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257화
[스위스에 나를 비롯한 러시아 부호들의 자금을 핑계로 압력을 넣어 달라?]
만찬 후 이어진 자리는 푸틴과 나만의 독대가 이어졌다.
뭐 문제가 문제인 만큼.
처음 내 제안을 들은 푸틴은 난색을 표했지만 난 몇 번이고 그를 설득했다.
[물론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러시아가 압력을 가했다간 자칫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스위스는 예전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 드러났기에 이미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가치는 스스로가 훼손한 상태입니다. 하니, 그걸 우리라고 지켜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애써 스위스의 치졸함을 강조했다.
중립국임을 외치며 온갖 이익을 누려온 저들.
하지만 정작 내면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추악한 면이 많았던가.
특히나 계좌 비밀주의라는 명분으로 나치를 피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자금을 유치하곤 고스란히 꿀꺽 해 버린 것도 모자라서 이후 나치의 자금들까지. 그러곤 또 차후엔 나치에 은밀히 협력을 했었던 부분들까지.
사실상 이제 스위스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식의 가면은 벗겨져야 마땅하다.
[흠…….]
푸틴은 연신 고민을 거듭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휙 하고 나를 쳐다본 그의 눈은 한껏 가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진 회장은 꼭 내가 대단한 불법자금이라도 스위스에 꿍쳐 놓은 걸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구려.]
저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막말로 난 지금 러시아의 정상적인 돈을 움직여 달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쉽게 말해서 푸틴과 러시아 마피아들.
그리고 러시아의 기업들이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성한 자금을 대놓고 거론한 것이나 마찬가지랄까.
이럴 땐 굳이 의뭉을 떨어봐야 도움은 되지 않는다.
[떡 만지는 손에 콩고물이 묻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
푸틴의 얼굴은 순간 꿈틀했다.
하지만 딱히 따지고 들 생각은 없었던 듯 한참을 허공만 쳐다봤고,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뭐 다른 이도 아니고 진 회장을 상대로 그걸 부정해봐야 나만 우습겠지. 한데 과연 러시아의 자금만으로 스위스를 겁주는 것이 가능하겠소?]
[러시아만은 아닙니다.]
난 즉시 대꾸했다.
그의 고개가 갸웃해지고, 난 들고 있던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위스와 한국은 몇 년 전, 조세협정을 개정했습니다. 해서 국세청이 원하면 언제든 한국인 명의의 계좌를 들여다볼 수 있죠.]
[…….]
[해서 우리 정부는 이번에 그 계좌 전부를 오픈해 줄 것을 요구할 겁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세무조사를 통해서 불법이 의심되는 자금들을 전부 환수조치 할 수 있음을 통보할 거고요.]
[…….]
[그 경우 최소 수백억 달러. 아니 천억 달러가 넘어갈 것으로 예상하는데, 거기에 러시아 자금까지 움직여 버리면 과연 저들이 손익 계산을 안 따져보겠습니까?]
[…….]
[아시다시피 스위스의 연방 재원은 금융세로 충당이 됩니다. 그 경우 스위스 정부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될 텐데, 그걸 과연 수조 원에 불과한 돈 때문에 감당하겠느냐는 말이죠.]
[흠, 과연…….]
푸틴은 끝내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나 싶은 생각해 쳐다본 순간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그걸 불법자금으로 규정하는 순간 스위스 은행법에 따라 절반은 빼앗길 각오를 해야 하오.]
뭔가 했더니 그걸 우려했었나 보다.
하긴, 그런 전례가 있기는 했었지.
한때 미국이 스위스에 예치된 마약 관련 자금을 적발하여 인출을 요구했을 때.
저들은 그 대단한 미국을 상대로도 무려 절반이나 되는 돈을 집어 삼킨 적이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충수였다.
이후 돌아온 대가가 만만치 않았거든.
[…….]
[그랬다간 그나마 남아 있는 다른 자금들도 죄다 인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스위스의 조치를 보고 어느 누가 비싼 보관료를 지불하며 그곳에 돈을 맡겨두겠습니까.]
[흠…….]
[게다가 미국과의 사태 이후 스위스는 각 선진국들의 압력에 못 이겨 조세협약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불법자금들 중 상당수가 이미 조세 회피 처로 옮겨 가는 비극을 맞았죠. 그 마당에 과연 스위스가 또 제 발등을 찍는 일을 하겠습니까?]
[…….]
[물론 상황은 닥쳐봐야 알겠죠. 그런데 정말로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그땐 제2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시킬 생각입니다.]
[제2의 아킬레스건?]
푸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의미를 깨달은 듯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설마, 정밀산업을 건드릴 생각입니까?]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제약을 건드리는 거죠.]
[…….]
[로슈를 비롯하여 노바티스 같은.]
막상 그 말을 뱉고 보니 난 솔직히 스위스가 오히려 버텨주었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쓸 만한 제약회사의 합병은 우리에겐 꼭 필요한 부분.
