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55화
모하메드 왕자와의 만남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협약서에 사인을 마친 UAE 일행들은 아침나절 귀국길에 올랐고, 그룹에선 이번 사안을 보다 심도 있게 논의했다.
“UAE의 시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이사들의 대부분은 UAE와의 교류확대를 원하는 편이었다.
나 역시 그건 마찬가지.
이 기회에 넘쳐나는 오일머니를 최대한 끌어 올 수 있다면 그룹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기에 내내 머릿속에서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따르릉!
막 회의가 끝났을 무렵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집과 사무실 전화기를 완전히 교체하는 작업은 좀 더 시간이 걸리는 터라 급한 불길이라도 끄자며 국정원장이 우선 제공한 것이었다.
“누구지?”
액정에 뜬 번호의 패턴으로 봐선 국제전화인 듯싶었다.
혹여 라이언인가 싶은 생각에 통화버튼을 누르자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십니까, 진현승 회장님. 미합중국 국무장관 케서린 아서입니다.
순간, 얼마 전 있었던 라이언과의 통화내용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이클 상원의원이 꽤 쓸 만한 꼬투리 하나를 잡아냈다던.
혹여 모터시치 문제인가?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진현승입니다.]
-조금 전 휘트니 사의 얀센 부회장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두 업체에서 기술협력 협약서에 사인하셨다고요. 해서 말인데, 방금 의회에서도 그 안건이 통과되었음을 알려드리려 전화했습니다.
예상과는 다른 용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반가운 소식임은 분명했다.
나도 몰래 주먹을 불끈 쥔 순간,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참 그리고 어제 백악관 회의에서 재우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고 가서 소식을 좀 전해드릴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잠시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확 몰려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필시 모터시치 이야기겠지.
비록 지나가듯 전하는 소식이라는 사족이 달리긴 했어도 정작 중요한 용건은 아마 그것이었을 거다.
-클린턴 대통령께선 중국의 모터시치 장악을 무척이나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방인 대한민국에서. 정확히는 재우 탈레스가 모터시치를 인수하려 했던 전력이 있었죠. 해서 우리 행정부는 재우 탈레스가 혹시 모터시치의 인수를 재시도할 의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길고 긴 그녀의 말에서 미스비시 이야기는 쏙 빠진 상태였다.
하긴, 어차피 내 쪽으로 결론이 났다면 미국에서 굳이 미스비시의 일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
나 역시 모른 척 대꾸했다.
[백악관에서 긍정적인 반응이라면 당연히 저희도 재인수를 시도할 의향이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대신 조건이 한 가지 붙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재우가 모터시치를 인수한다고 해도 향후 10년간은 민항기 시장으로의 진출은 배제해주었으면 합니다.
아마도 그건 보잉을 염두에 둔 조치였을 거다.
그리고 내겐 아무런 의미 없는 조치이기도 하고.
사실 당장 모터시치 급의 기술력으로 보잉이 장악하고 있는 민항기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뿐더러, 그럴 생각조차도 없으니까.
[그 점은 확실하게 약속드리죠.]
-다행이군요. 잠깐 침묵하시길래 난 또 지난번처럼 무슨 당황스러운 말로 나를 긴장시키려나 했는데.
[그땐 제 감정이 잠시 격해졌었음을 인정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리죠.]
-아니요, 미스터 진의 입장에선 할 말을 했을 뿐이니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다만, 미스터 진이 앞으로 알아두셔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
잠시 침묵으로 대꾸했다.
마지막 말투에서 왠지 가시가 돋친 느낌을 받았거든.
예상처럼 수화기 너머에선 한숨 소리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일로 대통령 보좌관 한 명이 사임했습니다.
[…….]
-해서 말인데, 앞으로 문제가 있다면 우리와 직접 접촉을 하는 방법을 권해드립니다.
