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21화
한명호 회장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의기투합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신용이 생명이라는 스스로의 말을 증명하듯 그는 불과 사흘 만에 내게 매물 하나를 추천했고.
그로부터 이틀 후엔 경매 시장을 주도하는 큰손들의 커뮤니티에 자신의 개입 사실을 알렸다.
'결국 큰손들만 장악하면 끝나는 시스템이라는 건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시대의 부동산 경매 시스템이 지나치게 일부 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회장을 비롯한 부동산 3대장들과 그들에게 기생하는 큰손들에 의해서.
물론 그들 사이에서도 협력과 반목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외부의 접근 앞에서는 항상 똘똘 뭉치는 것이 특징이었다.
'우습군. 분명 잘못된 관행임은 분명한데, 외려 그 덕분에 지나친 국부의 유출은 막았으니까.'
그 점은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경매를 장악하는 것은 분명 불법적인 행위였음에도 그걸 나무랄 수가 없다는 것.
비록 저들에 의해 일부 부동산 시장이 왜곡되기는 했지만, 덕분에 금융시장처럼 해외 투기자본들에 의해 털이 죄다 뽑혀나가지는 않았거든.
엄밀히 따지면 이건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 거나 마찬가지인데, 결과적으로는 그 악화가 이 나라에 도움을 준 거다.
'하긴, 하이에나 같은 해외 투기자본에 죄다 먹혀 버린 금융업계를 생각한다면야 뭐…….'
이 시대의 금융계는 그야말로 해외 자본의 놀이터였다.
특히나 엔캐리트레이드를 무기로 한 일본계 자금은 순식간에 이 나라의 서민금융을 장악했고, 차후 막대한 부실을 일으켜 경제를 또 한 번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을 정도다.
“실장님!”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와중 갑자기 김 비서가 들이닥쳤다.
무슨 사달이라도 난 것 같은 분위기.
행여 공장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뭔데 그럽니까?”
“진현철 전무님께서 이번에 에어로스페이스로 자리를 옮기신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
순간 당황스러움이 몰려들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나조차도 모르는 그룹 인사이동 소식을 일개 비서가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표정을 눈치챈 듯 김 비서는 서둘러 변명을 이었다.
“실은 회장님 비서실을 통해서 전해 들은 소식인데, 어제 갑자기 그룹 본사에서 임시회의가 열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진현철 전무님의 거취 문제가 안건으로 올라왔다고…….”
“형님의 거취 문제가 왜 임시회의 안건이 된 거죠?”
“저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전무님께서 직접 이동을 자원하셨다는 것밖에는…….”
그게 사실이라면 단순히 기뻐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스스로 지주사 간부 자리를 버리고 계열사로 내려갈 이유가 없거든.
최근 영 잠잠하다 싶더니 아무래도 뭔가 일을 꾸미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설마 전투기 엔진 개발이라도 시도하려는 건가?”
어쩌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나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진현철로서는 보다 큰 한 방이 필요했을 테니까.
더군다나 재우에어로스페이스는 KF-16의 엔진 라이선스 제작업체.
이미 엔진의 구조적인 이해도만큼은 확보한 상황이니 한 번쯤 그런 꿈을 꿔보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쯧…….”
하지만 그건 무모한 도전으로 결론 날 거다.
회귀 직전인 2025년도에도 신뢰할 만한 엔진 제작기술을 갖춘 업체라고는 전 세계에서도 고작 서너 곳에 불과했던 상태.
그 마당에 온전한 터빈블레이드의 제작기술조차도 없는 재우에어로스페이스가 단기간에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물론 5세대 전투기 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내가 직접 뛰어든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예산이 받쳐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 해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겠지. 굳이 한직이나 다름없는 곳으로까지 자리를 옮기며 뭔가를 시도한다는 건 아직 포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옳은 생각이십니다.”
내 혼잣말에 김 비서가 반응했다.
헛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자 그녀가 대뜸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전무님께서 탈레스에서 빠져나가시면 그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되는 거죠?”