기왕 돈을 들여야 할 상황이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에나 해당될 터.
아마 지금껏 나열한 대책만으로도 스위스가 끝내 버티기는 힘들 거다.
[…….]
푸틴은 이후 한참을 침묵한 채 나를 쳐다봤다.
또 무슨 고민을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리암 회장도 이젠 긴장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군.]
[…….]
[전에는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그림자라고는 리암 하나뿐이었는데, 이젠 진 회장이라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등장했으니까.]
[…….]
[물론 진 회장이야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엔 그렇소. 그리고 내가 인정한 마당이면 서방의 다른 지도자들도 곧 그걸 인정하게 될 거외다.]
[…….]
[그래서 말인데, 그 제안 받아들이는 것으로 합시다. 뭐 진 회장에게 앞으로 계속해서 볼멘소리를 듣는 것보다야 스위스를 상대하는 것이 나로서도 편할 테니까.]
***
휘이잉!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 내내 나타샤와 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실수였던 걸까, 전에는 굳이 의식하지 않았던 그녀의 존재가 이젠 부쩍 신경이 쓰인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내 힐끗거리는 나를 향해 결국 나타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책을 덮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 순간, 그녀가 먼저 불쑥 자신의 생각을 뱉어냈다.
[그 말씀으로 충분했습니다.]
[…….]
이후 그녀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돌아섰다.
절로 헛웃음이 지어지려는 차, 다시 돌아선 그녀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다시 말한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
-영국이 결국 지급을 결정했습니다. 스위스 역시 조만간 지급 결정을 내릴 생각이라는군요.
그로부터 보름 후, 두 나라에 묶여 있던 김정일 일가의 자금문제는 결국 우리 뜻대로 해결됐다.
잃어버릴뻔했던 자금을 찾은 수확도 수확이지만, 정작 우리가 얻은 더 큰 이익은 이 나라의 힘을 온 세계에 증명했다는 것.
혹여 그 때문일까.
곧 열리는 G7 회의에 우리가 초청된다는 소문도 슬슬 돌기 시작했고, 최근엔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G8 확대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정은 일가의 비자금 규모가 총 38조 원에 달한다고 하더군요.”
이후 다시 평양에서 만난 재건위원장은 예상보다 큰 액수의 비자금 규모를 두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정부의 의중에 따르면 그 돈은 환수와 동시에 북한 재건에 투입 될 예정.
가뜩이나 돈 쓸 곳이 많은 그의 입장에선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거다.
“이건 제 생각인데, 이번 남북 전쟁에서 살아남은 북한의 천군호와 폭풍호를 장갑차량과 대공화기 플렛폼으로 개조해 버리는 것이 어떨까 싶더군요.”
한창 찻물을 음미하던 와중 위원장이 제법 흥미가 돋는 제안을 하나 해왔다.
빛나는 내 눈빛에서 희망을 읽은 걸까, 다시 이어지는 말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조사결과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은 두 기종은 총 1200대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미래 전장을 감당하기엔 성능 면에서 부족하다는 거죠. 하니 차라리 그걸 부족한 장갑차량으로 개조하거나 우리에 의해 파괴된 국지방공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것에 활용을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만.”
“국지방공 시스템은 그렇다 치고, 혹시 전차를 개조한 장갑차량이라면 아르자리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스라엘이 한때 노획한 적의 전차들을 개조하여 만들어낸.”
“맞습니다, 그거. 이스라엘의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졌지만 꽤 효과가 좋았죠. 그런 면에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빡빡한 예산에 무작정 장갑차량의 수량을 늘기 보다는 차라리 두 전차들을 중장갑 차량으로 개조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더군요.”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이미 전례가 있기에 실현 가능성 또한 크고.
어차피 미래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차들이라면 차라리 개조를 통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던가.
“흠…….”
게다가 앞으로 우리의 주적이 될 중국이 막대한 육상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지해야만 한다.
북측 병력 전체를 전신수트와 신형 방탄복으로 무장을 시킬 여유가 없는 지금.
전차에 버금가는. 아니 전차가 가진 방호력을 그대로 활용한다면 그만큼 보병들의 안전성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거다.
“돌아가는 대로 위원회에 보고를 해보죠.”
나로선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그 사업의 주체는 재우가 될 테고, 그럼 최소한 나 역시 노동에 대한 대가는 받게 되는 셈이니까.
그런데 이거 상황이 좀 애매한 것 아닌가.
솔직히 그동안엔 이런 제안은 내가 해야 옳은 거고, 그걸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군의 역할인데 이건 그 반대의 상황이거든.
비록 내가 최근 국방력 증강협의체의 위원 자리까지 맡기는 했다지만, 이건 주객전도가 지나친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해군의 편제에 대해 제안을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어색한 마음에 이번엔 내가 먼저 나섰다.
그 부분 역시도 꽤 난제였던 듯 위원장은 기꺼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난 마침 이곳에 오기 전에 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전달했다.
