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도 만들어 드릴까요? 19화
“마지막이 아닐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한 회장은 대뜸 끼어드는 나를 가늘어진 눈으로 쳐다봤다.
“우영중공업은 지금 회장님께서 여신을 제공하셔도 끝내 부실화 되는 건 못 막는다는 말입니다.”
“…….”
“그럼 회장님께선 손해를 안 보시기 위해서라도 두고두고 지원을 더 하셔야 할 텐데, 그거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인 상황이죠.”
사실에 근거한 말이니만큼 찔릴 것은 없다.
은행권에서 이미 외면을 해버린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기사회생을 했었던 우영중공업은 매번 다시 부실의 늪에 빠졌었고, 이젠 정말로 망하나보다 싶을 때마다 번번이 기사회생을 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게 한명호 회장의 조력 때문이었다는 것.
아마 그대로 둔다면 한 회장의 손해는 갈수록 커질 거고, 그를 거름 삼아 기사회생한 김판우는 차후 두고두고 이 나라의 암세포가 될 거다.
“하지만 우영중공업은 일본에만 의지하던 선박 엔진의 제조기술을 개발한 곳이야. 자넨 그런 곳이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나?”
“죄송하지만 그 기술이라는 것도 결국엔 미스비시가 효용성을 다한 것을 선심 쓰듯 우영에게 던져준 것에 불과합니다.”
“…….”
“쉽게 말해서 우영이 개발했다는 그 기술은 이미 시장성이 없다는 소리죠. 참고로 미스비시는 이미 출력과 연비가 기존보다 20퍼센트 이상 상승한 신형 엔진을 개발해 둔 상태입니다.”
한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테고,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눈치다.
“난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그거야 아직 미스비시가 개발 사실을 공표한 적이 없으니까요. 아마 내년 초쯤, 그걸 시장에 드러낼 때까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일 겁니다.”
“…….”
한명호 회장은 턱을 앙다물었다.
굳이 저 표정을 해석하자면 ‘그럼 대체 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의미 정도?
그거야 굳이 답을 해줄 필요는 없을 테니 이쯤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대못을 박아 버리는 거다.
“결국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만약 그 기술을 대출 근거로 삼으실 생각이셨다면 다시 생각을 해보시라는 겁니다. 게다가 회사가 회생을 하려면 경영자의 의지가 중요한데, 직원들은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와중에도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분이 과연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우영중공업을 위한다면 차라리 이 기회에 좀 더 도덕성을 갖춘 경영자에게 넘어가게 두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순간 한 회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던 그는 한참 후가 되어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김판우가 해외로 돈을 빼돌렸다는 것 말이야.”
당연히 책임질 수 있다.
차후 그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을 당시 뒤늦게 그 문제가 탄로 나서 정치권이 얼마나 떠들썩했는데.
결국 김판우는 그 문제로 인해서 연임에는 실패를 했지만 무슨 수를 쓴 건지 그 다음 선거에선 또 다시 정치권에 입성을 했었다.
“그거야 알아보시면 될 일 아닙니까?”
“안 그래도 그러고 있는 참이긴 하네만, 사안이 워낙 중대해서 되묻는 걸세. 내 결정 여하에 따라서 김판우는 영영 회생하지 못할 수도 있거든.”
“죄송하지만 전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
그는 한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내내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희진을 쳐다봤다.
“이 서방에게 전화해서 일단 오늘은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고 해. 그리고 사실로 드러나면 전에 우영에게 지원했었던 자금들은 전부 회수하고.”
“이미 자금을 지원하셨다고요?”
자리를 뜨는 희진을 뒤로하고 물었다.
턱을 앙다무는 것으로 봐선 적은 금액은 아닌 느낌.
조금 늦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그가 피식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자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닐세. 그나저나 혹시 자네 아버지와 내가 특별한 사이라는 건 알고 있나?”
“네, 전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도착하기 전 진 회장으로부터 그와의 인연을 확인하고 온 터였다.
재우가 어려울 때면 늘 그가 힘이 되어 주었고, 예전 재우디펜스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업체들을 인수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다 이 노인의 지원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조금 의외였던 것은 그렇게까지 경제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을 내가 왜 몰랐느냐는 건데, 어쩌면 그게 바로 이 노인의 힘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수없이 정권이 바뀌는 와중에 단 한 번도 언론을 장식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러고 보면 두 집안 사이의 인연도 꽤 질긴 편이군. 부모에 이어서 자식들까지 엮인 것을 보면 말일세.”
한 회장은 회한에 젖은 눈빛을 보였다.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가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며 나를 쳐다봤다.
“미안한 말이네만, 꼭 희진이의 일로 자네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네.”
대충 예상했던 바였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그렇듯 무례를 무릅쓰고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을 테니까.
실은 나도 그 이유를 확인하고자 끝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거다.
“실은 요즘 내가 재우그룹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던 참이었네. 우연인지, 마침 내 딸이 자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더 호기심이 동하더군.”
“왜 재우에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는지는 몰라도 따님 문제는 그야말로 우연일 뿐입니다.”
“알아, 하지만 그 우연도 거듭되면 필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실은 나와 자네 아버지와의 만남도 우연에서 시작 되었거든.”
“......”
“아무튼, 내 딸이 그러더군. 경제인 오찬 모임 초대자 명단에 자네가 있다고. 그래서 어쩌면 기회가 되겠다 싶어서 시간을 좀 내달랬더니…… 쯧,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어물쩍 넘어가려 했지만 이미 난 그의 심중에 있던 말을 캐치했다.