“글쎄요, 그거야 그룹회의에서 다시 결정을 하겠죠. 누가 오던 우린 그냥 우리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혹시 실장님께서 승진하시는 건 아닐까요?”
김 비서는 은근슬쩍 욕심을 드러냈다.
솔직히 나라고 기대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그렇듯 무리한 인사이동을 했다간 꽤나 잡음이 뒤따를 거다.
“설마요. 정책실장 자리에 오른 것도 불과 몇 개월 전인 마당에…… 아무튼, 난 법원으로 갈 테니 김 비서도 오늘은 이만 퇴근해요.”
“오늘도 취미 생활을 하시려는 모양이죠?”
그녀는 내가 경매에 참여하는 것을 항상 취미 생활이라고 표현했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하는 내가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라나?
난 그저 여유가 주어진 김에. 그리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뛰어든 건데, 그녀의 입장에선 그게 열정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경매가 취미라는 말은 한명호 회장님 같은 분에게나 어울릴 겁니다.”
생끗 웃는 그녀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법원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분쯤.
오늘 경매가 진행 될 매물이 워낙 노른자 땅에 위치하고 있던 터라 가는 내내 심장박동이 잦아들지 않았다.
‘청담동 사거리. 낙찰만 성공한다면 시세차익만 족히 50억쯤은 노려 볼 수 있겠네.’
***
“어서 오게.”
도착한 경매장에는 한명호 회장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나 그건 필시 자잘한 매물들을 노리고 온 꾼들일 뿐.
정작 한 회장의 주변은 마치 불가침 영역이라도 되는 양 자리가 죄다 비어 있던 상태였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막상 가까이선 본 한 회장은 분위기가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뭐랄까, 꼭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내뱉기 직전의 표정.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 곧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약속한 첫 경매부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네만, 아무래도 오늘 물건은 포기해야 할 것 같군.”
“…….”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나도 썩 내키는 것은 아니니까. 워낙 가까운 지인의 부탁이라 안 들어줄 수가 없었네.”
푸념처럼 말을 뱉어낸 그는 경매장 한편을 턱짓했다.
왜, 라는 질문은 잠시 미뤄둔 채 시선을 돌린 순간, 웬 시커먼 정장 차림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중년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그 지인분이 저기 있는 신사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아침나절 도착했더니 저렇게 딱 버티고 있더군.”
“누굽니까, 저분이.”
“이기호 회장. 나와 함께 이 나라 부동산 3대장 중 하나로 알려진 인물이지. 참고로 그 옆에 있는 자들은 아마 정보부처의 인물들일 게야.”
“정보부처 인물들이 왜 부동산 재벌과 함께 경매장에 있는 거죠?”
“이유야 나도 모르지.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저 친구가 가끔 정보부처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뒤에서 대신 처리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한다는 거야.”
그 말에 다시 중년인을 쳐다봤다.
내내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눈이 마주친 중년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 젊은이가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재우그룹의 차남입니까?”
“자네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중년인을 대하는 한 회장의 태도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퉁명스러웠다.
필시 나를 의식한 태도.
그럼에도 끝내 웃음기를 잃지 않은 중년인. 아니 이기호 회장은 슬며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난 부지불식간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현승입니다.”
“한 회장님을 통해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앞을 내다보는 눈이 아주 대단하다고요?”
“…….”
“그나저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이번에 경매에 나온 물건을 좀 양보해주었으면 싶은데.”
“이유가 뭐죠?”
순간 이기호 회장의 얼굴이 경직됐다.
다짜고짜 따지고 들 줄은 몰랐던 거겠지.
하지만 난 대답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건 기밀 사항이라서 말해줄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대신, 차후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힘을 보탤 테니 이번만 양보를 해 주면 안 될까요?”
그의 말투는 지극히 공손했다.
뒤편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사내들의 태도 역시 그다지 강압적이지는 않았고.