“오기 전 대통령님을 비롯하여 군의 수뇌부들과 협의를 해본 결과 향후 우리 해군에는 신형 호위함의 건조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일이군요. 안 그래도 북한 측 해군력의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던 차였는데 말입니다.”
“아! 그러실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건조될 호위함은 북측 해군 병력들에게까지 제공할 수량은 아닙니다.”
위원장은 실망의 빛을 보였다.
행여 오해라도 있을까 싶은 생각에 난 즉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북측 수역을 언제까지고 저들의 구형 함정들 따위로 감당할 수는 없죠. 해서 말인데, 이번에 제가 미국으로 가는 김에 미 해군이 퇴역시킨 채 보관 중인 올리버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을 좀 뜯어 올 생각입니다.”
“올리버해저드 페리급을…… 미국이 그걸 과연 내 주겠습니까? 퇴역함이라고는 해도 성능이 좋아서 한때는 재배치까지 논의 되었던 물건인 마당에.”
“가능하도록 해봐야죠. 아무튼 그 경우 최대 26척의 호위함이 새로이 생기는 건데, 그 정도면 사실상 북측 해군 병력들의 전력을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원장은 그 말에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 정도 수량과 성능을 가진 호위함들이 포함되면 중국의 해상 굴기에 대항할 또 하나의 수단이 확보되는 거니까.
물론 이미 질적인 측면에서야 우리가 한참을 앞선다지만, 숫자에서 주는 압박감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
게다가 그 상대가 하필 숫자에 민감한 중국이라면 이 조치는 더더욱 반길 만한 것이었을 터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죠. 가능하면 꼭 좀 부탁합…….”
부르르!
위원장의 당부가 이어지던 찰나 갑자기 내 전화기에 불이 났다.
연속된 문자들.
그건 희원을 비롯한 대학 동기들로부터 날아온 것이었는데, 하나같이 앞에 ‘부고’라는 단어가 적혀 있어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만요.”
난 양해를 구하고 문자를 확인했다.
부르르!
그때 김 비서로부터 날아온 또 하나의 문자.
역시나 부고 소식임을 알리는 것이었던 터라 긴장감은 더했고, 내용을 확인하고 난 이후 난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명승은 교수님께서 오늘 새벽 심장마비로 소천하셨습니다.
***
땡땡!
이튿날, 도착한 서울 인근 장례식장에서는 수많은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대학 동기들로부터 시작해서 제자들. 그리고 연구소의 직원들까지.
나 역시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당연했고, 그와는 사촌지간인 김 비서 역시도 나와 함께 조문에 참여했다.
“술을 딱 끊어 버리시기에 그나마 좀 오래 사실 줄 알았더니 심장마비로 가실 줄이야 누가 알았나.”
“그러게. 나도 그게 영 의외네.”
희원과 성호는 벌써 몇 시간째 명 교수님의 사인을 두고 설왕설래했다.
충격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던 듯 김 비서 역시도 한동안은 그저 멍한 표정인 상태.
난 위로 차원에서 슬쩍 그녀를 불러내어 커피를 한잔 건넸고, 이후 우린 한동안 명 교수님과의 추억을 화두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사촌지간이라곤 해도 우린 꼭 친 남매 같았거든요.”
내내 웃음으로 추억을 회상하던 김 비서의 눈에는 어느 순간 눈물이 맺혔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건넨 손수건을 굳이 거부한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내게 묻는다.
“그거 아세요? 오빠는 전부터 제가 회장님을 좋아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
“…….”
“여태 결혼도 안 하고 있는 저를 보고 매번 회장님 욕도 하고 그랬어요.”
“…….”
“한데 미안하게도 전 그냥 비혼주의자일 뿐이에요. 전에도 말했듯 짧고 굵게 살자는 주의죠. 해서 제 앞으로의 꿈은 여전히 한 재산 넉넉히 벌어두고 은퇴 후엔 저 혼자 여유롭게 사는 거예요.”
그녀는 말끝에 슬쩍 저편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나타샤가 서 있던 곳.
이내 다시 나를 쳐다본 그녀가 샐쭉 미소를 내비치곤 다시 말한다.
“하니, 회장님도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무슨 착각 말입니까.”
“제가 회장님 때문에 여태 결혼도 안 하고 있었을 거라는 착각 말이에요.”
“…….”
“솔직히 말하자면 회장님께서 머리를 다치시고 난 이후 몇 년간은 정말 그런 의도도 있었어요. 하지만 끝내 저를 사무적으로 대하시는 태도를 보고 깨달았죠. 아! 이분은 내게 마음을 열 생각이 아예 없구나. 아니, 이 남자는 애초부터 내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구나…….”
“…….”
“결론은, 전 비서인 지금의 위치가 가장 행복하다는 겁니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착각이었을까.
난 최초로 그녀에게서 진정한 비서실장의 모습을 엿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