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282화
[아니 그건 또 무슨 억지스러운 정책입니까? 한국의 전력 확보에 왜 미국이 희생을 해야 한다는 거요.]
[희생이 아니라 협력이죠.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을 향한.]
발끈하는 리암의 대꾸에 즉시 반발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객관적으로 보자면 억지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
리암은 연신 혀를 찼고, 난 그 시점에 그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말을 뱉어 냈다.
[사실 미국 역사에서 이런 사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죠. 렌드 리스(Lend-Lease). 즉 2차 대전 중 미국이 독일에 대항하는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무기지원법 말입니다. 뭐 사안은 조금 다르지만 근거만큼은 합당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렌드 리스를 한국에 적용하라?]
[그렇습니다. 어차피 미군은 현재 차세대 헬기들의 개발완료로 그걸 현장에 적용할 시기를 재고 있는 상황인데, 그로 인해 잉여가 되어 버릴 물자들의 운명이야 빤하지 않습니까. 그럴 바에야 동맹인 한국에 염가로 제공하는 것이 낫지 싶습니다만.]
[흠.]
[게다가 노후 헬기들을 조기 퇴역하는 것은 회장님에게도 이익입니다.]
[……?]
[차세대 헬기사업의 주체인 보잉과 시콜스키. 그 두 회사에 막대한 지분을 보유하신 회장님의 주머니는 이로써 더더욱 두둑이 채워질 테니까요.]
순간 리암의 눈매가 꿈틀했다.
그가 보잉과 시콜스키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놀란 거지.
하지만 나도 이젠 정보력 하나만큼은 그에 못지않다.
라이언을 통해 미국 사회에 투자를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째인데, 그 정도 돈의 흐름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닐까.
특히나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유대계의 자금이 대상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닐 텐데요? 진 회장역시도 보잉의 대주주지 않소이까. 그것도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지분을 가진.]
대꾸를 뱉어 내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긍정의 의미.
난 비로소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짐을 떨쳐 내곤 한껏 웃어 보였다.
[저도 그러자고 보잉에 투자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뭐 상황이 이러면 우리 둘 다 이익을 보는 건데, 이만 동의하시죠.]
[…….]
리암은 침묵한 채 나를 쳐다봤다.
눈은 비록 내게 꽂혀 있지만 정신은 딴 곳에 가 있는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 무렵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우리 한 가지만 약속합시다. 진 회장과 나. 적어도 우리 둘이 서로 적으로 돌아서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그게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한 마음에 되물었다.
순간 그의 눈에는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날카로운 빛이 스쳤고, 곧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난 중국은 두렵지 않소. 하지만 진 회장과 내가 갈라서는 것만큼은 두렵소이다. 하니, 우리 같은 인물들이 서로 돌아서서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만들지 말자는 게요.]
[우리 같은 인물이요?]
그 말에 온 신경이 꽂혔다.
오해인지는 몰라도 난 왠지 저 단어의 의미가 통속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졌거든.
하지만 단순한 내 기분 탓이었던 듯, 리암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진 회장과 나 같이 한 나라를. 아니,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들 말이오.]
***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2박3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도착한 공항에선 경제인단을 향한 대통령의 인사가 이어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
우스운 것은 경제인단 대부분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건데, 아마도 그건 앞으로 계속될 개혁의 파도를 걱정하기 때문일 거다.
“이 회장님은 제 차로 가시죠.”
막 자신의 차로 향하던 삼정의 이영훈 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안 그래도 나와의 대화가 필요했던 듯 그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곤 차에 올랐고, 우린 가는 내내 미국의 향후 반도체 전략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미 국무부 장관이 미국 내에 삼정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주장하더군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영훈 회장이었다.
나와는 달리 국무장관과의 회담을 이어 갔던 그는 꽤 심한 압박을 받기라도 한 듯 표정이 잔뜩 썩어 있었다.
