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20화
“1998 타경 610081 물건의 입찰 결과는…….”
경매 시작 두 시간 후, 결국엔 내가 최종낙찰자로 결정됐다.
아니 애초 입찰자가 나 혼자 뿐이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그럼에도 불안한 것은 은행이 정말로 이의제기를 포기하겠느냐는 건데.
앞으로 이의신청이 끝나는 기한까지는 아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한명호 회장님. 제일은행 법무팀장 이재호라고합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누군가 뒤편에서 한명호 회장을 향해 아는 척을 해왔다.
누가 봐도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하는 자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는 한명호 회장이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거의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기억하다마다. 그런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물건의 위치가 워낙 좋다보니 혹여 회장님께서 나서시지는 않을까 싶어서 왔는데, 예상이 맞았군요.”
“그래서, 이의 제기를 하려고?”
“그럴 리가요. 한 회장님께서 나서신 경매라면 저희가 고집을 피워서 뭣하겠습니까. 방금 전 행장님과 통화를 했습니다만 기왕이면 한 회장님께서 신경을 덜 쓰시게 해드리라는 행장님의 당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저 말은 곧 은행에서는 이의제기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가관도 이런 가관이 있을까.
평소 서민들을 상대로는 1원 한 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온갖 짓을 다하던 은행의 태도라고는 믿겨지지가 않는다.
“행장님에게 고맙다는 안부 인사 전해주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이번엔 직접 낙찰을 안 받으시고 대리인을 세우신 겁니까?”
사내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왠지 불쾌하다 싶은 눈빛이었던 터라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자 눈치 빠른 한 회장이 나를 대변하고 나섰다.
“대리인이 아니라 내 동업자일세. 앞으로도 종종 이 친구와 함께 경매에 참여를 할 예정이니 그런 말실수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게야.”
“이, 이런. 죄송합니다. 전 그저 젊은 분이 함께 계셔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내는 비로소 저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힐끗 내 몸 곳곳을 살피는 폼으로 봐선 내 정체가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냥 내 차로 움직이지.”
경매장을 빠져나온 한 회장은 동행을 요구했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의아한 마음을 뒤로하고 차에 오른 순간 예상처럼 그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낙찰 받은 물건 말일세. 혹시 계속 보유할 생각인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파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워낙 저가에 낙찰을 받아놔서 당장 팔아도 시세차익을 꽤 볼 수 있을 테니까.”
“네, 여러 의미에서 회장님께는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말 했잖아,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참, 자네 말대로 김판우가 해외로 꽤 많은 돈을 빼돌렸더군. 정신 나간 놈 같으니. 제 직원들은 몇 개월씩 임금도 못 받고 있는 마당에…….”
“그래서 어떻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당연히 내 돈은 회수해야지.”
“가능할까요? 이미 빼돌린 재산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돈 받아내는 방법이야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랬으니 오늘날 이 정도까지 부를 쌓은 걸 거다.
한마디로 사채업자는 사채업자라는 소리지.
아무리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는 있어도 최악의 경우 그는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잊어선 곤란하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갑자기 무서워지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요.”
그렇다고 내가 그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그의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곤란한 지경에 처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사 돈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빌리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솔직히 투자자로서의 그라면 외려 은행보다 더 든든한 존재일 거다.
“아니라고는 해도 표정이 썩었는데 뭘 그래.”
“…….”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난 돈 안 갚는다고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동네 양아치가 아니야. 단지 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여신을 회수하는 법을 잘 알고 있을 뿐이지.”
애써 변명을 하는 모습이 왠지 우스웠다.
마치 내가 자신을 멀리할 것을 염려하는 느낌이랄까.
괜한 오해다 싶어 웃어 보이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자네 혹시 요즘 목돈이라도 필요한 건가?”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내가 경매를 제안하자 덥석 달려드는 걸 보고 왠지 그런 느낌이 들더군. 게다가 얼굴엔 돈 욕심이 잔뜩 매달려 있고.”
딱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경매라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난 정말로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니까.
사실 이런 경제공황의 시대에. 더군다나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경매만큼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은 또 없지 않던가.