그 말은 이번 모터시치 사건을 두고 오고 가던 치열한 로비전의 배후가 나인것을 알고 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하긴, 결과가 내 이익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그걸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의아한 것은 반응이 예상보다는 격하지는 않다는 건데, 그에 대한 해답은 이후 이어진 그녀의 말에서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도 좀 충격이 컸어요. 행정부의 안보담당 보좌관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런 짓을…… 다행인 것은 그나마 공화당 쪽에서 관련 보좌관의 사임만으로 이 사태를 종결짓겠다고 하더군요.
[…….]
-사실 난 그게 미스터 진의 생각이라고 판단했는데, 아닌가요?
[아, 그게…….]
나로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공화당의 정책을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말인가.
한 가지 의심 가는 것이 있다면 라이언인데, 그 역시 무슨 생각에서 공화당의 의지를 꺾은 건지 모르겠다.
기왕 잡아낸 꼬투리를 두고두고 써먹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아무튼, 적당한 선에서 멈춘 것은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가뜩이나 대통령 탄핵문제가 봉합된 것도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만약 그 문제가 끝까지 확대됐다면 우리로선 꽤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언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만약 공화당이 끝까지 보좌관의 비행을 확대하게 되면 내 입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민주당의 입장에선 아마 재우라는 이름에 이가 갈렸을 거다.
하지만 그걸 막음으로써 얻은 결과는, 상대의 콧잔등을 치고도 인사를 받게 된 이 상황.
뭐 그렇다고 감정의 찌꺼기가 아예 없겠냐만. 결국, 우리가 민주당에 완전히 찍히는 것만큼은 막아준 거다.
‘이런 똘똘한 친구를 봤나.’
아마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안아줬을 거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역시나 그가 무슨 힘으로 공화당의 폭주를 막았느냐는 점.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대체 이 친구 돈을 얼마나 퍼부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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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녀오겠네.”
그로부터 보름 후, 모터시치의 인수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에어로스페이스의 윤 대표가 비행기를 탔다.
총 인수금액은 8천억 정도.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 정서를 달래기 위해 추가자금이 투입되어야만 했고, 결국 인수에 소모되는 총금액은 1조 3천억에 달했다.
쯧, 이런 걸 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고 해야 하는 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미국이야 단지 컨트롤러에 불과할 뿐, 정작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인 마당에.
그나저나 라이언 이 자식은 아무리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지나치게 걱정을 안 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돈의 힘이 그만큼 무섭다니까.
전날 있었던 통화에서 라이언은 공화당에 무려 4천만 달러를 퍼부었다는 말을 전해왔다.
사안의 파괴력을 고려하면 그 정도도 적게 들어간 거라나.
하긴, 자칫 정권을 뒤집을 수도 있을 무기를 포기시킬 정도면 사실 그 정도 돈이 많다고는 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화당은 절대 그 무기를 버린 것은 아니라는 걸세. 아마 선거 때가 되면 적당한 양념이 버무려져서 재등장하게 될 거야.
그때가서야 일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어차피 다음 정권은 공화당이 잡게 되니까.
그나저나 그럼 그렇지.
저들이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해 그런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그냥 포기했을까.
아마 당장은 챙길 이익을 챙기고 이후 뭔가 또 일을 크게 벌일 심산이었던 모양인데, 역시 어느 나라나 정치인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저희도 곧 출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회장님.”
오늘 출장을 떠나는 것은 사실 윤 대표만은 아니었다.
얼마 전 러시아 총리로 취임한 푸틴의 초대에 응하고자. 정확히는 기술교환을 논의코자 나와 김 비서 역시 공항에서 대기 중인 상태고, 이제 곧 임 차장만 도착하면 출발할 참이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임 차장은 사업 진행에 있어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할 예정이다.
아무리 민간업체가 주도하여 이루어진다지만 이건 엄연히 국가가 관리해야 할 사안.
정부 부처의 관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두 분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임 차장은 국정원 직원들을 둘이나 대동한 상태였다.
사실 해외까지 나가는 마당에 국정원에서 달랑 차장 한 명만을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두 직원 모두 나와는 안면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번엔 실수 없이 모시겠습니다.”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임혁수 요원이었다.
휴대폰 도청장치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라커룸을 지키고 있었던.
