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324화
“기가 찰 노릇이군.”
대통령은 내내 살펴보던 서류들을 내려놓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일본의 기술 데이터 입수 팀이 획득한 731 부대의 만행이 적힌 서류들.
내용이 어찌 나 잔혹하던지 실은 나 역시 몇 번이나 올라오는 구토를 되삼켰을 지경이다.
“그나저나 이 자료들을 왜 아직까지도 보관하고 있었던 겁니까. 지금처럼 유출되는 경우 자신들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글쎄요, 저도 그 점이 궁금하기는 했는데, 뭐 일종의 담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어지는 대통령의 질문에 태연히 대꾸했다.
대통령의 고개가 갸웃해지고, 난 다시 설명을 이었다.
“쉽게 말해서 공범끼리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한 족쇄라는 거죠. 특히나 그게 원본인 이상은 더더욱 확실한 족쇄가 되지 않겠습니까.”
“…….”
여전히 이해를 못 한 표정이었다.
잠시 들이켜던 물 잔을 내려놓은 후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이었다.
“당시 731 부대 관계자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일본 제약계와 의학계에서 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그 자료들을 기반으로 해서.”
“…….”
“문제는 그 후손 중 자신들의 부와 명예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는 것이고, 개중에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자들도 분명 존재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관련 우익들과 선을 긋는 것은 순서일 텐데, 그들이 과연 돈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고만 보겠습니까?”
“흠.”
“때문에 우익들로서는 그런 자들을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철조망이 필요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 자료들이 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료엔 명백히 실험을 주관한 자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대통령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그 시점에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입에 올렸다.
“참고로 함께 발견된 문서들 가운데에는 미국과의 거래에 대한 합의서도 있었습니다. 그걸 기초로 하면 그 자료들의 보관 목적이 또 하나 생긴 셈이죠. 최악의 경우 미국을 방패막이 삼겠다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대통령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따로 준비했던 서류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미국은 과거 그 실험 자료들을 제공받는 대가로 일부 전범들의 처분을 가볍게 하거나 책임을 면해 줬습니다. 당시 관련 전범들은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하여 증거 자료를 남겼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 대통령의 주먹이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하지만 곧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쉰 그는 자조적인 투로 말을 뱉어 냈다.
“빌어먹을. 미국과 일본이 과거 그런 거래를 했었다는 것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막상 그게 사실로 확인되고 나니 기분이 좀 그렇군요. 아무튼, 그럼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종전 협상의 조건이 달라질 것은 확실합니다.”
“…….”
“이건 일본의 완고한 부정으로 인해 과거 전후 배상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부분이었거든요. 한데 상황이 달라졌으니 받아 낼 건 받아 내야죠.”
“하지만 배상을 받아 내려면 자료들을 공식화해야 할 텐데…… 그럼 혹시 미국의 치부도 드러낼 생각입니까?”
“아니요. 현재로서는 미국을 곤란하게 해 봐야 득보다는 실이 큰 상황입니다. 해서 과거 전범들과 미국과의 거래 내용은 당분간 우리가 따로 보관만 해 둘 생각입니다. 뭐 차후 미국과는 대화를 좀 해 봐야겠지만.”
대통령은 마지막 말에 대한 의미를 이해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
난 그의 입이 열리기 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협상 테이블 밖에서 731 문제를 공론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요? 전 세계에 일본의 범죄를 알릴 수 있는 중대한 자료들인 마당에.”
“그렇기는 합니다만, 731의 피해자는 우리만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상 최대 피해자는 중국인데, 이 상황에서 중국까지 끼어들게 되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거든요.”
“흠.”
“게다가 731 문제는 피해당사국들 외에는 사실상 외면하고 싶어 하는 명제인 것이 현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731의 실험결과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득을 봤으니까요. 하니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하면 이건 차후 중국 문제를 해결하고 난 이후. 즉, 중국이 배상 문제로 어물쩍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나은 선택일 겁니다.”
대통령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런데 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순식간에 표정이 일그러지며 휙 하고 나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그것까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 잔혹한 일에 가담했던 자들의 후손들 말입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뭐 개중에는 저 족쇄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우익이 된 자들도 있겠지만 그거야 그들 사정이고, 대가는 지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종전 협상에 돌입할 텐데, 시간이 되겠습니까?”
대통령은 불과 수일 남겨 둔 일본과의 종전 협상을 문제 삼았다.
종전과 동시에 모든 것이 국제법에 따라 처리되기에 아무리 전범자들이라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을.
