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299화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군.”
국무장관과의 대화를 끝내고 숙소로 향하는 길.
그동안의 정황을 두고 내려진 내 결론은 리암과 에밋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에밋은 일본. 아니, 아베의 입김을 받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즉, 미 국무장관씩이나 되는 존재가 기껏 찌그러진 일본의 입김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선 당황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보이는 바에 따르면 분명히 그렇게 느껴졌고, 난 이제부터 그 이유를 파고들 생각이다.
치직!
-꼬리가 따라붙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한참 생각이 이어지던 와중 뒤편에 있던 경호 차량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슬쩍 돌아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미 정부기관들이 주로 이용하는 GM사의 검은색 SUV 차량들.
순간 떠오른 것은 어쩌면 에밋의 경호 인력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호텔에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리암의 경호원들과 한참 기 싸움을 했었던 예의 그 존재들.
“차 세우고 알아보세요.”
“네.”
명령을 받은 강 소령은 즉시 차량을 갓길로 세우곤 문제의 차량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스르륵.
순순히 유도에 따르는 SUV에선 곧 거대한 덩치의 양복쟁이들이 빠져나왔고, 이후 강 소령과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는 듯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국무장관으로부터 회장님을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답니다.”
되돌아온 강 소령은 사내들의 목적을 알려왔다.
잠시간의 생각 끝에 차문을 열고 일어서자 순식간에 PMC 대원들이 경호를 위해 주위를 둘러싼다.
“저들 중 대표를 오라고 하세요.”
그 말에 대원중 하나가 빠르게 SUV를 향해 달려갔다.
이후 다가온 국무부 요원은 상황이 마뜩지 않았던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감시가 목적입니까, 경호가 목적입니까.]
[…….]
사내는 불시에 뱉어진 내 질문에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힐끗 쳐다본 그의 동료들은 무전으로 누군가와 연신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상태.
웃으며 다시 그를 향해 말했다.
[경호가 목적이라면 필요치 않으니 돌아가세요. 단언컨대 이만한 규모의 재우 PMC 대원들의 경호를 뚫고 내게 위해를 가할 자들은 없으니까.]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하긴, 그로서는 이도 저도 처신하기 곤란할 말이었으니까.
막말로 이대로 끝내 동행을 고집하면 그건 감시임을 인정하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자니 윗선의 질책이 두렵고.
[프랭크!]
그때, 또 한 명의 사내가 재빨리 달려와선 나와 대화 중인 사내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저편에서 연신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인물.
정황으로 봐선 이 상황에 대한 보고와 그에 대한 윗선의 대답을 듣고 온 모양인데, 예상처럼 이후 나와 대화 중이던 사내의 얼굴이 한껏 밝아지며 철수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까지 원하시지 않는다면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안전한 귀갓길이 되시기 바랍니다.]
돌아선 사내들은 정말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그들 역시도 어지간히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었던 모양새.
하긴, 자칫 우리와 트러블이라도 발생하는 경우 감당해야 할 뒷일을 생각하면 딱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미 정부기관이 나를 감시한다? 누군가의 독단에 의한 결과인지 아니면 정말로 미 정부의 의지인지는 몰라도 이거 꽤 불쾌하군.”
입매를 뒤틀며 다시 차량에 올랐다.
우웅!
순간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발신자를 확인하곤 통화버튼을 누르자 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대화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나도 지금 막 꼬리를 떼어 냈으니 가까운 내 별장에서 만납시다.]
[…….]
***
끼익!
“여긴 여전하군.”
오랜만에 다시 들른 리암의 별장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잘 정돈된 정원과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눈여겨보았던 그로테스크한 조형물들도 여전히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조형물이 그렇게 탐이 나면 선물로 드리죠.]
한참 가고일의 형태를 가진 조형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차에 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심이 나서라기보다는 대체 왜 이런 기괴한 것을 정원에 두는 것인지가 궁금했을 뿐.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그가 저택으로 나를 인도한다.
[에밋이 아베와 친분이 꽤 있는 모양이군요.]
가는 길에 뱉어낸 첫마디에 리암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꽤 할 말이 많은 눈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이유는 아마도 어디에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탓일 거다.
[미국은 확실히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후 뱉어진 짧은 말은 의미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겉으로 보기엔 미국을 다 움켜잡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
왠지 이해가 갈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에밋 자체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남부 촌무지렁이 출신 따위야 맘먹고 몰아낼 생각이라면 못할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정작 짜증 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인물이오.]
[뒤에 있는 인물이라면…….]
