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336화
씨익.
정효수는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내를 보곤 만면 가득 웃음을 띠었다.
비쩍 마른 몸에 어수룩한 차림새.
이건 겉으로만 봐도 속여 넘기기 딱 좋은 타입의 인물형이 아니던가.
‘하긴, 저런 인물이었으니 그렇듯 쉽게 넘어간 거겠지. 쯧, 그나저나 불쌍해서 어쩌나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 젠장, 내 주제에 지금 누구 인생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한참 목표의 어리숙함을 속으로 동정하던 정효수는 뒤늦게 밀려온 제 현실을 깨닫곤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스물아홉의 나이에 카드빚만 무려 5천.
어디 그것뿐일까, 그놈의 정선 카지노에 빠져 헤매는 동안 발생한 도박 빚만도 1억이 넘어가는 입장 주제에 누굴 어리석다 평한다는 말인가.
“이번까지만이다. 빌어먹을 1억이라고 해 봐야 내 몫은 고작 500도 안 되는 마당에 이 짓을 더할 수는 없지.”
정효수는 굳은 결심 끝에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이내 척하고 준비해 왔던 가짜 신분증을 내민 그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사내를 향해 말했다.
“진현승 씨? 전 일전에 통화하신 이기혁 검사님의 팀에 속해 있는 이태현 수사관입니다. 찾아오신 돈은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순간적으로 표정이 밝아진 사내는 별 의심 없이 가방을 건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정효수로서는 이런 고전적인 방법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맡기신 돈은 검찰에서 안전하게 보관을 하고 있다가 계좌 수사가 모두 끝나고 난 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정효수는 상대를 한껏 안심시키는 말을 뱉어 내곤 돌아섰다.
끼익!
그런데 그때, 웬 차량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진로를 가로막더니 이후 차량에서 내린 중무장한 군 병력들이 그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젠장.”
상황을 눈치챈 정효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통화를 시도했다.
휙!
하지만 그걸 순식간에 낚아채 버리는 누군가의 손.
힐끗 고개를 돌리자 예의 그 어수룩했던 사내가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아 새끼, 거 지나치게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높구만 기래.”
“…….”
순간 정효수는 비로소 사내가 누군지를 깨달았다.
한때 허리우드 영화에까지 등장했었던, 재우PMC 소속의 용병.
당황스러운 것은 왜 처음에는 못 알아봤었느냐는 점인데, 아마도 그건 방금 전 자신이 저 사내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결국엔 당할 상황이면 당하는 거라는.
“뭘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네?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는.”
순간 탁 하고 사내가 정효수의 머리를 손으로 내리쳤다.
평소 같았다면 달려들어 멱살잡이라도 했을 것이건만.
닥친 상황이 상황인 터라 정효수는 찍소리도 못한 채 병력들의 손에 끌려갔다.
“쯧쯧.”
한편, 예의 그 어수룩했던 사내. 아니 차지환은 몸을 돌려 자신의 차량으로 향했다.
군용 JLTV를 개조한, PMC 대원들의 작전 차량.
특이한 점은 그 뒷자리가 다른 것들과는 달리 오픈된 형태였다는 점인데, 그건 에바의 객체를 탑재하기 위한 조치였다.
탁탁!
정효수에게서 빼앗아 온 휴대폰은 곧장 에바의 몸체와 연결되었다.
고작 말단 조직원 하나 잡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 상황.
이 휴대폰의 정보가 이제부터는 저들 조직원들을 몸통을 잡을 수단이 될 거다.
“뭣 좀 잡히는 거이 있네?”
넌지시 이어진 차지환의 질문에 에바의 사물 탐지센서가 돌아왔다.
이내 점멸되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LED는 에바가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증거.
그사이 느긋하게 담배라도 피우려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에바의 말이 날아들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군요. 그것도 하필 아이폰이구요.>
“그거이 뭐가 어쨌다는 거이가?”
<현재 이 객체의 시스템으로는 이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해제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니 빨리 가서 알아 오십시오.>
“이런 니미…….”
<방금 욕하신 겁니까?>
“욕, 욕은 무슨. 그런데 비번만 알아내면 뭐든 할 수는 있는 거이니?”
<그야 물론입니다. 지난번에 회장님께서 제공하신 프로그램 잊으셨습니까?>
그 말에 차지환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대된 걸까. 옅은 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꺾어 보인 그는 어느덧 군의 차량에 올라타고 있던 정효수를 향해 소리쳤다.
“어이! 아 새끼, 거기 잠깐 서 보라. 긴히 나눌 대화가 좀 있으니끼니.”
***
송파구 마천동.
“꼬랑지한테는 아직 연락 아이 왔니?”
이명호는 수금 나갔던 조직원의 복귀가 늦어지자 걱정이 앞섰다.
