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48화
“경제인 협력단 여러분들께서 묵으실 숙소는 7층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짐을 푸시고 휴식들을 취하시면 될 겁니다.”
워싱턴에 도착한 우린 곧장 호텔로 향했다.
방문 환영 행사를 치러야 하는 대통령 및 각료들과는 달리 우린 곧바로 호텔로 안내된 상태.
워낙 이른 시간에 도착한 터라 시간적인 여유가 지나치게 많았다.
“진 전무. 미안하지만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한창 숙소에서 짐을 풀던 와중 이용문 회장이 내 방을 찾았다.
최근 90나노의 본격적인 생산으로 전 미국의 펩리스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던 삼정이다 보니, 그의 방미는 당연한 결과였고, 사실상 다른 누구보다 미 언론이 관심을 갖는 대상이기도 했다.
“들어오시죠.”
“휴식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이용문 회장은 찬찬히 방을 둘러보며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을 무렵 그가 대뜸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아는가?”
“…….”
“어제까지 우리 삼정에게 90나노 기반 제품들의 위탁생산을 협의해온 미국 업체들의 명단일세.”
“대박 나셨군요.”
“쯧, 이 친구 꼭 남 얘기하듯 하는군. 이게 어디 나만 대박 나는 일인가? 결국, 자네에게 돌아갈 기술 비용도 생각을 해야지.”
“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약상 90나노 기반의 제품 생산이 시작되면 내게도 일정 부분 수익을 보장했으니 당연히 로열티가 지불 되겠지.
안 그래도 최근 90나노의 양산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기대는 하고 있던 차였다.
“자네 지나치게 바쁜 것 아닌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내가 먼저 거론하는 건 좀 우습잖아.”
“사실 잠잘 시간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계약 규모가 꽤 큰 모양이죠?”
“이 리스트 상에 기록된 것만 해도 30억 불이 넘어. 해서 대략 자네에게 돌아갈 로열티의 규모도 천억 원에 달하지.”
“…….”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멍한 내 표정이 우스웠던 듯 그가 입매를 뒤틀며 다시 말한다.
“솔직히 이건 시작에 불과하네. 우리가 미국에 있는 동안 진행할 계약만 해도 이것의 배에 달할 테니까. 이런 식으로만 가면 자네 말대로 몇 년 안에 파운드리 시장은 삼정이 장악하게 될 걸세.”
“축하드립니다.”
애초 예상했던 결과기에 그 부분에서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막말로 4년이 넘는 기술 격차를 보이는 반도체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하지.
그나저나 상황이 이러면 TSMC는 어떻게 되는 거지?
대만의 자랑은 이대로 날아가 버리는 건가.
“내 예상으로 2년 후쯤이면 자네에게 돌아갈 로열티 규모가 대략 조 단위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네. 하니 정작 축하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지.”
“그건 또 무슨 궤변이십니까. 그사이 삼정은 수십 조에 가까운 수익을 올리게 될 상황인데요.”
“이 친구야, 그게 회삿돈이지 어디 내 돈인가?”
“…….”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그 로열티는 순수하게 자네 개인에게 지불 되는 돈이니까.”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나야 어차피 세금만 떼면 나머지는 죄다 개인적으로 운용이 가능한 자금이 되는 셈.
개인적인 입장에선 내가 그보다 이익인 셈이다.
“그럼 회장님께서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주셔야겠군요. 그래야 제가 부자가 될 테니까.”
이 회장은 그 말에 헛웃음을 뱉어냈다.
방문 목적이 그게 다는 아닌 걸까. 곧 그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지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45나노 공정 개발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군.”
“왜요, 45나노 공정마저도 삼정에서 기술을 매입하시게요?”
“이 친구 이제와서 웬 발뺌이야. 그 문제는 이미 약속했잖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정에서도 그동안 성과는 있었을 텐데요? 어차피 그 기술을 기반으로 스케일링을 진행 중인 것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시도야 했지. 하지만 우리의 개발 속도가 원천기술을 보유한 자네 연구소만 하겠나.”
“그러다 자칫 자체 개발 능력이 후퇴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설사 그렇다 해도 당분간은 어쩔 수 없네. 우리가 파운드리 분야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는 최대한 격차를 벌려 놔야 할 것 아닌가.”
“흠…… 일단 무슨 뜻인 줄은 알겠습니다. 만약 저희가 먼저 성공하게 되면 약속대로 그땐 반드시 회장님께 먼저 연락을 드리죠.”
이 회장은 그 말에 표정을 밝혔다.
이내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낸 그는 대뜸 낮술을 하자며 나갈 것을 권했지만 난 피곤함을 핑계로 그를 돌려보냈다.
‘내년 말쯤에 조 단위의 돈이 들어온다? 그럼 45나노를 넘겨주게 되면, 그땐 대체 얼마나 수익이 발생하는 거지?’
아마 상상을 초월한 수준일 거다.
잘하면 대한민국 부자 순위가 단번에 뒤바뀔 만큼.
사실 이럴 때면 차라리 기술을 제공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편하게 살까 싶은 나태함이 파고들고는 하지만, 필시 그건 불가능할 거다.
평생을 연구개발에만 매달리며 살아왔었던 습관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성과를 냈을 때 느껴지는 그 전율은 내겐 일종의 마약과도 같다.
똑똑!
“전무님. 저 영호입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경호실장이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자 그가 웬 미국인들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이분들은 누구…….”
“제프리 총장님께서 보내신 미 해군 정보국 요원들이시랍니다.”
[아! 반갑습니다.]
사내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분위기가 왠지 이상해서 쳐다보자 경호실장이 대뜸 한마디를 보탠다.
