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7 (365/372)

외전-7

끼익!

“그새 많이 변했군.”

평양의 눈부신 변화는 늘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사실 이곳은 전쟁 전에도 기득권자들의 터전이다 보니 북한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화려한 건축물들에 비할까.

상업과 금융. 그리고 문화의 도시로 변신 중인 이젠 제2의 수도다운 면모를 제법 갖춰 가고 있는 중이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안시현 그룹 총괄실장은 최근 평양 이북의 모든 사업체를 총괄하는 부회장의 직위에 올랐다.

전처럼 ‘부회장 대우’ 총괄실장이라는 어설픈 직함이 아닌, 명확한 부회장의 타이틀.

그에 따라 김영기 실장 역시도 같은 직함에 오른 것은 물론 평양 이남의 책임자로 등극했고, 이제 그룹을 전반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두 부회장이 되었다.

“오랜만이군요, 안 부회장님. 이러다가 얼굴도 까먹겠습니다.”

“오랜만인 줄은 그래도 아시는군요. 아니 명색이 제가 그룹의 부회장인데, 회장님을 꼬박 3개월 만에 뵙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안 부회장은 너스레를 떨며 그동안 그룹의 일에 적조했던 나를 타박했다.

하지만 나라고 놀고만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손.

즉 그림자의 역할이란 것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오랜만이에요, 부회장님.”

“어이쿠, 우리 사모님. 아니, 나타샤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뒤따라 차에서 내린 나타샤를 향해 안 부회장의 너스레가 다시 이어졌다.

이내 그녀의 뒤편을 쳐다보는 폼이 율이의 동행을 기대했던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율이 놈은 지금 친가에서 제 할아버지와 지내는 중이다.

“에이, 율이 놈 얼굴이나 좀 볼까 했더니 안 데려오신 모양이네요.”

“워낙 늘그막에 얻은 손주라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도통 놔주지를 않으시는군요. 그나저나 개량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여전히 아쉬운 얼굴의 안 부회장을 앞서가며 넌지시 물었다.

대답이 들려오기 전 눈에 뜨인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립라인들과 그 속에서 한창 개량이 진행 중인 전차들.

막상 광활한 대지 위에 도열해 있는 결과물들을 보고 있자니 딱히 대답을 들은 필요는 없을 듯했다.

“진행 속도가 꽤 빠르군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다고요?”

“네, 비록 프랑스와 독일 기술이 접목됐다곤 해도 역시나 중국산은 중국산인 모양입니다. 이건 뭐 부품 내구성이 지나치게 기대 이하라고나 할까요. 때문에 전차의 경우는 전쟁 직전 생산된 물량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간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하도록 개수 중입니다.”

“개수 중인 차체의 수량은요?”

“현재까지 약 2,500대에 이른 상태고, 최대 1만 대까지 추가개수 예정입니다.”

“그럼 동북에 주둔 중인 군단들에 제공할 수량이 요구 수량에는 미치지 못하겠군요. 쯧, 그렇다고 민간에 제공되는 숫자도 애매하고.”

“애매하다니요. 이대로라면 민간으로 돌리는 수량이 12,500대나 되는 겁니다. 그 정도 숫자의 중기들이면 한반도 절반 규모의 농업을 충분히 커버할 텐데요.”

안 부회장은 황당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물론 한반도를 기준으로 하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국토가 어디 한반도뿐일까.

“전쟁을 통해 확보한 고토의 규모를 생각하셔야죠. 그걸 감안하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것도 그렇기는 하군요. 하지만 부족분은 정부가 나서서 농기계 생산회사들을 독려해야겠죠.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우리만 쳐다보는 것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안 부회장의 대꾸 속에는 뼈가 있었다.

앞으로 발생할 막대한 농기계들의 수효를 노획한 전차들을 개량하는 것만으로 때우려는 정부의 심보가 괘씸하다는 듯.

물론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정부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한해 소모되는 복구와 인프라 확보 비용이 어디 한두 푼이어야지.

그런 부분에서라도 아끼지 않으면 몇십 배는 넓어진 농지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거다.

“전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정부가 농지 운영을 감당하지 못할 거면 차라리 민간자본을 유도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미국처럼 대규모 농업회사를 설립하여 위탁 운영을 한다든가. 왜 그 부분은 염두에 두지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부도 그건 이미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구획정리 작업이 쉽지 않고, 또 민간업체를 선정하는 작업과 그걸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도 만만치가 않죠. 문제는 그사이 땅들을 죄다 놀릴 수는 없다는 건데, 덕분에 이렇듯 마른걸레를 짜는 현상이 발생한 겁니다.”

안 부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이내 슬쩍 주변을 둘러본 그가 한적한 곳으로 나를 이끌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 어제 임효식 총괄실장을 통해 프랑스에서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끝이 흐려진 뒷말의 의미는 곧장 알 수 있었다.

최근 벌어진 프랑스 제약사 간부들의 잇따른 죽음.

그게 혹시나 우리 쪽 작품인 것인지에 대한 물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했지 않습니까. 나를 건드린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해야만 할 거라고. 내 연구소에서 내 사람이 죽어 나간 마당에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프랑스 정부도 직접 연관된 일이라면서요. 그러다가 혹시라도 꼬투리가 잡히는 날엔 어쩌시려고요.”

