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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56화 (56/372)

#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56화

[방문을 환영합니다. 전 러시아 대외정보국 소속 체콜로바 나타샤입니다.]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우릴 맞아준 것은 웬 금발의 미녀였다.

외모로만 보면 정보국 요원이라기보다는 여느 방송사의 리포터 같은 느낌.

키는 또 어찌나 큰지 183센티미터인 나와 비교를 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다.

[반갑습니다.]

그녀는 짧은 인사 끝에 우리를 준비해온 차량으로 안내했다.

목적지는 러시아 정부가 준비해 둔 모스크바 인근의 호텔.

마침 사할린을 방문 중인 푸틴의 귀환이 늦어져서 만남은 내일로 미뤄졌고, 덕분에 나타샤가 꼬박 하루 정도를 우리의 안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여긴 러시아라는 느낌이 확 전해지네요.]

짐을 푼 우린 허기부터 채우기 위해 곧장 1층에 있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얼어붙은 거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러시아에 와 있다는 느낌이 실감 날 정도.

그 기분을 느낀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던지 일행 대부분이 한마디씩을 뱉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춥긴 춥군요. 확실히 러시아라는 느낌이 확 와 닿네요.”

“김 비서님은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난 외려 우리나라의 겨울이 더 추운 것 같소만.”

김 비서와 임 차장은 한동안 대한민국의 겨울과 모스크바의 겨울 중 어느 곳이 더 체감적으로 추운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논쟁을 하는 거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자 마침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나타샤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기회라는 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알렉세이 국장님께서 진현승 회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던 편입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왠지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러시아 대외정보국장의 눈에 비친 난 어떤 존재일까 싶어서.

하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선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미친 사람 같다고 하셨습니다.]

[…….]

풋!

순간 김 비서가 실소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알렉세이 국장께서도 아마 좋은 의미로 하신 말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은 미안했는지 이내 수습하려 했지만, 용케 그 말을 알아들은 나타샤가 다시 반박했다.

[죄송하지만 당사자께서 앞에 계셔서 제가 좀 순화한 것이지, 사실대로 전하자면 '미친놈.'이라고 하셨습니다.]

[…….]

그 말에 우리 일행들의 표정이 다양해졌다.

이 상황에서 나까지 침묵해 버리면 진짜 분위기 뭣 되는 거지.

어색한 웃음을 내비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압니까?]

[아무래도 대외 담당이다 보니 교육을 받기는 했습니다. 덕분에 대충 알아듣는 편이기는 하죠. 그래서 말인데, 그 미친놈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중의적인 표현은 아니었음을 확신합니다.]

어이.

그만하지.

지금 우리 일행들 웃음 참고 있는 것 안 보여?

[그런데 제 생각엔…….]

말을 이으려던 나타샤가 갑자기 자신의 전화기를 쳐다봤다.

울려대는 진동.

곧 통화버튼을 누른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무슨 일이죠?]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꽂혀 있었고, 조금 후 벌떡 일어서선 어딘가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쉼 없이 이어진 러시아어를 알아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단지, 굉장히 분노한 상태라는 것과 가끔 절도 있는 말투에서 윗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곧 전화를 끊은 그녀는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동료 요원들을 향해 손짓하곤 우리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한국에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 같습니다.]

임 차장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사이 흔적이 사라진 걸까.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듯, 쳇! 하고 불평을 토한 그는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임혁수, 너 지금 어디…… 무슨 소리야! 너 진짜 일 똑바로 안 할래? 그리고 그걸 이제야 보고하면 어쩌자는 거야.”

임 차장의 입에선 곧장 불평 섞인 타박이 뱉어졌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그는 나를 향해 시선을 주더니 긴 한숨과 함께 말을 뱉어낸다.

“비행기에서 마주쳤던 그 사내를 놓쳤다는군요.”

“…….”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일단 인상착의는 완벽히 숙지하고 있으니 곧 우리 직원들이 찾아낼 겁니…….”

[아니요, 손님들께선 그냥 계속해서 담소를 나누시죠.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러시아가 감당하겠습니다.]

한참 이어지던 임 차장의 말은 나타샤에 의해 중단됐다.