[데이빗 카길. 카길 가문의 현 가주이자 미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중 하나요.]
[…….]
의외의 인물이 거론된 탓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기대했던 반응이었던 듯 내 어깨를 툭 건드린 리암은 마침 도착한 거실 소파에 자리를 권하며 말을 잇는다.
[진 회장께서도 카길사가 얼마나 거대한 자본을 가진 농업기업인지는 잘 알고 계시죠?]
나야 물론 카길사에 대해선 모를 수가 없다.
한때 우리 역시 곡물시장 안정을 위해 카길사와 거래를 했었으니까.
당시 전해 들은 보고에 따르면 비공개 기업으로서는 미국 최대의 규모.
한 해 매출이 무려 천억 달러가 넘는, 그야말로 초거대 농산물 업체라는데, 그 큰 규모의 회사 지분 대부분을 단지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더 놀라게 했었다.
[대단한 기업인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카길이 왜 회장님을 적대시한다는 겁니까? 아! 뭐 그건 정황상 그렇게밖에는 판단이 안 서서 하는 말입니다만.]
[아니,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는 에밋을 통해 늘 나를 견제하고 있는 중이고 최근 들어서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죠. 우스운 것은 그 이유라는 것이 나로선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라는 겁니다.]
[…….]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 가문의 형제들 중 몇몇이 나로 인해서 큰 손해를 봤다는데. 빌어먹을, 그거야말로 우스운 일 아닙니까? 난 단지 가이드라인만 제공했을 뿐인데, 제 스스로의 판단 미스에 의한 손실을 내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상황이 머리에서 그려졌다.
투자란 원래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남 탓인 명제기는 하지.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처럼 막대한 자본을 가진 카길 가의 인물들이 대체 어느 정도나 손실을 봤기에 리암을 그토록 적대시하느냐는 점.
마침 생각을 읽은 듯 리암이 손가락 네 개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4백억 달러. 그게 정확히 데이빗의 형제들이 손실을 본 금액이오.]
[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그 정도 거액의 손실이면 솔직히 꼬투리를 잡을 인간만 있다면 뒤집어씌우고 싶을 마음이 들 정도의 규모니까.
그때 리암의 말이 계속됐다.
[한데, 이번 사태는 꼭 나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반발심 때문에만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
[아베 말입니다. 그가 에밋 국무장관은 물론 데이빗과도 손을 잡은 것 같소.]
정황상으로 보면 근거가 충분한 주장이었다.
솔직히 오바마라면 이를 가는 현 정권이 그가 싼 똥을 끝내 감당하겠다는 것부터가 사실상 무리거든.
뭐, 말이야 미 국방력의 해외의존도를 줄이기 위함이라는 거창한 변명을 대기는 했지만, 정작 일본을 향한 ‘조치’를 운운했을 때 국무장관이 보인 격한 반응에서 이미 바닥은 드러났다.
‘그나저나 아베가 이번에는 제법 쓸 만한 카드를 뽑은 모양이군.’
사실 지금의 아베로서는 어떻게든 공화당 내에 자신의 영향력을 심어 두는 것이 필요했을 거다.
그런데 마침 발견한 인물들. 즉 에밋과 카길은 딱 적당한 먹잇감이었고, 마침 일본에겐 원수나 다름없는 리암과도 정적인 상황.
하니 아마 아베로서는 간이라도 내어 주면서까지 그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을 터다.
‘그렇다곤 해도 리암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렇듯 위축되어 있는 것은 이거 영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정부 내에서 저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요.]
리암은 넌지시 뱉어 낸 말에 눈매를 좁혔다.
이해를 못 한 눈치는 아닌 느낌.
예상처럼 조금 후 그가 긴 한숨과 함께 대꾸한다.
[내가 누군가의 감시 때문에 진 회장께 연락도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하긴, 나도 지금 내 처지가 우습기는 합니다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가 않았소이다.]
[…….]
[미 정부기관은 의외로 방대하고, 그들 전부가 내 관리하에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더 짜증 나는 것은 데이빗과 에밋이 장악해 가고 있는 기관들이 최근 들어서 꽤 많아졌다는 겁니다. 덕분에 난 이렇듯 말년에 개망신을 당하는 중이고.]
사실이라면 리암으로서는 자존심 상할 일이기는 했다.
명색이 미국의 그림자인 그가 자국 정부기관의 감시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권위 실추니까.
그때, 뇌리에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대통령이 그걸 허락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군요.]