“글쎄요, 정작 걱정을 해야 한다면 프랑스 정부보다는 그 뒷배들을 더 걱정해야죠.”

넌지시 뱉어진 대꾸에 안 부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와는 달리 걱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내 반응이 의아했던 듯.

“흠.”

솔직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매번 자신하지 못하는 일에는 나서지도 않던 내가 굳이 걱정을 사면서까지 무언가를 진행한 것은 처음이니까.

“혹시 재우제약 컨소시엄 사태에 글로벌리스트들이 연관된 겁니까? 왜 전에 회장님과 미국에서 한판 붙을 뻔했던, 리암 회장님의 반대 파벌들이었던 또 다른 유태인 그룹 말입니다.”

슬쩍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대답이 되었던 듯 가늘어지는 그의 눈.

그의 어깨에 넌지시 손을 얹으며 다시 말했다.

“왜요, 걱정되십니까?”

“걱정이 안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명색이 국정원장 출신으로서 그들에 대해선 꽤 안다고 자부하는데, 어지간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들입니다.”

“글쎄요. 힘의 균형이 바뀐 지금에 와서 굳이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들을 거스르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해야만 했던 회귀 전이라면 모를까.

물론 쪼그라들었다곤 해도 오랜 시간 세계경제를 주물러 왔던 존재들이니만큼 기세가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게 지금 나와 리암이 이끄는 연합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적아는 확실히 구분해 둬야겠죠. 해서 말인데, 시간이 되신다면 같이 가시면 좋겠군요.”

“어딜 말입니까?”

안 부회장은 뜬금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가뜩이나 일이 쌓여 정신없는 상황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 당황스러웠겠지만 지금은 이게 더 우선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아주 재수가 없어서 내가 그룹을 이끌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시 두 부회장님께서 그룹을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하니 이 사태에 대한 전반적인 사안을 아셔야 대처를 하실 것 아닙니까.”

“…….”

***

“늦으셨소이다.”

도착한 곳은 평양 시내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그리고 우릴 맞은 것은 리암.

불과 2시간 전 평양 공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는데, 곧바로 이곳으로 향했던 모양이다.

[리암 회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놀란 안 부회장이 나를 한번 쳐다보곤 그를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에 한차례 악수가 오고 가고, 곧 나를 힐끗 쳐다본 리암은 여전히 잘 다듬어져 있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진 회장께서 당장 날아오지 않으면 이곳 평양에 투자된 내 지분들을 죄다 공중분해시켜 버린다고 협박을 하더군요.]

[에이, 그게 무슨.]

안 부회장은 설마 하는 표정과 함께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잔뜩 굳어 있는 내 얼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곧바로 마른침을 삼킨다.

[두 분, 갑자기 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야콥사와 회장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잔뜩 쫄아 있던 안 부회장의 말을 잘라 내며 리암에게 물었다.

대번에 표정이 굳어진 그가 도리질을 하며 말한다.

[진 회장께서 그런 오해를 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야콥사의 지분 일부를 내가 보유 중인 만큼 나 역시 재우제약 사태에 연관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내가 투자자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야콥사는 유럽 내에서 실행 중인 내 투자 포트톨리오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거죠.]

[…….]

난 지그시 그를 쳐다봤다.

아직 할 말이 채 끝나지 않은 듯 그의 입술이 열리려는 차, 내가 먼저 말을 뱉어 냈다.

[그렇다고 말하기엔 야콥사의 지분구조가 꽤 흥미롭더군요. 무려 80퍼센트에 달하는 핵심 투자자들이 죄다 글로벌리스트들인데, 그 안에 회장님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저 회사의 미래를 보고 시작했었던 겁니다. 진 회장도 알다시피 야콥사는 신약 파이프라인이 무려 6개가 넘는 회사인데, 그런 곳에 투자를 안 한다는 것이야말로 바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글로벌리스트들의 투자는 나보다 한참 후에 진행된 것을 모르십니까?]

[그건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나도 지분구조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죠. 한데 왜 사건 이후에도 지분을 유지하고 거죠? 막말로 내가 그렇게 당한 마당이면 당연히 야콥사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아실 입장에서.]

그로선 자칫 불쾌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난 지금 앞뒤 가리지 않고 내지르고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사안의 중요성이 워낙 큰 탓인지 리암의 표정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물론 진 회장이 마음먹고 야콥사를 건드리면 그들이 버텨 낼 재간은 없겠죠. 그로 인해 난 꽤 큰 손실을 볼 테고, 하지만 난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어요. 왜 야콥사가 재우제약을 건드렸는지조차도.]

[…….]

[그 표정 이해는 합니다. 내가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진 회장 입장에선 당황스럽기도 하겠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때문에 진 회장께 몇 번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만 그때마다 묵묵부답이셨죠.]

그건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리암이 이끄는 유대그룹과 글로벌리스트들이 적대관계에 있다고는 하나 결국엔 두 집단 모두 유태인들.

간혹 분쟁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하나로 뭉치는 것이 저들의 성향인 마당에 내가 누굴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압니다. 나 역시 결국엔 유태인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존재니까.]

가만히 내 표정을 들여다보던 리암이 다시 말을 잇는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를 향해 시선을 주자 다시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주지하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세파르디와 카자리안은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부류라는 것. 아마 진 회장께서 유태인이었다면. 그 차이점 하나만으로도 나에 대한 의심은 단숨에 거둬들였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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