들려온 소문으로는 당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원장에게 치도곤을 당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상태였다.
“작정하고 덤빈 것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그때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아닙니다, 제가 그때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만 비우지 않았어도…….”
“……화장실이요?”
그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가만히 임혁수를 쳐다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즉시 말을 돌린다.
“참,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회장님 자택과 사무실 전화들을 교체하는 작업은 전부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휴대용 탐지기 역시 가져다 놨으니 자주 주변을 점검하십시오.”
“그렇게 하죠. 그런데 제 집에는 혼자 다녀오신 겁니까.”
"네, 그걸 굳이 여럿이 할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돌아섰다.
때마침 우리가 타고 갈 항공편에 대한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일행들은 서둘러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모스크바행, 816편 항공기에 탑승하실 승객께서는…….]
“1등석 승객들께서는 이쪽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보안을 위해 1등 석 전체를 우리 일행이 예약해둔 상태였다.
그 탓에 먼저 줄을 선 대부분의 인물들은 우리 일행들.
곧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탑승을 시작했다.
턱!
“죄송하지만 줄을 잘못 서신 것 같습니다만.”
막 게이트를 통과하는 와중 뒤편에서 내 경호실장이 누군가에게 경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마음에 돌아보자 웬 정장 차림의 사내 하나가 경호실장에 의해 진입을 저지당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분이 아무래도 줄을 착각하신 것 같아서…….”
그 말에 문제의 사내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한 걸까, 사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선다.
“미안합니다. 제가 줄을 착각했군요.”
말투가 왠지 어색했다.
뭐랄까, 일본인 특유의 부정확한 발음이 섞인 느낌.
그러고 보니 하는 행동도 뭔가 조금은 어설프다.
분주히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듯한 태도.
“무슨 일입니까?”
그때, 소란을 듣고 임 차장과 요원들이 달려왔다.
곧 상황을 파악한 그는 임혁수 요원을 향해 무언가를 속삭였고, 고개를 끄덕인 임혁수 요원은 곧장 뒤편으로 빠지며 예의 그 수상쩍은 사내가 향하는 대기 줄로 함께 스며들었다.
“일단 감시는 붙여뒀으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임 차장은 계속해서 사내를 신경 쓰는 나를 다독이곤 다시 앞서갔다.
일이 없었다면 모를까, 최근 벌어졌던 도청장치 사건으로 인해 나로서는 그 말이 별반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이상 없습니다.”
도착한 일등석은 임혁수의 동료 요원에 의해 샅샅이 검사가 진행 중이었다.
역시나 지난번 도청사건이 영향을 끼친 모양인데, 덕분에 애꿎은 승무원들마저도 잔뜩 긴장의 파고를 타고 있었다.
“주무십니까?”
오랜 비행을 잠으로 극복할 심산으로 눈을 붙였을 때쯤, 임 차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덕분에 몰려들던 몽롱함이 싹 달아나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자 임 차장의 말이 이어진다.
“아까 그 사내 말입니다. 내가 우리 직원에게 마킹을 지시했던.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다더군요.”
“어떤 점이요?”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를 펼쳐 들고 바쁜 업무처리를 하는 척을 했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다분히 우리를 의식한 행동 같답니다.”
“흠…… 차장님께선 못 들으셨겠지만, 말투가 왠지 한국 사람 같지는 않더군요. 혹시 그 점은 확인했답니까?”
“임혁수 요원의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중국인 같다더군요.”
“중국인이라고요? 확실합니까?”
느낌이 왠지 이상했다.
분명 내가 들었던 사내의 억양은 일본인 특유의 것.
그런데 갑자기 웬 중국인?
'이것 봐라?'
순간, 수 없는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곧 머릿속에서 떠돌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더니 꽃이 개화하듯 눈앞이 환해졌다.
피식.
“왜 그럽니까?”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임혁수 요원에게 꼭 좀 전해주십시오. 아주…… 두루두루 수고가 많다고.”
“그게 그 친구 임무인데 수고는요. 아무튼, 꼬리는 잡은 상황이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임 차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제로.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야 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