최근 피싱으로 인한 피해가 부쩍 늘어가는 터라 한국 경찰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
더군다나 최근엔 전문 감시단까지 출범을 해 버린 터라 불안감은 더했다.
“걱정 아이 해도 됩니다. 어차피 꼬랑지가 잡혀 봐야 우리 사무실 위치는 모르지 않슴까.”
“누가 그걸 걱정하는 거네? 꼬랑지가 잡히면 뺏길 돈이 걱정인 거 아니네. 1억이면 심천에 송금하고도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돈이 3천이야. 알간?”
들려온 휘하 조직원의 대꾸에 이명호가 호통쳤다.
찔끔 하고 기가 죽은 조직원은 다시 송금할 돈을 세는 작업에 열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명호는 혀를 차며 중얼댔다.
“니기미, 빨리 독립을 하든지 해야디. 재주는 내가 부리는 마당에 겨우 30프로가 뭐간.”
“그런 소리 마시라요. 그 말이 심천 양반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찌 될지 아시기는 합니까?”
돈을 세던 조직원은 매번 타박을 받으면서도 이명호의 말에 참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대화 패턴이었던 걸까, 이명호 역시 습관처럼 대꾸를 한다.
“어찌 되긴 뭐가 어찌 돼. 장기란 장기는 다 뜯겨 나가는 거이디. 그나저나 진짜 일이 잘못된 거이가? 와 이리 전화를 안 받는 거네?”
“전화 안 받습니까?”
전화마저 불통이라는 말에 부하조직원의 표정은 조금 심각해졌다.
꼬랑지들의 경우 빚에 쪼들리다 이 세계에 들어서거나 후한 사례비에 현혹되어 포섭된 자들이 대부분.
막말로 딴마음을 먹고 튀기라도 하는 경우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던가.
“내가 뭐랬습니까. 기래서 한국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디 않아씀까.”
“그럼, 달리 수가 있니? 그렇게라도 해야 꼬리가 안 잡히는 것 아니가.”
이명호는 이어지는 부하의 투덜거림에 대꾸하곤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직접 현장으로 향해 볼 생각.
그런데 그때,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그의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Wep 발신.]
[KO 한국통운 택배_ 배송지연]
반갑습니다, 고객님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이 물류증가로 인하여 배송이 지연됨을 알립니다.
*실시간 배송정보
http://
mms.doortodoor.co.kr:8337/babo.biungsin//
“이 새끼들 또 시작이가?”
순간 이명호는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재빨리 링크를 클릭했다.
넘어간 화면은 배송지 정보를 입력하는 창.
정신없이 주소를 적곤 확인 버튼을 눌렀지만 이상하게도 화면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거 와 이러네?”
“뭐입니까?”
조직원은 갑작스레 흥분하는 조장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종종 있었던 일이었던 걸까.
힐끗 그의 휴대폰을 쳐다보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또 배송 지연이구만요.”
“니기미. 그래서 좋다는 거가? 하긴, 네 입장에선 좋같디, 택배 수거하러 굳이 성수동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지 않네.”
이명호는 짜증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연된 배송 물품은 지방에서 활동 중인 꼬랑지들이 보내는 피싱 자금.
당장 심천으로의 송금 날짜가 코앞인 마당에 그게 지연되면 자비를 털어서라도 보충을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젠장.”
그렇다 해도 아주 난감한 상황은 아니었다.
뭐 그래 봐야 이번에 배송되었어야 할 돈의 액수는 고작 수백만 원.
그 정도야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으니까.
정작 짜증스러운 것은 이 문자인데, 대체 시스템 관리가 얼마나 엉망이면 아직까지도 배송현황 페이지가 뜨지 않고 있었다.
“에잇, 이놈의 나라는 선진국이 맞기는 한 거가? 고작 홈페이지 관리 하나 이렇게 못한다는 거이 말이 되네?”
“기래서 우리도 이제 수금방식을 바꿀 때가 됐다고 하지 않았슴까. 편한 계좌이체 놔두고 매번 택배가 뭡네까?”
“지랄하고 있구만 기래. 그렇다가 꼬랑지들이 잡혀서 경찰에 계좌까지 털리면 네가 책임질 거가? 아니면 고작 몇백만 원 받자고 네가 부산까지 내려갈 거네?”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상황에서 이어진 부하의 말에 이명호가 버럭 화를 냈다.
띠리리!
순간 울리는 그의 휴대폰.
국제전화임을 의미하는 긴 번호 탓에 곧바로 발신인을 짐작한 이명호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송금 준비 어캐 돼 가고 있어?
예상대로 전화는 심천 총책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
이상하게도 매번 저 목소리를 들을 때면 예전 그를 처음 마주쳤었던 당시의 일이 떠오른다.