말 그대로 압박에 의한 포기가 아닌 양보를 받아낼 심산인 모양이다.
“저…… 회장님, 저는 꼭 이번이 아니라도…….”
그때, 저들 무리 속에서 유독 쭈뼛거리고 있는 사내 하나가 이기호 회장을 향해 말했다.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차림새도 보통의 아저씨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임은 분명하건만, 좀처럼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 여긴 김치수 씨라고, 러시아를 상대로 조그맣게 무역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까지는 좀 그렇지만 실은 양보를 해달라는 이유가 바로 이분 때문이죠. 워낙에 큰일을 하신 분인데, 변변한 보상도 제대로 못 받으셨거든요.”
내 시선을 의식한 이기호 회장은 즉시 사내를 내게 소개했다.
얼핏 이해하지 못할 부연 설명과 함께.
사실 누가 그 말을 듣고 사내의 정체를 알아채겠느냐 만은, 공교롭게도 내겐 그 말이 답안지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치수 씨라면, 설마 대한물산의 대표 김치수 씨 말입니까?”
순간 이기호 회장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 그뿐일까, 그의 곁에서 내내 머뭇거리던 김치수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
그는 마치 죄를 짓다 들킨 사람마냥 경기를 일으키며 나를 쳐다봤다.
맙소사!
저 표정을 보고 나니 이제야 확실히 기억이 나네.
“저, 저를 아십니까?”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나에겐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바로 이 나라 순항미사일개발 역사의 산증인이니까.
만약 그가 부패한 러시아의 군부를 통해 그들의 순항미사일을 몰래 수입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ADD가 순항미사일 개발의 단초를 얻지 못했다면, 아마 이 나라의 순항미사일 기술은 10년쯤은 더 뒤처졌을 거다.
“아, 그게…….”
안타까운 것은 그의 말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거다.
불법 미사일 유출 소식에 격노한 러시아의 보복을 받아 그의 사업은 망했고, 나라로부터도 변변찮은 보상도 못 받았다는 것이 정설.
그런데 그건 단지 설에 불과 했을 뿐인 건가.
결국 국가의 보상은 이런 식으로나마 이루어졌었던 모양이다.
[장내에 계신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곧 1998 타경 80881 물건에 대한 경매가 진행 될 예정이오니…….]
막 대꾸를 하려던 순간 스피커에서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여 여부를 결정해야 할 시간.
사람들의 시선은 순식간에 다시 내게로 향했고, 난 여전히 눈치를 살피는 이기호 회장을 향해 선포하듯 말했다.
“좋습니다, 양보하죠.”
“그거 고마운 일이군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잠시 안도의 빛을 띠던 이기호 회장의 얼굴이 그 말에 굳어졌다.
그렇다고 뭘 그런 눈으로까지.
그럼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포기를 할까 봐?
국가의 영웅은 영웅이고, 내 손해에 대한 보상은 하셔야지.
“제게 힘을 보탤 일이 생기면 돕겠다는 말씀, 믿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럼 2차 불곰사업의 책임자를 제게 소개해 주십시오.”
“…….”
불곰사업이란 한때 우리가 구소련에 제공했던 경협차관의 환수를 현물로 대신하기 위해 꾸려진 협의체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현물이 대부분 전차나 장갑차. 그리고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같은 무기였다는 것.
덕분에 우리나라는 그 무기들을 씹고 뜯고 맛보며 핵심 기술들을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고.
차후 후속 투자와 서로 간의 기술 교환. 그리고 서방 세계의 견제 등. 여러 불협화음을 거치긴 했어도 그게 우리나라 군수분야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쳤음은 사실이다.
“설마 모르신다고 하시진 않겠죠?”
정황상 이기호 회장이 불곰사업과 연관이 있는 인물임은 확실했다.
우리나라 미사일 개발사와 불곰사업은 불가분의 관계니까.
특히나 국가를 대신하여 김치수에게 보상안을 마련해 주고 있는 지금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글쎄요, 나로선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