어느새 표정조차도 살벌하게 바뀐 그녀는 주변에 있던 동료에게 우리의 안전을 당부하며 자리를 떴고, 이후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나타샤가 나섰으니 꼬리는 확실하게 떨어질 겁니다.]

침묵이 이어지던 차에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나타샤가 우리의 안전을 대신 부탁하고 갔던 예의 그 러시아 정보원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녀가 이 방면에선 대외정보국을 통틀어 최고거든요. 누군지는 몰라도 멀리 가지는 못할 겁니다. 문제는 살려둔 채로 잡느냐, 아니면 아예…….]

우린 그 말에 서로를 돌아봤다.

표정이 바뀌지 않은 것은 오로지 임 차장뿐.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흠…….”

난 임혁수 요원이 마킹 중이던 목표를 놓쳤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도 임 차장이 먼저 전화를 할 때까지 보고하지 않았던 점도.

아무래도 내 추측은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왜요, 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굳어진 내 표정을 발견한 임 차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임 차장을 믿어야 하는 건가.

사실 그까지 연루가 되었다면 이 나라의 정보처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지는 거니까.

하지만 만약 그랬다가 뒤통수를 맞게 되는 상황이 오면?

솔직히 사람 일이란 또 모르는 상황인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정황상 나타샤가 말한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란 그 사내가 맞는 거겠죠? 우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그 사내 말입니다.”

난 결국, 내 짐작들을 당분간 알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적어도 임 차장에 대한 확신이 서기까지는.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필 이 타이밍에 사라져 버린 것도 그렇고…….”

임 차장은 거의 확신하듯 대꾸했다.

말투와 표정. 그리고 평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성격으로 봐선 아무리 봐도 그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 상태.

그래도 끝까지 안심할 수는 없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나타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

그사이 무슨 험한 일을 겪기라도 한 건지 옷매무새도 조금은 흐트러져 있었고, 내쉬는 숨소리도 꽤나 거칠었다.

꿀꺽!

그녀는 타는 목을 축이려는 듯 연신 물을 들이켰다.

순간 내 눈에 보인 것은 그녀의 옷 소매에 묻어 있는 핏자국.

[다쳤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그녀 역시 뒤늦게 제 소매를 확인한다.

스윽.

슬며시 소매를 여민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계속해서 꽂혀 있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듯 기어이 소매를 감추며 말한다.

[제 것이 아닙니다.]

[…… 그럼.]

[총리께서 화가 많이 나신 상태라서요. 우리가 초대한 손님에게 꼬리가 붙었다는 사실에.]

[…….]

이런 니미…… 진짜로 슥 해버린 거라고?

******

“자네들은 오늘 교대로 이 방 경비를 책임지도록 해.”

임 차장은 방으로 올라오자 두 요원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내 재빨리 방 곳곳을 도청탐지기로 수색한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일행들은 그 말에 숨을 몰아쉬었다.

답답했던 걸까.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뱉어냈다.

“죽었겠죠?”

“죽었을 겁니다.”

“죽었을까요?”

난 그 모습을 보며 상황과 걸맞지 않은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나마 조금은 긴장감이 풀어진 느낌.

하지만 그 순간 임 차장이 다시 돌을 던졌다.

“경험상 살려두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끅!

그 말에 김 비서가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그나마 감정의 동요가 없던 경호실장은 혹시 모를 비상상황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내내 문 앞만 지키고 있었고.

이럴 때 보면 확실히 특수부대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다른 무엇보다도 그 점이 궁금했다.

꼬리가 붙었다 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제거해 버린 저들의 무모함.

그래, 확실히 그건 무모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다.

“러시아는 애초 그런 상식이 안 통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긴 합니다만, 사실 나도 그 점은 좀 걱정스럽군요. 하지만 일본 측도 이 문제를 공론화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이 바닥이 그런 세상이기도 하고, 먼저 자극한 것도 일본이니까요.”

임 차장의 말에 조금은 수긍이 됐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방금 일본 측 정보원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방에 올라오기 전에 나타샤가 넌지시 나를 불러서 말해주더군요. 일본 내각정보조사실 소속 요원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고. 혹시나 해서 인상착의를 물었더니 저희 직원이 놓쳤던 그 사내와 일치하더군요.”

“그럼 임혁수 요원은 전에 뭘 근거로 그를 중국인이라고 단정한 겁니까.”