방금 사람을 난도질한 칼을 혀로 쓸어 내던, 그 잔혹함이.
“그거이, 내일쯤 보낼 생각이오.”
-뭐 하는데 이렇게 꾸물대네? 경고하는데, 딴마음은 먹지 않는 거이 좋을 기야.
수화기 건너편에선 온갖 욕설과 함께 재촉이 이어졌다.
간신히 달래고 전화를 끊은 이명호는 결국 제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띠리리!
그때, 또다시 전화가 요란한 울음을 토해 냈다.
이번에도 길게 이어진 번호.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통화버튼을 누르자 방금 전에 비해 부쩍 누그러든 총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계획이 바뀌었어. 1시간 후에 그쪽으로 사람 하나를 보낼 테니 송금하지 말고 그편에 건네라.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이명호는 눈을 끔뻑이며 제 부하를 쳐다봤다.
이유를 알 길이 없던 부하로서는 어깨만 으쓱할 뿐.
그저 무의미한 시선이었음을 표하듯 손사래를 치곤 다시 수화기 너머의 총책에게 사실 확인을 하려는데, 저편에서 먼저 말이 이어졌다.
-여기서도 급한 자금들이 필요해서 그러니 서두르라.
통화는 그 말을 끝으로 끊어졌다.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명호는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이 되어 부하에게 말한다.
“큰일 났어야. 1시간 후에 이쪽으로 수금할 사람을 보낸다는데, 어쩌면 좋네?”
“어쩌긴 뭘 어쩝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디.”
“이런 멍청한 놈. 제일 규모가 큰 금액을 수금 중인 꼬랑지가 아직 소식이 없디 않네.”
부하는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다가올 후폭풍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떤 그가 직접 나서려는 차, 이명호의 말이 다시 날아들었다.
“일없다. 내가 갈 테니 넌 여기서 돈이나 맞춰라.”
“기런데 말입니다, 조장. 꼬랑지 이 새끼,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돈 들고 튄 것 같지 않습니까? 기럼 호구와의 접선 장소에 가 봐야 소용이 없디 않습니까.”
돌아서는 이명호를 향해 부하가 넌지시 제 의견을 밝혔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
이명호는 재빨리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며 말했다.
“기럼 꼬랑지 집으로 찾아가는 편이 빠르겠구만.”
“거기라고 있겠습니까.”
“없으면 그놈 누나 가족이라도 족쳐야디. 그러려고 꼬랑지들 호구조사를 철저하게 한 것 아니갔어? 혹시 모르니 넌 미리 안 박사에게 연락해서 장기 빼낼 준비나 해 두라.”
대꾸를 하는 이명호의 입에서는 빠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 건지 뼛속 깊이 새겨 주겠다는 듯.
당황스러운 점이 있다면 문제의 꼬랑지 역시도 후환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인데, 대체 무슨 생각에서 배신을 한 건지가 이해가 안 간다.
가족들마저 빼돌릴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사이 가족도 빼돌린 것은 아니갔디요?”
같은 생각을 한 듯 부하의 말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기어이 고개를 가로저은 이명호는 가능성을 일축했다.
“고작 돈 1억 때문에 가족들 모두가 그렇게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도망을 가갔어? 설사 그렇다 해도 잡아내는 건 일도 아이고. 니기미, 그나저나 수금책이 곧 도착할 시간이구만 기래.”
잠시간의 논쟁 끝에 쳐다본 시계는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총책이 보냈다는 수금책이 도착할 때까지는 이제 20분가량 남은 상황.
어설픈 변명으로는 위기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이명호는 결국 부하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것을 명령했다.
“오면 솔직하게 말하고 일단은 돌려보내라. 모레까지는 어떻게든 맞춰 준다 하고.”
“그거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럼 어쩌네.”
불쑥 화를 낸 이명호는 그길로 문을 향해 다가갔다.
뒤편에서는 연신 부하의 투덜거림이 들려오는 상태.
무시하고 문을 연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기잉!
“뭐, 뭐이가?”
문 앞엔 꼭 거미같이 생긴 물체가 서 있었다.
단지 그게 기계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덩치가 거의 사람만 하다는 것이 다를 뿐.
더 놀라운 것은 그 물체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는데, 분명 조금 전 그와 통화를 나눴던 총책의 목소리였다.
<계획이 바뀌었어. 1시간 후에 그쪽으로 사람 하나를 보낼 테니 송금하지 말고 그편에 건네라.>
“…….”
이명호와 부하는 바짝 얼어붙은 채 상황 파악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은 온통 백지장같이 되어 버린 상태.
그때, 예의 그 기계에게서 이번엔 나긋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많이 놀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