더군다나 저들은 이 전쟁과는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겉으로는 평범한 제약사 대표들과 의학계의 인물들에 불과할 뿐.
하면 들이댈 명분은 더더욱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어차피 종전 선언이야 우리가 원할 때 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패가 누구 손에 있는지는 대통령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긴…… 그럼, 처리 방법은요?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인데, 대놓고 학살을 자행했다간 그 역시 차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건 제게 맡기시죠.”
***
[NHK 이브닝 뉴스입니다. 예정됐던 종전 선언이 미뤄질 거라는 소식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아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즈에다 신임 총리는 오늘 자위대의 전원 무장해제를 명령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 측이 종전을 미룬 이유가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 대치를 지속하고 있는 자위대로 인한 것이라는 판단하에 새로운 내각이 전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으로…….]
“빌어먹을.”
무라야마 제약의 야츠키 회장은 들려오는 뉴스에 집중하던 거사를 멈추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라의 몸.
하지만 어차피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와 바로 조금 전까지 몸을 섞고 있던 그의 내연녀뿐이었기에 창피함 따위는 없었다.
뚜벅뚜벅!
그는 재빨리 가운을 걸치곤 안방으로 향했다.
우려했던 일본의 항복이 도래한 상황.
극우 집단의 지도부 중 하나였던 그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주변 정리가 필요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치카!”
한창 금고를 뒤적이던 야츠키는 거실에 있던 자신의 비서이자 내연녀를 불러들였다.
무언가 잘못된 듯 잔뜩 분노한 표정.
이내 들어선 내연녀를 향해 그의 고함 소리가 이어졌다.
“여기 두었던 금괴들 어디로 빼돌렸지?”
“네?”
“전에 내가 맡겨 두었던 고서 말이야!”
이치카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야츠키를 빤히 쳐다만 봤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품에서 헐떡였던 사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표정이었기에.
그때, 야츠키의 날 선 말이 다시 날아들었다.
“동경 땅에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을 선물로 받고도 부족했나? 그렇다 해도 그건 손대선 안 되는 물건인 거 몰라?”
이치카는 황당한 표정이 되어 맞은편 벽을 향해 걸어갔다.
금고가 설치되어 있던 벽과는 마주 보고 있던.
이내 벽장처럼 보이는 미닫이문을 열자 그곳에서 또 하나의 금고가 드러났다.
“전에 자리가 협소하다고 이곳에 추가로 금고를 설치하셨던 것 기억 못 하십니까.”
야츠키는 순간 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워낙 많은 수의 골동품들을. 그것도 다양한 장소에 보관을 하고 있다 보니 잠시 장소를 착각했었던 것.
그렇다 해도 왜 저곳을 먼저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흥분했던 것인지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
“흠흠.”
짧은 헛기침을 내뱉은 야츠키는 슬그머니 이치카가 서 있던 벽장 속의 금고를 향해 다가섰다.
이내 날 선 그녀의 시선을 뒤로하고 금고 문을 열자 찾고 있던 금괴들이 떡 하고 자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군.”
휙!
이치카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순간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쑥 하고 그의 손이 밀고 들어온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만하세요.”
그녀는 연신 자신의 기분을 달래려는 야츠키 회장의 손을 확 하고 뿌리쳤다.
하지만 야츠키는 끝내 그녀를 놓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내가 자네를 정말로 못 믿었다면 왜 이곳에 저것들을 보관했겠나.”
“…….”
이치카의 표정은 그 말에 비로소 누그러들었다.
야츠키의 눈매가 느끼한 호선을 그리려는 차, 갑자기 거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그의 휴대폰이 요란한 울음을 뱉어 낸다.
“회장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발신인은 야마토 회장이었다.
오카 공업의 대표이자 그와는 같은 극우재단에 속해 있는 존재.
목소리가 다급한 것으로 봐선 뭔가 또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야츠키 회장 댁으로는 한국군이 들이닥치지 않았습니까?
“한국군이 들이닥치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야츠키는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되물었다.
무슨 험한 일을 겪은 건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조금 전 우리 집에 한국군들이 찾아왔었습니다. 온 집안을 죄다 들쑤시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동안 밀거래로 취득했었던 한국 문화재들을 죄다 찾아내서 가져가 버렸어요.
“문화재를 가져갔다고요?”
-그나마 난 양반입니다. 우유테 회장과 야쓰히로 회장의 경우는 아예 한국군에게 끌려갔다고 하는데, 이후 영 소식이 없어요.