“관상으로 그런 것도 보이십니까?”
“관상이 아니라 눈치가 빠른 것뿐이지. 그런데 왜 돈이 필요한 거지? 혹시 탈레스 지분을 끌어 올리려고?”
“…….”
“그런 반응 보일 것 없어. 어느 재벌 가문이나 형제가 여럿이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 더군다나 자네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런 욕심을 낸다 해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의 통찰력은 놀라웠다.
헛웃음으로 일관하자 그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하면 내가 좀 도와줄까?”
“…….”
“뭐 굳이 다른 방법을 쓸 필요도 없이 지금처럼 경매를 통해서 자산을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길이잖아. 물론, 공짜는 아니야. 내가 도움을 준 만큼 자네도 당연히 뭔가를 내놔야겠지.”
이런 상황을 예견하기는 했었다.
단순히 호의에 대한 대가라기엔 내가 챙긴 이익이 지나치게 막대하거든.
결국 그가 내게 보여준 호의가 미끼였던 것은 확실한데, 굳이 그 미끼를 물어준 이유는 뒤에 벌어질 상황이 궁금해서였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진정 내게 바라는 것이 뭘까 싶은 마음에서.
“뭘 바라십니까?”
“…….”
그는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잠시,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대뜸 내 연구소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자네가 설립한 연구소에서 요즘 꽤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한다더군.”
“…….”
“혹시 그곳의 지분을 내게 일부라도 넘길 생각은 없나?”
“순수한 투자를 하시겠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제 연구소는 거래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내 연구소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건 곤란했다.
나중이라면 또 모를까, 한창 결과물들을 내며 폭풍 성장을 하는 시기에 지분을 넘겨주는 바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미처 거절을 예상치 못했던 듯 한 회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난 자칫 주제와는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을 말을 넌지시 뱉어냈다.
“그나저나, 요즘 남에게 돈 빌려주기가 참 무서운 세상이죠?”
“…….”
“물론 그 와중에도 회장님께서 꽤 많은 기업들에게 여신을 제공하셨을 테고요.”
“그랬지. 한데 이 상황에서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그 명단을 제게 주십시오. 그럼 제가 가진 정보력을 바탕으로 향후 부실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최대한 피해갈 수 있게 해드리죠. 그게 제가 회장님께 드릴 수 있는 반대급부입니다.”
“…….”
아마 당장은 그게 어떻게 반대급부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거다.
하지만 이렇듯 한 치 앞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손해를 피해가며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생각이 있는 자라면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자네가 무슨 수로? 지금은 흑자 부도도 숱하게 발생한다는 걸 알고는 있나? 단순히 재무제표나 내부정보 같은 것만으로는 그 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의 시대야.”
“그래서 더 제 정보력이 필요하실 거라는 소립니다. 굳이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김판우 회장님의 경우만 봐도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
“솔직히 그분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것은 비단 회장님만이 아니라 국세청에서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예로 들었던 김판우의 경우를 봐서라도 무작정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믿기에도 증거가 부족한 상태.
예상처럼 그의 고개가 슬슬 가로저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앞으로 일주일쯤 후에 한서그룹이 결국엔 부도처리 될 겁니다. 그게 사실이 되면 그때 가서 이야기를 다시 하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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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한서그룹이 최종 부도처리 되었습니다. 정부는 한서건설을 비롯한 몇몇 계열사의 법정관리를 검토했지만 지나친 자본잠식과 부실화로 인해서 더 이상의 지원은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후, 내 예언은 현실이 됐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한명호 회장은 다시 나를 호출했고, 마주한 그의 손에는 노트 열 권 분량에 달하는 대출 목록들이 들려 있었다.
“대체 한서가 최종부도처리 될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지? 정부 부처들조차도 얼마 전까지 결론을 내리 못해서 우왕좌왕 했던 것을.”
“그걸 말씀드리는 것은 제 정보 루트를 공개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좋아, 그건 묻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일단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는 말을 뱉어냄과 동시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게 건넸다.
어쩌면 수조 원에 달할지 모를 그의 투자처가 공개되는 순간.