상했던 자존심을 내색하고 싶었던 거겠지.
늙으면 애가 된다더니, 정말로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다.
“제가 거절한 것이 마음 상하셨던 겁니까?”
“그보다는 이용문에게 밀린 것이 기분이 나빴던 거야. 막말로 내 입장에선…… 뭐야, 자네 지금 웃는 거야?”
“죄송합니다. 좀처럼 적응이 안 돼서요.”
“뭐가?”
“천하의 이용문 회장님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저로선 충격이거든요.”
“천하의 이용문은 무슨. 그 친구 선친도 예전에 내 돈 아니었으면 벌써 회사 말아먹었어.”
“그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 회장이 자네에게 그런 말까지 했다고?”
의미심장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그가 대뜸 주제를 벗어난 말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
“김판우의 일이 사실이면 내가 자네에게 큰 빚을 지게 되는 거잖아. 그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그거야, 회장님께서 손해 보실 것이 뻔히 눈에 보였기에 해드린 조언이었을 뿐입니다. 그저 호의 정도로 생각해 주시죠.”
“아니,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
쉽게 꺾일 고집이 아닌 듯 보였다.
굳이 그렇다면야 거절할 이유는 없을 터.
묵묵히 쳐다보자 그가 돌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딱히 도울 일이 없다면 뭐가 좋을까…… 어설픈 것을 쥐여 줘봐야 생색도 못 낼 것 같고. 참, 자네 혹시 부동산에 투자할 생각 있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던 터였다.
그 탓에 적당한 물건을 찾고 있기도 했고.
호기심이 동하여 쳐다본 순간, 그가 테이블 위에 있던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럼 내가 물건 하나 추천해 주지. IMF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700억 정도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400억까지 시세가 하락했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서면 300억까지는 가격을 낮출 수가 있다는 거야. 어때, 한번 도전해 보겠나?”
가격적인 측면에선 내가 가진 예산에 딱 부합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700억이나 하는 건물을 300억까지 가격을 다운시킨다는 거지?
아무리 경제위기로 매물이 쏟아졌다지만 그 정도 까지는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경매라면 가능하지.”
“…….”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군.”
“네, 미처…….”
“원래 경매란 것이 남의 손만 안 타면 유찰에 의해 순식간에 가격이 하락하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경매에 나서면 그 누구도 감히 그 물건에 숟가락을 얹으려 덤벼들지 못한다는 걸세.”
순간 우리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에 나 역시도 동의했다.
안 그래도 지금 난 잉여 자산의 투자처를 찾고 있던 차인데, 저 노인이 나타난 상황 아닌가.
만약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단순히 수익을 올리는 선을 넘어서 탈레스의 지분율을 끌어 올릴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 거다.
“......”
그러고보니 시간적 여유도 충분했다.
어차피 삼정에게 의뢰한 스마트 포탄용 센서 모듈이 완성되기까지는 족히 몇 개월은 더 걸릴 터.
그사이 지분 확보를 위한 자금을 불릴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사실 스마트 포탄이 완성되기 전에 최소한이나마 지분 확보를 해 두는 편이 좋지.’
만약 납품사실이 대외에 알려지면 주가가 뛰어 오를 테고, 그럼 지분 확보에 필요한 자금이 얼마나 더 상승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내내 고집스럽게 쳐들고 있던 머리를 갑자기 조아리기가 왠지 쑥스럽다.
꾸벅!
“그 물건, 제가 받겠습니다.”
쑥스럽기는 개뿔.
인생이 다 그런 거지.
***
“지금부터 1998 타경 610081 물건에 대한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며칠 후 한명호 회장과 나는 서울중앙법원에서 진행 중이던 경매 물건에 참여했다.
IMF 이전 시세로는 700억.
그리고 현재 감정가는 432억의 강남구 소재 대형 빌딩.
특이한 것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개인이 그걸 보유 중이었다는 건데.
엄청나게 치솟아 버린 은행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매각을 진행했지만, 제때 팔리지 않아 결국 경매로 넘어온 것이었다.
“근저당권은 대부분 제일은행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지. 대출금이 대략 300억. 설정을 120퍼센트로 했으니 사실상 낙찰금액의 대부분을 제일은행이 회수해간다고 보면 될 게야.”
“감정가도 아니고 시세가 700억이었던 건물에 300억씩이나 대출을 내줬다는 말입니까?”
“강남 붐이 일던 시기였잖아. 은행으로서도 이런 경제위기 상황은 예측을 못한 거지. 그게 아니라도 적당히 대출 담당자에게 돈만 좀 찔러주면 대출비율은 얼마든지 뻥튀기 할 수 있는 시기였고.”
“그럼 결과에 따라서 불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막말로 은행이 어떤 놈들인데.
아마 그들은 낙찰 금액이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면 반드시 이의제기를 할 거다.
“그랬다가 내가 계속 유찰을 시켜 버리면 그나마도 못 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
미처 그 점을 잊고 있었다.
이 경매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명호 회장이라는 것.
저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존재가 고의로 유찰을 유도한다면 누가 과연 그걸 막아설 수 있을까.
눈치가 있는 은행이라면 매번 20퍼센트씩이나 깎여나가는 유찰이 지속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거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손해를 보고 말지.
“그나마 난 양심적으로 2회 유찰만 시켜 놓은 상태니 저들도 다행이라고 생각 할 게야. 솔직히 2회 유찰이면 경매에서는 많이 봐주는 수준이지. 자, 그럼 이제 결과를 들어볼까?”