[톰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에밋이라는 인물 자체가 애초 그의 정치적인 아버지나 다름없고, 정작 톰 역시도 전형적인 남부 출신이니까. 나야 미국 토박이들의 눈으로 보면 명백히 이방인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뿌리가 당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거죠.]
말끝에선 외로움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였던가, 유독 나와의 관계에 힘을 쏟았던 이유가.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그나저나, 일본 정치인들도 참 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제 한국은 자신들이 견제할 만한 대상이 아님을 대체 언제 깨달으려는지 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경계한 듯 리암이 화두를 돌렸다.
하지만 막상 그 주제 역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것.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서자 리암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어딜 가시게요.]
[사태파악이 끝났으니 해결을 봐야죠.]
[…….]
[이대로 회장님의 영향력이 무너지는 꼴을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 또한 차후 미국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질 테니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데이빗을 찾아가겠다는 말입니까?]
[가능하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가서 확실히 못을 박아야죠.]
[못을 박다니 뭘 말이오.]
[그야 당연히 선택에 대한 강요죠. 일본이냐 아니면 우리냐.]
[그가 남의 강요를 들을 인물일 것 같습니까?]
[그거야 부딪쳐 봐야 알 일이죠. 아! 참고로 전 이 기회에 대중국 전략에 있어 일본의 역할을 재고할 생각입니다. 하니 그 점은 미리 알아 두시죠.]
[…….]
[일본이라는 나라는 절대로 믿고 뒤를 맡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가 잠시 망각하고 있었거든요.]
***
휘이이잉!
미네소타주에 도착한 시간은 그로부터 꼬박 6시간 만이었다.
전용기를 통한 비행에 이어 목적지인 데이빗 카길의 저택까지 다시 차로 이동하는 거리가 꽤나 길었던 탓.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목적지까지 워낙 도로가 한적한 덕분에 힘은 덜 들었다는 건데, 대체 그만한 거부가 왜 이런 한적한 곳에 살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리암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데이빗과의 만남은 다행히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그가 리암과의 만남에 흔쾌히 응한 덕분.
정문을 통과한 지 꼬박 10분에 걸쳐 도착한 저택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노인 한 명이 주변에 꽤 많은 수의 경호원을 대동한 채 서 있었고, 리암은 그를 보자마자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촌구석에 짱박혀 살면서도 비명횡사하기는 싫었던 모양이군. 저자가 바로 데이빗 카길이오.]
말투와는 달리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으로 봐선 두 사람 사이엔 내가 모르는 과거가 또 있는 느낌이었다.
왠지 궁금함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사이 다가온 데이빗은 리암은 제껴 두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상태.
눈이 마주친 순간,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날아왔다.
[이거, 귀한 분을 내 집에 모시게 되어 영광이오.]
태도로 봐선 단순히 입에 발린 멘트는 아닌 듯했다.
나에 대해서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는 느낌.
뭐 기상정보를 얻기 위해 자력으로 위성까지 쏘아 대는 집안인 만큼 딱히 무리도 아니다 싶은 생각은 든다.
[그래, 나를 만나자고 한 목적이 뭡니까?]
잠시 후 그의 저택에서 이루어진 본격적인 대화의 장에서 그는 직설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치 바쁜 와중 낸 시간이니 허튼소리 따위로 낭비하지 말자는 듯.
뭐, 나 역시 그 점은 환영이다.
[일본에게 무얼 약속받으셨습니까? 미국 내에서 그들을 대변해 주기로 한 대가로.]
[…….]
대뜸 뱉어 낸 말에 곁에 있던 리암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시간 낭비를 하지 말자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이건 지나치게 서두른다고 느낀 거겠지.
아니, 도발적이라고.
하지만 저런 타입의 인물들과의 대화에선 이게 최선이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왕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존재들.
[한 해 이백만 톤의 사료용 옥수수를 납품하기로 했소이다.]
데이빗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역시나 보통은 아닌 인물.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시 말했다.
[이백만 톤이면 대략 한 해 백억 달러쯤? 아베가 꽤 무리를 했군요. 뭐, 그 정도면 회장님께서는 괜찮은 장사를 하신 셈이고. 하지만 이번만으로 만족하시죠.]
[…….]
[쉽게 말해서, 이제 더 이상 일본의 대변인 노릇은 안 하셨으면 싶다는 거죠. 사실 제가 이번 F-22의 일본 판매에 눈감는 것은 그게 일본에게는 독이 든 성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땐 제 자존심 때문에라도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죠.]
그는 갑작스러운 내 거만한 태도에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아직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
난 기어이 그가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끊을 잘라 내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저와 원수가 되고 싶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