막상 자신하기는 했어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서 향후 부실화 가능성이 큰 기업들을 골라준다면 약속대로 나 역시 앞으로 자네를 적극 돕도록 하지.”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예상처럼 받아든 목록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
적게는 수억 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많게는 수천억까지.
무려 186개에 달하는 기업들의 명단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흠…….”
투자처들이 중구난방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애초 사채라는 것이 필요로 하는 자가 있다면 업종을 가리지 않는 다고는 해도 이건 지나치게 일관성이 없다고 할까.
결국 난 향후 사양길에 접어드는 업종과 미래가 불투명한 것들을 과감하게 쳐내고 대략 스무 곳에 달하는 기업만으로 투자처를 압축했다.
“넥솔? 난 넥솔이라는 기업에 돈을 빌려준 기억은 없는데?”
“거긴 혹시라도 관심이 생기신다면 투자를 해보시라고 제가 따로 권유하는 곳입니다.”
“지금 나보고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 투자를 하라고?”
그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전과는 달리 무턱대고 불신의 눈빛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거다.
“참고로 그곳은 회사가 아닌 인물에게 투자를 하신다고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즉,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셔야 한다는 소리죠.”
“장기적이라면 얼마나?”
“최소 10년 이상. 아니, 그냥 버리는 돈이다 생각하시고 20년 정도 묻어두시죠.”
“20년? 자네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알고 있나?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해하신 모양인데, 그곳은 회장님이 아닌 따님께서 수확하실 물건을 추천해 드리는 겁니다.”
순간 그가 움찔했다.
한동안 흔들리던 동공이 멈추더니 그의 입이 히죽 벌어진다.
“내 후대까지 생각을 한 투자처라…… 이거 허를 찔린 느낌이군. 그나저나 대체 뭐 하는 인물인지나 설명을 좀 해 보게. 그래야 나도 결정을 내릴 것 아니야.”
“이름은 서정환. 태우자동차 기획재무 고문 출신이죠. 제가 아무리 그에 대해 설명을 해 봐야 의미는 없을 테고, 그를 직접 만나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만남 이후의 결과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 한 회장이 그에게 투자를 결심한다면 향후 그의 후대가 거둬들이는 수익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거다.
미래에 이 나라 최고의 바이오시밀러 회사로 거듭나는 셀트리안.
그 전신이 바로 넥솔이거든.
“좋아, 자네가 추천을 하는 인물이면 한번 만나보지.”
예상과 달리 그는 흔쾌히 수긍했다.
이로써 내가 지불할 대가는 모두 마무리가 된 상태.
이젠 내가 답을 들을 차례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뜬금없이 손가락 10개를 펼쳐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딱 이 손가락의 수만큼 자네의 단기 차익실현 경매를 돕도록 하지.”
“…….”
“왜,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부족하다기보다는 그게 얼마만큼의 이익을 가져다줄지 미처 계산이 안 되는 것뿐입니다.”
“흠…… 지금 자네가 가진 여유자금이 얼마지?”
“글쎄요, 이번에 낙찰 받은 건물을 현 시세대로만 팔아도 대략 500억쯤 될 테고, 추가로 여유자금을 260억 정도는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답은 나왔군. 그 정도 자본이면 차후 자네 자산은 최소 2천억 까지는 불어 있을 게야.”
“2천억이요?”
2천억이면 지금시세로 탈레스의 지분을 족히 6퍼센트는 확보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럼 난 단숨에 2대 주주의 위치까지 올라가는 거고.
물론 그사이 스마트 포탄이 현실화되어서 주가가 폭등을 하면 계산법은 또 달라져야하겠지만. 최악의 경우라 해도 최소 3퍼센트 이상은 확보를 할 수 있을 거다.
“최소 2천억.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고.”
아무리 돈이 돈을 낳는 시대라고 해도 그건 좀 지나치게 과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하는 그의 표정을 보노라면 그게 영 농담 같지만은 않은 느낌.
그를 만난 것은 확실히 내게 천운이 따른 거나 다름없다.
“회장님 손가락이 10개뿐인 것이 무척이나 아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