“그건 아마 차후 한반도가 중국의 공격을 받았을 상황을 가정한 것에서 내린 결정일 겁니다. 정말로 전쟁이 발발하기라도 하는 경우 전 세계가 반도체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 것은 당연할 테고 그건 미국으로서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요.”
“네, 국무장관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이 회장은 태연히 뱉어 낸 내 대꾸에 수긍했다.
여전히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
난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염려하실 문제는 아닌 듯한데요?”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니요. 투입되는 자금은 둘째 치고 최첨단 공정은 반드시 한국에서 진행한다는 우리 정책과도 어긋난다는 것은 진 회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최첨단 공정을 해외에서 주도하는 것이 꺼려질 문제기는 하죠. 말씀처럼 삼정의 정책은 물론 내 의지에 반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 회장님이 간과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반도체 공장 하나 건설하는 것이 하루 이틀 사이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
“…….”
이 회장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고속도로에 진입할 무렵, 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 유리창을 살짝 내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대체로 반도체 공장 하나를 완공한 뒤 가동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은 최소 2년 이상입니다. 그리고 반도체 공장은 애초 건설 당시부터 어느 수준의 공정을 적용할지 미리 정하고 시설을 갖추죠.”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이제 반도체 공정은 1년 사이에도 엄청난 발전을 하는 시기입니다. 하니 미국이 원하는, 현존 최신 공정을 그곳에 건설해 준다 해도 정작 가동이 들어가는 시점에선 그 공정은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이상은 뒤처진 공정의 물건을 생산하게 되는 거죠. 그럼 결과적으로 최신 공정은 절대 외부에서 생산하지 않는다는 삼정의 기준에 부합한 거 아니겠습니까?”
“…….”
이 회장은 뒤늦게 내 말의 의미를 깨닫곤 안색을 밝혔다.
여태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꽤 애를 태웠던 걸까, 중얼대는 말속에서도 후련하다는 투가 역력히 느껴졌다.
“그걸 미처 생각 못 했군요. 하긴, 공장을 건설하려면 미리 해당 공정에 맞는 설비를 갖춰야 하죠. 우리로서야 최신 공정을 갖춰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셈이고. 하하, 이거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아마 생각을 못 한 것은 아니었을 거다.
워낙 미국의 요구가 당황스럽다 보니 미처 그 부분에 대해선 고려하지 못한 것일 뿐.
그나저나 듣나 하니 미국도 중국과의 무력충돌 가능성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건데.
뭐, 자국의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예방하자는 이기적인 측면도 있기야 했겠지만, 그것도 결국엔 전쟁을 가정한 것에서 온 결론이니까.
아무튼, 상황이 이러면 우리도 최소한의 대책 정도는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어떤 상황하에서도 반도체 공장만큼은 지켜 낼 수단을 갖추는 것.
‘흠, 이거 대공 방어 시스템을 좀 더 확고하게 갖춰야 할 필요성이 있겠는데?’
중국도 사실상 우리의 주력 산업을 가장 먼저 노릴 것을 감안한다면.
뭐 중장거리 대공방어망이야 지금도 은하계에서 우리의 방어망을 뚫을 만한 국가는 없다는 것이 정론이기는 하지만, ‘절대’라는 말은 그야말로 오만의 극치이며 만약의 경우란 것도 가정해 두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어자의 자세가 아니던가.
‘게다가 중국은 최근 드론기술이 부쩍 발전하고 있고 우리와의 거리도 꽤 가까운데, 그걸 무시할 수는 없지.’
사실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 보다 촘촘한 근거리 대공방어망을 구축해야만 한다는 것.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예산이고, 그걸 극복할 방법이 당장은 뚜렷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탐색레이더와 조준 레이더를 충분한 수량까지 확보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말이지.’
특히나 우리의 기간산업들과 전략산업들을 모두 보호할 정도로 충분한 수량을 확보하려면.
젠장, 그렇다고 당장 막대한 물자들을 넘겨주는 미국을 상대로 또 읍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흠.”
