간, 하필이면 마지막 칸에 있던 자료박스의 뚜껑이 패턴과는 다르게 덮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의아한 마음으로 박스로 다가간 피터는 박스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행여 남의 손을 탔을 경우를 확인하기 위해 해 두었던 미세한 마킹이 틀어져 있는 상태다.
‘이 많은 보안을 뚫고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휙!
다급한 마음에 그는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이후 안에 있던 서류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그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분실된 자료는 없는데?”
걱정과는 달리 서류들은 온전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이유는 사진이라는 수단이 있기에.
철컥!
그는 재빨리 금고 내부에 있던 인터폰을 들어 올렸다.
혹시라도 이 금고에 출입한 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수화기를 내려놨고, 이후 한동안 눈알만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자료가 온전하게 남아 있기는 해도 정황상 유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사실 답은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윌리엄 머레이 회장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물.
때문에 그 역시 제거당할 것은 자명하다는.
부르르!
생각이 그에 미치자 답은 명료해졌다.
자신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굳이 밝혀지지 않을 일을 스스로의 손으로 들춰내지는 말자는.
어차피 연구소 내 누구도 보안이 뚫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아니, 보안이 뚫린 흔적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하면 자신만 눈을 감아 버리면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던가.
스윽.
그는 결국 다시 상자를 닫고 돌아섰다.
이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금고를 빠져나온 그는 마침 늦어지는 그를 염려하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휘하 연구원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실험할 것이 MS-5의 효소반응이었던가? 서두르자고, 조만간 윌리엄 회장이 스폰서들에게 연구내용을 보고해야 한다니까 말이야.”
***
2022년 7월 워싱턴 엑슨 소프트 본사.
“스카이라운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윌리엄 머레이의 초대로 엑슨 본사를 찾은 이들은 곧장 꼭대기 층으로 안내되었다.
총 스무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미국 정제계의 파워 피플들.
때문인지 건물 인근의 보안과 감시는 이미 대통령에게나 제공되는 시크릿 서비스 수준을 넘어서 있었고, 건물 내부 역시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관리 중이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도착한 스카이라운지에는 윌리엄 머레이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카자리안 그룹의 서열 내에서도 상위에 속하던 그였지만 오늘만은 표정이 그리 편하지 않아 보이는 상황.
그건 이처럼 많은 수뇌부의 인물들이 그간 한자리에 모인 적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저들과는 달리 변변찮은 배경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도 한몫했을 거다.
“오랜만입니다, 윌리엄.”
윌리엄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뉴런 제약의 에머슨 회장이었다.
수년 전부터 윌리엄의 바이오 분야 사업계획에 동조하여 현재는 공동 운명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존재.
세계 최대의 빅 파마를 이끄는 그와 소프트웨어 업계의 거물인 윌리엄의 사업적 협력은 세간에선 의외로 받아들여졌던 문제였는데.
어찌 보면 그만큼 윌리엄의 계획이 바이오 분야에서는 혁신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부분이었다.
“일단 착석들 하시죠.”
윌리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님들은 일제히 배정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안의 중요성 탓인지 여느 때처럼 잡담 따위는 다들 삼가고 있는 상태.
윌리엄 역시도 시간을 아끼려는 듯 곧장 레이저 포인터를 손에 들곤 프레젠테이션에 나섰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엑슨 소프트는 10년 전 아주 획기적인 상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 몸이 컴퓨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됐죠. 컴퓨터가 운영 체제에 의해 작동되듯, 우리 몸 역시도 특정 프로그램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슬쩍 운을 띄운 윌리엄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이내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문 곳은 역시나 에머슨 회장.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에머슨이 맞장구를 쳐 온다.
“나 역시 그 부분은 아직도 감탄에 마지않습니다. 프로그램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을 통해 삭제하듯, 특정 단백질과 효소를 통해 고장 난 세포를 삭제할 수 있다는 상상력은 의학계로서는 혁명이나 다름없었죠.”