“내 말이 그겁니다. 저 그래서 말인데…….”

임 차장은 말을 하다 말곤 잠시 뜸을 들였다.

이내 힐끗 내게 눈짓을 하더니 거실 옆에 딸린 또 다른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창피스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진 회장님과는 상의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말씀하시죠.”

“임혁수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해요.”

“……어떤 점이요?”

“마킹 중이던 목표를 그렇게 쉽게 놓쳤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내게 곧바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그 사내의 국적을 중국인이라고 우기면서도 이렇다 할 근거를 대지 못했어요. 뭐 말로는 그가 보고 있던 서류들이 죄다 한자로 되어 있어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한번 신뢰감이 떨어지고 보니 이젠 그 말도 못 믿겠습니다.”

그는 힐끗 복도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쯤 교대로 문을 지키고 있을 임혁수를 의식한 행동.

사실 이쯤이면 임 차장도 공범일 수도 있다는 의심은 거둬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뒤따랐다.

하긴, 한 나라의 정보부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그가 끄나풀이라면 어차피 망한거지.

“실은 나도 그를 의심하고는 있습니다.”

난 결국 내가 추측한 점들을 그에게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임 차장의 눈은 커다래졌고, 종국엔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온갖 욕설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놈이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그나저나 상황이 이러면 전에 휴대폰 도청기 사건도 혁수 저놈이 범인이었다는 말인 거군요.”

“실은 그 점이 제 의심을 산 결정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화장실에 갔던 짧은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고는 했는데, 어느 누가 그 짧은 시간에 라커를 뜯고 휴대폰의 분리막까지 분해해서 도청장치를 심어 놓는 작업까지 마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엔, 그가 직접 한 짓이라는 소리죠.”

“……하면 목적이 뭘까요?”

임 차장은 핵심을 짚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 점을 가장 먼저 떠올렸던 상황.

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건 귀국하는 즉시 확인시켜드리죠. 아무튼, 이제 임혁수를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단은 모른 척해야죠. 만약 여기서 도주하는 날엔 뒷감당이 더 힘들어질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회장님의 경호원들을 통해 지속적인 감시를 부탁드립니다.”

“그 점은 염려치 마십시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가 눈치채고 도주한다 해도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임 차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이내 의미를 이해한 듯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나타샤…… 하긴, 여기가 러시아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군요. 그래도 제발 창피를 당하는 꼴은 없었으면 싶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내 다시 방을 나서자 여전히 거실에서 대기 중이던 김 비서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우릴 향해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오늘 여기서 자도 되나요?”

“……”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겠지.

그나마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것을 안 봤기에 다행이지, 아마 그걸 직접 눈으로 봤다면 반응은 더 심각했을 거다.

“그렇게 하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가 방이 두 개나 딸린 특실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내려진 결정은 밖에서 교대로 문을 지키는 두 국정원 요원들을 제외하고 죄다 한 방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경호실장님.”

난 경호실장을 조용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이자 그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스럽지만 며칠만 잘 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놓으시고 푹 주무십시오.”

경호실장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거실로 향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존재가 곁에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든다.

“후우…….”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이곳은 다행히도 호텔 내 금연정책이 적용되지 않았던 상태.

막 불을 붙이려는 차에 어느새 다가온 김 비서가 술이 가득 담긴 잔을 하나 건넨다.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은 더 피곤한 하루가 되실 텐데.”

“고맙군요. 참, 그리고…… 혹시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사실 여인의 입장에서 겪을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순간 휙 하고 다시 몸을 돌린 그녀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김 비서도 방금 경험했다시피 우린 이제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난 그 상황에서 김 비서에게 끝까지 함께 하자는 말은 못 하겠군요.”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

미처 예상치 못한 대꾸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순간, 그녀가 피식 웃어 보이더니 팔짱을 끼며 말한다.

“솔직히 마음은 굴뚝같은데요. 그래도 연봉을 회장님보다 많이 주는 분은 없네요. 제 모토가 ‘짧고 굵게 살자.’입니다. 하니 벌 만큼 벌 때까지는 회장님 곁에 붙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대신 위험수당은 좀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음…….누가 내 비서 아니랄까 봐.

졸라 현실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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