생각이 깊어지자 절로 침음성이 뱉어졌다.
이유를 오해한 걸까, 이영훈 회장은 내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을 잇는다.
“진 회장님께서도 신경 쓰이시죠? 하긴, 명색이 삼정의 대주주이신 마당에 미국 주도의 반도체 업계 재편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겠죠.”
난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그제야 내가 그와는 다른 이유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런, 저는 또 진 회장님께서 반도체 재편으로 인한 고민을 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미국이 TSMC를 잡아먹은 이후 발생할 업계 동향 말입니다.”
“그게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글쎄요. 딱히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 회장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우린. 아니, 재우는 지금 향후 10년 이상을 선도할 공정기술력을 확보 중입니다. 물론 파운드리의 경우 업체 간 신뢰와 협력이 중요한 부분이기에 단순히 공정 수준만으로 파이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절대적인 수준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이영훈 회장은 10년을 선도한다는 말에 유독 놀란 표정이었다.
이후 진위 여부를 물으려는 듯 그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찰나, 마침 틀어 놨던 라디오 뉴스가 귀에 확 꽂혀 왔다.
[필리핀 정부는 오늘 그간 우리 교민은 물론 여행객들이 연루되었던 모든 사건들에 대한 재조사를 자국의 경찰 및 조사기관에 명령했습니다. 또한 안일했던 그동안의 대처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으며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현지에 주둔해 있는 우리 경찰 병력들에게 조사권한을 부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맙소사! 조사권한을 아예 우리 경찰에게 부여한다고요?”
뉴스를 들은 이 회장은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굽히고 들어오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이래서 나라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데,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또 다른 뉴스들이 더 전해져 온다.
[말레이시아 정부 대표단이 내일 청와대를 예방할 예정이라는 소식입니다. 이는 최근 부쩍 활발해진 우리와 필리핀 정부 간의 관계에 고무된 결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오늘 우리나라를 향한 말레이시아 정부의 특사파견을 비난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앙숙 관계인 두 나라 사이에서 우리 정부의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흠.”
이거 판이 꽤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은데.
***
쿠르르릉!
한국으로부터 출발한 2차 선발대가 필리핀에 도착했다.
이번에 도착한 수송선에는 애초 한국에서 공여를 약속했던 AH-1도 포함된 상태.
재우의 손을 거쳐 개수된 그것들은 겉으로 보기엔 거의 새것과도 같아 보였고, 덕분에 환영차 마중을 온 두테르테 부시장의 눈은 화등잔만 해졌다.
“저게 뭐지?”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분명 그가 듣기로 지원이 예정된 것은 경찰 병력들.
하지만 막상 수송선에서 내리는 존재들은 단순 경찰이라 생각되지 않을 법한 중무장을 한 존재들이었다.
“저게 외골격인 모양입니다. 대통령이 최근 그동안 한국인들을 상대로 벌어졌던 사건사고에 대해 전격적인 사과와 재발 방지책을 내놓더니 그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모양이군요.”
곁에서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비서가 재빨리 아는 체를 했다.
비록 귀는 비서를 향해 열려 있지만 시선은 여전히 병력들의 무장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
두테르테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대통령의 사과를 받은 것과 저게 무슨 상관이라고.”
“제가 알기로 저 외골격은 한국도 어지간한 전투에는 투입하지 않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걸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필리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왠지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두테르테는 다시 쏟아지는 병력들을 향해 시선을 줬다.
우연이었을까.
그때, 가장 후미에서 뒤따르던 경찰 병력 중 하나가 갑자기 무거운 탄약 상자를 훌쩍 짊어지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흠…….]
두테르테는 상황과는 걸맞지 않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에 비서가 그의 눈치를 살피던 차.
두테르테가 뜬금없는 말을 툭 뱉어 냈다.
[저거 꽤 탐이 나는군. 쯧, 이번 소탕 작전에서도 마약조직들이 숨겨 놓은 금괴가 좀 후하게 발견되면 좋으련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