“죄송합니다. 제가 신분 확인을 좀 까다롭게 했더니…….”
대충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가뜩이나 철저한 경호실장의 성격상 이런저런 증명을 요구했겠지.
그 과정에서 조금은 언성이 높아졌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건 경호실장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비록 저들의 방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곤 해도 그의 처지에선 철저한 신분 확인이 필수였을 테니까.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사내들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섰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걸까, 경호실장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와선 내 곁을 지킨다.
[경호원분께서 조심성이 대단하시군요. 전, 미 해군 정보부 소속의 리처드 알렌 대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막스 제논 중위고요.]
사내들은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 이어 방문 목적을 밝혔다.
미리 언질을 받은 대로 내 안전을 위한 파견근무인가 싶었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과의 동행을 요구했다.
[그건 곤란하군요. 당장 내일 미 국무장관님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그건 단순한 핑계만은 아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찾아온 국정원장은 대뜸 내일 있을 2차 정상 회담과 동시에 나와 국무장관과의 면담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난 흔쾌히 응했던 상태다.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해서 멀리 갈 예정은 아니니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 혹시 안전이 염려되시는 거라면 제프리 총장님과 직접 통화연결을 해드리겠습니다.]
알렌 대위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 대기 중이었던 건가.
불과 두어 번의 신호가 울린 상황에서 통화가 연결 되었다.
[받아보시죠.]
알렌은 짧은 대화 끝에 내게 전화기를 건넸다.
-미스터 진?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제프리 총장.
그는 불과 이곳에서 10분 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임을 알려왔다.
[가시죠.]
결국, 옷을 갈아입곤 사내들을 뒤따라 나섰다.
내 경호 인력들이 대동한 것은 물론, 호텔을 나서자 몇몇 미 해군 소속의 요원들이 더 따라붙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제프리 총장을 만난 곳은 여느 한가한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조치한 듯 손님이라고는 오로지 그와 나뿐.
왠지 과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실은 육군 장관께서도 참석하시길 원했지만 지금 정상 회담장에 계신 상태요. 회담 후에 만찬이 있을 예정이라서요.]
[육군 장관께서 왜요?]
[왜긴 왜겠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봤으니 안달이 난 거죠. 사실 연평도 사태는 사실상 육군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표정 관리를 하며 마침 차려져 나온 식전 빵을 들어 올렸다.
기내에서 준 식사 외엔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
갓 구운 빵 냄새가 유독 유혹적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죠. 난 육군에게 순번을 빼앗기고 싶은 생각은 없소. 미스터 진도 알다시피 협력을 약속한 것은 우리 해군이 아닙니까.]
[그야 당연합니다. 한데 예산 확보는 되어 있는 겁니까?]
[그럼 설마 내가 예산도 확보하지 않고 다그치겠소? 재우에서 결정만 하면 당장이라도 사업 진행이 가능하오.]
[흠…….]
[왜요, 혹시 그새 다른 우방국들이 접촉해 온 겁니까?]
[아니라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 외에 문제 될 것이 뭐가 있다고요.]
[우리 군에서도 조기 배치를 서두르는 터라 생산력이 따라 줄 것인지가 문제죠.]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조급해진 걸까, 그는 느닷없이 미 해군과의 교류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을 강조했다.
[전화상으로 말했듯 미 해군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한은 누구도 재우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노키드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그리고 내가 군에 남아 있는 한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죠.]
[알고 있습니다. 실은 저도 제프리 총장님의 이름을 팔아서 이번 일을 해결했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어떨까요.]
순간, 제프리의 눈빛이 한껏 밝아졌다.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은 레이더인데, 그걸 붕어빵 찍듯이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상황이니 미 해군과 우리 군이 올해 생산분의 절반씩을 가져가는 것으로 하죠. 사실 그 정도라도 미 해군의 이지스함정들 중 다섯 척 정도는 기존 레이더를 교체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제프리는 그 말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반대했다간 방법이 없는 상태.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한숨과 함께 그의 손이 쑥 하고 내밀어졌다.
[그렇게 합시다.]
골치 아팠던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이것으로 더는 미 방산 업체들의 딴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사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이 협상은 내게 이득인 셈이다.
[그나저나 미 육군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육군 장관의 태도를 보면 그들도 시스템 구축에 욕심을 가지고 있던데. 재우의 생산 능력이 그렇듯 한계가 있다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
생각해보니 그게 문제였다.
쯧, 하나를 해결하니 또 하나가 터져 나오고.
상황이 이러면 더는 행복한 고민이라고만은 할 수 없게 됐다.
[하긴, 그거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제프리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이미 해군의 문제는 해결했으니 육군의 문제 따위야 상관이 없다는 거지.
저렇듯 지독할 정도로 각자의 노선을 고집하는 미 군부에 적응하는 것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을 알리고 설득을 해야겠죠. 그렇다고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쉽지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죠.]
[…….]
[아무튼, 그건 그렇고. 혹시 소식은 들었습니까?]
[무슨 소식이요?]
한참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제프리가 넌지시 말을 뱉어냈다.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그가 눈을 빛내며 말을 잇는다.
[국무장관이 재우에게 원자 스핀 자이로 문제를 거론할 거라는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
[물론 미스터 진도 대강 눈치는 채고 있었겠죠?]
[네, 어느 정도는.]
이 상황에서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흔쾌한 대답이 만족스러웠던지 제프리가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면 어쩔 생각입니까.]
[…….]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침묵했다.
그러자 제프리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속삭이듯 말한다.
[이것 하나만 알아두시오. 혹여 미국을 상대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최고의 기회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