유우테와 야쓰히로는 그와는 동종업계의 대표들이었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731 관계자들을 선조로 두고 있다는 사실.
마음이 조급해진 그는 소식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고, 이후 다시 금고를 향해 내달렸다.
‘설마 명단이 유출된 건가? 해서 종전이 선언되기 전에 제거해 버리겠다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연줄이 있던 자위대 장성의 말에 따르면 하필 731 관련 자료들이 보관 중인 사이타마 연구소가 한국군에 의해 털렸다고 했으니까.
만약 그 과정에서 관련자들의 명단을 입수했다면 한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과거를 정리하려 들 수도 있다.
‘더군다나 우린 이 전쟁과는 관련 없는 평범한 제약사 대표들인 마당이니 합법적으로는 처분할 방법이 없으니까.’
후다닥!
마음이 조급해진 야츠키는 마침 방 안에 있던 여행용 케리어에 금고 속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이치카! 최대한 빨리 금고 속의 물건들을 가방에 담아!”
워낙 촉박한 상황인 터라 평소에는 물건에 손도 못 대게 했었던 자신의 내연녀마저 동원한 상황.
그때 누군가 거칠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
느낌이 싸했다.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인물도 없거니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왠지 일반적인 용무를 가지고 찾아온 자들의 느낌은 아니었기에.
“이치카, 물건은 그냥 버려두고 빨리 뒷문으로…….”
쾅!
막 말을 뱉어 내려던 차에 다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이후 내실로 들이닥친 것은 중무장한 한국군.
여전히 전라에 가까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그들의 입에선 코웃음이 뱉어졌고, 개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의 입에선 나지막하고도 단호한 투의 말이 뱉어졌다.
[꼴사나우니 옷부터 입지?]
***
끼익!
한참을 한국군의 차량을 타고 도착한 곳은 요코하마 인근의 항구였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곳으로 끌고 온 걸까.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스러웠던 야츠키는 점점 더해져 가는 불안감에 절로 몸이 떨려 왔다.
“야츠키 회장!”
막 차에서 내린 순간 누군가 그를 발견하곤 이름을 불렀다.
돌아본 저편에 몰려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
당황스러운 것은 그들 또한 대부분이 731 관련자들의 후손들이었다는 거다.
“내 예상이 사실이었다는 건가?”
야츠키는 잔뜩 겁에 질린 채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와는 달리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눈치의 무리들.
그때, 마침 근처에서 인원을 통솔하던 한국군 지휘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 지금부터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 이곳 접안시설에 여러분들을 위해 보트를 준비했으니 차례로 오르기 바랍니다.]
‘보트?’
순간 야츠키의 시선이 장교의 손을 따라 접안시설로 향했다.
무려 수십 척에 달하는, 손바닥만 한 보트들이 줄지어 묶여 있는 장면.
한동안 이유를 몰라 멍하니 보트를 쳐다만 보던 야츠키는 어느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놀라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밀항자로 만들어 죽일 생각인 건가?”
아무리 봐도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용케 그 말을 들은 건지 곁에 있던 신일본 제약사의 야쓰히로 대표가 재빨리 되묻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야츠키는 여전히 넋 나간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내 와락 인상을 찌푸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지금 저들은 우리를 대양으로 끌고 나가서 죽게 만들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야쓰히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이내 다시 보트를 향해 시선을 준 순간 야츠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막말로 저 작은 배가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태풍은 둘째 치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죄다 죽어 나가겠죠.”
“하, 하지만 표류 도중에 구조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야쓰히로가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며 반박한다.
그러자 힐끗 그를 쳐다본 야츠키가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한국 해군이 그걸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표류라는 것도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지 몰라요.”
“그건 또 무슨…….”
“차라리 침몰을 시켜 버리는 것이 저들로서도 편하다는 말입니다.”
야쓰히로의 얼굴은 또다시 핏기를 일어갔다.
상관하지 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야츠키는 마침 근처에서 통솔하고 있던 한국군 장교를 향해 다가가 애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닥치고 보트에 올라타기나 해. 목을 자르고 사지를 찢어 버리는 만행을 재현해 주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
워낙 단호한 태도로 밀어내는 터라 야츠키는 결국 보트에 몸을 실었다.
동력조차도 없는,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곧장 뒤집어질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는 보트.
이후 그것들은 예상처럼 견인줄에 매달려 차례로 먼바다를 향해 끌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