“과찬의 말씀이시군요. 한데 언급하신 것 중 조금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에머슨은 고개를 갸웃했다.
힐끗 그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인 윌리엄이 뒤편에 있던 스크린을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개발한 단백질과 효소들이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 역할을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유전자를 복구하는, 고차원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지 고장 난 세포로 하여금 자살을 유도하는 방식이죠.”
에머슨은 그 말에 아쉬운 표정을 드러냈다.
그 방식대로라면 암 치료가 가능은 하겠지만 재발을 막지는 못할 상황이기에.
생각을 읽은 걸까, 그때, 윌리엄의 얼굴에 비릿한 표정이 지어졌다.
“에머슨 회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뭐 기왕이면 재발 염려가 없는 치료제의 개발이 획기적이기는 하죠. 하지만 암의 재발 확률이 아예 사라진다면 우린 뭘 먹고 삽니까.”
“…….”
에머슨은 그 말에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작 한 수 앞만을 바라본 자신의 짧았던 생각을 탓하기라도 하듯.
하긴, 그들에게 암 환자는 지속적인 돈줄이 될 수 있는 존재들.
굳이 재발이 없는 완치를 이끌어 낼 이유는 없는 것이 맞다.
“사실 바로 그런 의도에서 야콥사를 인수한 것이기도 합니다. 야콥사의 백신을 통해서 암을 유발하고, 우리의 치료제로 환자들을 치료한다면 양쪽에서 수익확보가 가능하기에.”
윌리엄은 사안의 핵심을 되짚어 주었다.
탄성 어린 사람들의 눈빛이 그를 향할 때쯤 또 무엇 때문인지 표정을 굳힌다.
“한데 문제는 그 원대한 계획이 곧 실행되는 것을 앞둔 마당에 재우제약이 개발한 세포 치료제가 재를 뿌리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와 손을 잡고 있던 야콥사의 회장이 그 대책 마련을 위해 그 데이터의 입수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죠.”
사람들은 그 말에 저마다 다른 표정을 하며 헛기침을 뱉었다.
누군가는 실패한 작전에 아쉬움이 담긴.
또 누군가는 앞으로의 걱정에 대한 염려가 담긴.
그때, 달튼이라는 이름의 참여자가 슬그머니 손을 들며 묻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시죠.”
사람들의 시선은 순간 달튼에게 집중됐다.
한때 세포학 분야에서 노벨상까지 받았던 인물이자 카자리안 그룹의 핵심 원로였기에 이미 전후사정을 알고 있는 저들로서도 그의 뒷북을 탓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달튼 박사님께선 최근 정부 부처의 일로 바쁘시다 보니 이 사안에 대해 잘 모르시겠군요. 하면 최대한 핵심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가 만든 신약은 고장 난 세포들로 하여금 자살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정상 세포 또한 자살을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 되죠.”
“…….”
“해서 그건 더 없이 효과가 좋은 치료제가 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우리가 대중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물건입니다.”
움찔!
달튼은 속으로 기함을 토했다.
이제야 윌리엄의 원대한 계획을 이해할 것 같았기에.
그의 말처럼 암세포의 자살을 유도할 수 있다면 정상 세포의 자살 역시도 유도할 수 있는 것이 사실.
그걸 이용한다면 그보다 뛰어난 암살 수단은 또 없지 않던가.
아니, 정확히는 통제수단이라고 해야겠지.
카자리안들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
“문제는 재우가 만든 신약의 경우, 고장 난 유전자를 복구하는 것이 가능한 물건이라는 점입니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윌리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단어들에 눈이 번쩍 뜨인 달튼은 즉시 윌리엄을 올려다봤고, 윌리엄은 그를 향해 살짝 찡그린 얼굴로 다시 말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자살을 명령한 세포들까지도 원상복구가 가능하다는 의미죠. 하니 우리로선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상황이 아니고 뭐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